그때 그 이야기/빨간 마후라

<357>제3話 빨간 마후라 -107-기적의 코리아 백신

화이트보스 2009. 5. 27. 21:00
<357>제3話 빨간 마후라 -107-기적의 코리아 백신

내가 직접 청와대로 콜레라 예방 백신을 긴급 지원 요청한 것은 외무부에는 미안한 일이지만 외교 통로를 통해 절차를 밟으면 그만큼 시간이 걸려 환자의 구제가 늦어진다는 절박감 때문이었다. 담당자의 기안을 시작으로 과장-국장-차관보-차관-장관 등 결재가 올라가는 동안 시간이 걸리고 현실성 있는 지원이냐 아니냐 의견 조율하는 사이 환자는 자꾸 죽어 나가는 것이다.

특히 내가 청와대 직보 라인을 구축한 것은 에티오피아 보건 당국의 불쾌한 반응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인도적 일념으로 에티오피아 보건장관을 방문했는데 그는 미국·소련·영국·프랑스·독일 등 선진국들도 방치하는데 동방의 조그만 분단 국가가 돕겠다고 자청하고 나서니 신빙성 있는 제안이냐며 아예 묵살하려 들었다.

나는 보건장관에게 “대한민국의 약으로 에티오피아 국민을 도울 것입니다” 하고 자신 있게 장담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그런데 보건성의 공무원들도 내 등 뒤에서 “코리아는 우리가 도왔다”며 중얼거렸다. 그들은 솔로몬왕과 시바 여왕의 나라라는 자부심이 대단했고 무엇보다 6·25전쟁 때 한국에 파병한 나라라는 것을 은연중 자랑하며 우리를 무시하고 있었다. 말단 공무원들까지도 그런 인식을 갖고 있다는 것에 나는 자존심이 상해 기어이 관철시킬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다졌다.

에티오피아는 국토가 한반도의 여섯 배에 달하고 인구도 4500만 명(1970년 당시)이나 됐으며 아프리카의 정치 지도국으로서 외교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나라였다.

마침내 며칠 후 서울에서 전세기가 날아왔다. 20만cc나 되는 콜레라 예방 백신이 직접 공수됐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이 약은 에티오피아 13개 주 주립병원에 배당됐는데 몇 개월분의 비축 물량이라고 했다. 대통령의 하사품이라는 표시가 붙은 메이드 인 코리아의 콜레라 예방 백신은 그날로 전국에 보급돼 주입이 실시됐으며 당장 효과가 나타났다.

매일 수백 명씩 죽어 가는 환자가 주사 한 방으로 거뜬히 일어나 기동했다. 현지 TV는 물론 라디오에서 연일 한국의 ‘기적의 약’을 특집 방송으로 내보냈다. 선진국들이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이 해냈다고 높이 평가했다.

며칠 후 에티오피아 보건장관이 대사관을 찾아와 ‘코리아의 아름다운 인도적 손길’에 대해 나의 두 손을 잡으며 거듭 감사를 표시했다. 코리아 백신을 맞고 완쾌한 환자들이 대사관을 찾는가 하면 엽서로 고마움을 전해 오기도 했다.

1970년 4월 부임한 지 8개월쯤 되는 날이었다. 나는 수도 아디스아바바 인근에 ‘코리아 빌리지’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곳을 방문키로 했다. 아프리카에 한국인촌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으나 왠지 주민들이 기피하는 인상을 줬다. 그것이 더 이상해 어느 날 나는 비서를 데리고 현지로 나갔다.

한국인촌은 그야말로 폐허나 다름없었다. 한국인촌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퇴락한 집들과 꾀죄죄한 절망적인 모습의 주민들, 그리고 무엇보다 학교 건물이 금방 쓰러질 정도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나마 교실이 절대 부족해 5부제 수업을 하고 있었다. 2부제도 불편한데 5부제를 하고 있으니 따지자면 학교라고 할 것도 없었다.

나는 한 젊은 주민에게 다가가 한국인촌이 왜 이처럼 황폐하게 됐느냐고 물었다. 주민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10년 전(1960년) 셀라시에 황제를 몰아내고 대신 황태자를 새 황제로 옹립하려는 군부 쿠데타가 있었습니다. 그 쿠데타 세력의 주력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이었습니다. 쿠데타가 실패하자 그들 대부분이 처형되고 황태자는 감금됐습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용맹스러운 군인들이 처형되면서 유족들이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없게 됐지요.

정부도 그들이 살고 있던 이곳을 반역의 땅이라고 해서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죄인처럼 살고 있고 취업도 안 되니 폐촌이 돼 버린 것입니다. 사태가 이렇게 된 것은 황태자 때문이지요.”

셀라시에 황제가 한국전쟁 참전 용사와 상이군인들을 위해 조성해 준 코리아 빌리지는 이런 연고로 버림받은 땅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2005.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