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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격전·단기전·장기전, 박근혜의 3차 대전

화이트보스 2010. 1. 21. 19:10

전격전·단기전·장기전, 박근혜의 3차 대전

시사IN | 천관율 기자 | 입력 2010.01.21 11:34

 




스스로 퇴로를 끊었다. 청와대가 세종시 수정 카드를 꺼내든 지난해 9월부터 지난 1월11일 수정안이 발표되기까지,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의 반발은 그칠 줄 몰랐다. "세종시는 원안 플러스 알파로 가야 한다"(지난해 10월23일) "수정안이 당론으로 확정되더라도 반대한다"(1월7일) "수정안에 원안은 없고 플러스 알파만 있더라" "약속을 지키자는 얘기가 제왕적이라고 한다면, 그 말 백번이라도 듣겠다"(이상 1월12일)라며 강성 발언을 쏟아냈다. 이제와 슬쩍 수정안을 수용하거나 '정부부처 축소 이전' 따위 타협안을 받기에는 던져놓은 말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 '원칙과 신뢰'를 최대 브랜드로 삼아온 박 전 대표로서는 돌아갈 길이 없다. 친박계 의원들에게도 확실한 동원령을 내린 셈이다.

왜 이렇게 세게 나올까. "정치적으로 손해인 줄 알면서도 원칙을 어길 수 없어 나섰다"라는 친박계의 원론적인 설명이나, "이번엔 박 전 대표가 너무 나간 것 같다. 여론이 수정안 찬성으로 돌아서면서 진퇴양난의 처지가 될 것이다"라는 친이 직계의 기대 섞인 예측 모두 속 시원한 해석이라기에는 모자란다. 세종시를 둘러싼 전투 자체가 워낙 복잡해 그림이 잡히지 않는 탓도 있다. 세 곳의 전선에서 세 개의 전투가 뒤엉켜 벌어진다. 여의도의 '전격전', 충청권을 둘러싼 '단기전', 그리고 2012년 총선과 대선을 겨냥한 '장기전'이 동시에 진행되는 형국이다. 때 이르게 전면전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박 전 대표가 세 전선을 읽는 셈법은 뭘까.





여의도에서는 친박계 화력 압도 :

국회 내의 세력관계만 놓고 보면 친박계가 여유를 부릴 법하다. 한나라당 의석은 모두 169석. 하지만 이 중 50~60명이 친박계로 분류된다. 세종시 수정안을 찬성하는 야당은 단 한 곳도 없는 상황에서 한나라당은 단독 과반수를 만들어야 수정안을 통과시킬 수 있다. 친박계의 반대표를 20표 안쪽으로 묶어야 한다는 얘긴데, 지금으로서는 어림없는 목표다.

세종시 수정안 지지 의사를 밝혔던 김무성 의원 등 몇몇 친박계의 이탈 가능성은 점쳐지지만 대세를 바꿀 정도는 아니다. 김 의원이 친박계의 좌장 격이라는 말은 정치권에서는 한참 옛날 얘기로 통한다. 친이계 내에서 논란이 되는 수정안 국회 처리 시점을 두고, 박 전 대표의 대변인 격인 이정현 의원은 "우리는 전혀 관심 없다"라고 말했다. 언제 국회로 넘어오든 넉넉히 되물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친이계가 그나마 현실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전술은 세종시 원안 추진인 현재의 당론을 바꿔 친박계를 압박하는 것이었다. 한나라당 당헌상 한 번 정해진 당론을 바꾸는 데는 재적의원 3분의 2가 동의해야 한다. 169명 의원 중 최소 113표가 필요한데, 150표를 만들어야 하는 본회의 통과보다는 목표치가 낮은 셈이다. 여전히 힘들기는 하지만 친이계가 결집하고 친박계에서 이탈표가 나오면 불가능하지는 않은 목표다. 친이계는 당론 변경에 성공하고 난 후 "당원은 충분한 토론을 거친 당론을 따라야 한다"라는 '박근혜식 원칙 공세'로 친박계를 흔든다는 그림이었다.

수가 읽혔을까. 박 전 대표는 수정안이 나오기도 전인 지난 1월7일 "수정안이 당론으로 확정되더라도 반대한다"라고 못을 박아버렸다. 박 전 대표로서는 상대적으로 불확실한 당론 투표 대신 안심할 수 있는 본회의장 투표로 저지선을 뒤로 물려 변수를 제거한 셈이다. 이후 친이계에서 "당론까지 무시하는 제왕적 행태"라는 비판이 나오고, 홍준표 의원이 "무기명 당론투표를 하자"고 제안하기도 했지만 김이 샌 모양새다.

현 상황이 고착된다면, 적어도 여의도 내에서 친이계가 세종시 수정안을 관철시킬 길은 없다. 박 전 대표가 전면전으로 치고 나올 수 있었던 믿는 구석도 이 지점이다. 하지만 '현 상황'의 핵심은 수정안에 비판적이고 원안 추진을 요구하는 충청권 여론이다. 청와대와 친이계가 '변수'를 기대하는 지점도 여기다.

충청권 여론전은 버틸 수 있다? :

"충청권 여론이 수정안 지지로 반전되면 박 전 대표는 진퇴양난의 처지가 된다. 균형발전 원칙과 대국민 약속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했던 터라 충청권 여론을 핑계로 후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원안을 고집하면 오히려 충청권 발목 잡기가 된다. 아주 꼴사나운 후퇴를 해야 할 수도 있다." 중립 성향의 한 한나라당 중진 의원은 결국 충청권 여론의 향배가 핵심 변수라며 이렇게 말했다. 충청권 여론이 반전되면 청와대와 친이계가 한 방에 역전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수정안 발표 후 지난 한 주 내내 친이계가 충청권 민심 잡기에 발 벗고 나선 것도 그래서다.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이 발표되면서 정국은 '예고된 격랑'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위는 지난 1월11일 수정안을 발표하는 정운찬 총리(가운데).

지난 한 주 신문과 방송 등 유력 언론들도 앞 다투어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충청권에서는 15% 포인트 안팎의 차이로 원안 지지가 수정안 지지보다 높게 나왔다. 수정안 지지가 10% 포인트 안팎으로 앞선 전국 여론과는 차이가 크다. 이를 두고 한나라당의 한 친이 직계 의원은 "세종시 수정안이 원안보다 충청권에 더 좋은 안이라는 인식이 퍼지는 데 시간이 필요하리라고 본다. 설 연휴를 계기로 뒤집히지 않을까"라고 낙관했다.

반면 친박계가 '믿는 구석'은 두 가지다. 우선 박 전 대표의 '한 마디'가 나오는 타이밍이 이전보다 한 박자 이상 빨라졌다. 수정안이 나오기도 전에 "원안 플러스 알파" 발언을 내놓고, 친이계의 당론 추진 기류가 무르익기도 전에 "수정안이 당론이 돼도 나는 반대"라고 선수를 쳤다. 여론전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엿보이고, 일정 정도 성과도 거뒀다.

원안 추진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정부가 세종시에 쏟아 부은 각종 특혜가 결국 전국 여론전에서 부메랑이 될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한 친박계 의원은 "충청이 돌아선다고 치자. 그건 결국 수정안이 원안 추진론을 잠재울 만큼 엄청난 특혜라는 뜻이 된다. 그런 특혜가 특정 지역에 집중되는데 다른 지역이 가만히 있을 리가 있겠나. 충청이 넘어간다는 건 오히려 전국 여론이 수정안 반대로 기운다는 의미다"라고 말했다.

여전히 궁금증은 남는다. 충청권 여론을 둘러싼 셈법이 다르다고는 해도, 그것만으로 이렇게까지 정면충돌이 벌어질 수 있을까. 근본적으로 불확실성이 높은 '여론의 추이'에 기대어(더욱이 충청권은 전문가들조차 혀를 내두르는 여론조사의 무덤이다) '올인 전략'을 펴는 것은 극히 위험한 선택이다. 통제할 수 없는 변수에 너무 많은 것을 거는 꼴이다. 이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양쪽 모두 충청 여론전에서 진다고 해도 손해 볼 것 없다는 계산이 섰다"라는 분석이 나온다.

'장기전'은 결국 수도권 쟁탈전 :

2012년 총선과 대선이라는 '최종전'을 염두에 둔다면, 진짜 백마고지는 수도권이다. 두 계파 모두 전투는 충청에서 치르면서 눈길은 수도권에 가 있다. 애초에 세종시 문제에서 MB와 박 전 대표의 정치적 판단이 갈린 것도 궁극적으로는 수도권에 대한 셈법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겉으로는 충청권 여론 향배에 모든 것을 건 전면전처럼 보이지만, 설사 단기전에서 진다고 해도 장기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잡을 수 있다는 계산을 양쪽 모두 한다는 얘기다.

친이 직계 의원들에게서는 "설 연휴에 수도권 사람들이 충청권에 내려가면 여론이 달라질 것이다"라는 얘기를 흔히 들을 수 있다. 한 친이계 수도권 초선 의원은 아예 "수정안 처리 시점을 지자체 선거 이후로 늦춰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이 이슈로 최소한 손해 볼 일은 없다. 세종시 이슈를 걸고 서울시장 선거를 이긴다면 그 동력으로 국회 통과를 시도해 볼 수도 있다"라는 것이다. 모두 '수도권은 우리 편'이라고 전제하는 수읽기다.

궁극적으로는 수도권을 일종의 '지역 기반' 수준으로까지 다져내겠다는 속내가 읽힌다. 영남권을 확실히 장악하고 충청권에서도 인기가 높은 박 전 대표에 견줘, 친이계의 지역 기반은 취약하다. 지난 18대 총선에서 수도권을 휩쓸다시피 했지만 아직 기반을 다진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설사 이번 세종시 여론전에서 퇴각하게 된다 해도, 수도권 유권자에게 친이계의 '충성심'을 증명하고 박 전 대표를 '지역 맹주'로 격하시키는 효과는 기대할 수 있다는 얘기다. 또 다른 친이계 의원은 "어차피 영남권은 친박계 차지고 호남은 민주당 몫이다. 충청권을 놓친다 해도 유권자의 절반이 몰린 수도권을 잡으면 삼자 구도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연말 예산 정국 당시 본회의장의 박근혜 전 대표

제대로 작동하는 그림일까. 박 전 대표의 한 최측근 의원은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이 수도권 유권자와 박 전 대표를 갈라놓는 '박근혜 죽이기' 효과를 노린 면이 있다"라고 위험성을 인정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크게 긴장하는 기색이 아니다. 또 다른 친박계 의원은 "18대 총선 때 '뉴타운 선거'로 재미 좀 본 걸로 착각하는 것 같은데, 수도권은 여전히 출신 지역의 정서를 강하게 갖고 있는 곳이지 별개의 정체성이 있는 곳이 아니다. 친이계가 노리는 '수도권 정당'은 아직 먼 미래 얘기다. 강남이면 모를까 서울에는 '서울 정체성'이 아직 없다"라고 말했다. 근본적으로, 수도권은 어느 한 정당이 독점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라는 얘기다.

친이계의 '수도권 지역기반 구상'을 두고는 정작 서울시장 선거를 준비 중인 후보들이 앞장서 고개를 젓는다. 친이계와 중도파로 분류되는 유력 후보들은 모두 세종시 수정안을 가결되든 부결되든 4월 이전에 처리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한 후보는 아예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라고 했다. "수도권 중에서도 영남 출신과 호남 출신은 고정 상수다. 두 표는 서로 상쇄된다고 봐야 하니 변수가 아니다. 그런데 세종시 이슈를 오래 끌어 충청 출신 표가 야권으로 결집해버린다면, 그때는 선거 해보나 마나다." '세종시'는 '뉴타운'과는 이슈의 파괴력이 달라서 충청권 유권자의 이탈은 확실히 불러오는 반면 수도권 유권자의 결집을 기대하기는 힘들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수도권은 독점이 불가능하다." 친이계의 '수도권 거점화' 그림에 맞서 친박계가 믿는 대전제다. 박 전 대표가 전면전을 선언할 수 있었던 데는 세 개의 전선 모두에서 유리하거나 최소한 불리하지 않다는 계산이 섰기 때문으로 보인다.

천관율 기자 /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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