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에 민족위해 많은 일" 김정일 위원장의 말 전해
조문후 김형오의장 면담 이(李)여사에겐 조의(弔意) 전해… 과거 대북(對北)실세들과 만찬
21일 오후 2시59분. 북한 고려항공 소속 76석짜리 러시아제 소형 항공기가 김포공항에 착륙했다. 북한 김기남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등 6명의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단이 타고 온 비행기였다. DJ 정부에서 통일부장관을 지낸 정세현 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 홍양호 통일부 차관 등 10여명이 이들을 맞았다.공항 바깥에선 007작전이 벌어졌다. 경찰 무전기에선 "정문으로 간다. 후문으로 간다"는 등 혼선을 주는 내용이 쏟아졌다. 상이군경회 등 보수단체 회원 100여명이 시위를 벌이고 있어 이들을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조화를 앞세운 조문단
오후 3시40분 조문단은 2대의 에쿠스와 1대의 다이너스티에 나눠 타고 보수단체가 없는 김포공항 후문으로 향했다. 가로 20m, 세로 10m는 되는 육중한 철문이 열리자 뜻밖에도 흰 트럭이 조문단을 '이끌고' 나왔다. 김정일의 조화가 실린 것이었다.
오후 3시53분 김 비서 등 북측 사절단이 김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도착했다. '조화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는 우리측 안내원이 "먼저 올라가시라"고 했지만 이들은 내리지 않았다. 대신 트럭의 문이 먼저 열리고 2m 높이의 조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문단은 조화를 앞세우고 빈소로 올라갔다. 일부 시민들이 박수와 함성을 지르며 "환영합니다"를 외쳤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불렀다.
- ▲ 비행기 타고 온 北조문단 김기남 노동당 비서 등 북한의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단이 21일 오후 고려항공 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 트랩을 내려와 마중나온 정세현 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 등 우리측 인사들과 인사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정 대표가 "김 전 대통령께서는 돌아가시면서도 남북 대화 재개를 희망하셨다"고 하자 김 비서는 짧게 "예"라고만 답했다. 한 전 총리가 "지난번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시 북측이 조선중앙통신으로 조의를 표해 주셔서 감사드린다"고 했지만 김 비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방명록에는 '정의와 량심을 지켜 민족 앞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김대중 전 대통령을 추모하며 특사조의방문단 김기남'이라고 썼다.
◆"북남 화합 위해 할 일 많다"
조문을 마친 뒤 박계동 국회 사무총장이 김 비서에게 "김형오 국회의장이 차 한잔 하자고 한다"며 면담을 제안했고, "그러자"고 답해 김 의장과 10여분간 면담이 이뤄졌다. 김 의장이 "이번 기회가 남북관계 돌파구의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하자 김 비서는 "고인의 명복을 비는 의미에서 북남 화합을 위해 할 일이 많다"고 화답했다.
오후 4시35분 조문단은 국회를 떠나 이희호 여사를 만나기 위해 동교동 김대중평화센터로 향했다. 배석했던 박지원 의원은 "김 비서가 함께 온 홍양호 통일부 차관에게 '(누구든) 다 만나겠다'고 했다"며 "적극적인 의사를 펼쳤으니 정부에서 무슨 얘기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김 비서는 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생전에 민족을 위해 많은 일을 하셨다'는 김정일의 말을 전했다. 그는 김정일의 서명이 적힌 조의 메시지를 읽고 난 뒤 이를 이 여사에게 전달했다. 이 여사는 조문에 감사의 뜻을 표한 뒤, 스카프와 넥타이를 선물했다.
- ▲ 동교동 방문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오른쪽)가 21일 서울 동교동 김 대중평화센터에서 북한 조문단장 김기남 노동당 비서(왼쪽)의 예방을 받고 인사하고 있다. 가운데는 북측 조문단으로 함께 온 김양건 통일전선부장./김대중평화센터 제공
◆보수단체 "예약한 방이 사라졌다"
오후 5시50분쯤 조문단은 숙소인 서울 홍은동 그랜드힐튼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바깥에서는 50여명의 보수단체 회원들이 김정일·김정운 사진이 든 피켓을 불태우고 "북한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경찰은 이들을 조문단이 보지 못하는 곳으로 밀어냈다.
조문단은 도열한 경찰관들 사이를 지나 숙소로 올라갔다. 경찰관들이 흩어지고, 5분쯤 후 낡은 007가방 5개와 작은 여행용 가방 2~3개가 조문단의 차량에서 내려져 엘리베이터에 실렸고 숙소인 5층에서 멈췄다.
바깥에선 경찰과 경호원들이 '요주의' 보수단체 인사들의 사진이 인쇄된 종이를 들고 드나드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30분쯤 후 임동원·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박지원 의원 등 지난 10년간 대북정책을 책임졌던 실세들이 호텔로 왔다.
'호텔 고객'으로 경호원의 눈을 피해 일찌감치 자리 잡은 탈북자 단체 자유북한운동연합의 박상학 대표는 전 정권의 실세들을 향해 "김정일의 장학생들!"이라며 소리쳤다. 납북자가족모임 최성용 대표는 "어제 직접 와서 30만원 주고 예약했는데 갑자기 방이 없어졌다"고 소리 질렀다.
호텔로 들어간 북한 조문단은 임 전 장관, 박 의원,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 등 김대중평화센터 관계자들과 저녁식사를 하고 밤 10시쯤 자신들의 방으로 올라간 이후 호텔을 나오지 않았다. 임 전 장관은 만찬을 마친 뒤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냥 저녁자리였다"고 했다. 그러나 조문단 숙소 바로 위인 6층에선 결재서류를 든 공무원들이 눈에 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