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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연재를 시작하며

화이트보스 2010. 3. 22. 19:25
[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연재를 시작하며
실존인물이든… 허구인물이든… 아이돌이든…
낯설지않은 여자들 삶속으로 '코드' 끄집어내 단상 담을것
"페미니즘이나 마초 코드가 아닌 '자이노파일'로서
그녀들에 대한 호의적 생각들, 흥미와 생각의 깊이 교감했으면…"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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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김경진기자 jinjin@hk.co.kr

다음 월요일 아침부터 한 주에 한 차례씩 살필 소재는 여자(들)다. 그 소재(들)는 여자(들) 일반이 아니라 특정한 여자(들)다. 독자들이나 내가 적어도 이름은 알고 있는 여자들. 이런 소재를 고른 것은 내가 여자를 좋아하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내가 페미니스트라는 뜻이 아니다. 나는 페미니스트도 마초도 아니다. 그저 남자에게보다 여자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남자일 뿐이다.

흔히 쓰는 말은 아니지만, 나에게 영어 단어로 딱지를 붙인다면 ‘자이노파일’(gynophile) 정도가 될 테다. 잉글랜드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앵글로파일(anglophile)이라 부르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시네파일(cinephile)이라 부르듯, 나는 여자를 애호하는 자이노파일인 것이다.(이 낱말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까지 올라간다.

이 말의 앞부분은 ‘여자’라는 뜻의 그리스어 단어[gune]가 변한 것이고, 뒷부분은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형태소[-philes]가 변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자이노파일을 자처할 때, 이 영어 낱말에 담긴 성적(性的) 함의까지 껴안는 것은 아니다.

흔히, 나는 여자와 수다떠는 것이 여자와 섹스하는 것보다(못지않게?) 즐겁다. 나는 여성이라는 ‘섹스’를 좋아한다기보다 여성이라는 ‘젠더’를 좋아한다. 그 둘이 늘 또렷이 구분되는 것은 아니겠으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이 행성에서 살다 죽은 수백억(?) 인류 가운데 절반 안팎은 여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쓰는 사람들은 그만한 비율을 여자들에게 할당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기록된 역사는 압도적으로 남자들의 역사다. 그 불공평함의 책임을 역사 기록자의 편견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모계사회(라는 것이 정녕 있었을까?)가 막을 내린 뒤, 역사는 남자들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을 실천함으로써 역사를 만들어온 것은 주로 남자였다.

어떤 이유에서든, 역사의 실천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소극적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여성을 남성보다 ‘덜 중요한 성’으로 만들었다. 그러니 공정한 역사 기록자라면, 역사가 남녀 각각에게 부여한 기능 부담의 불공정성을 공정하게, 다시 말해 불공평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에 가장 널리 퍼진 종교의 성서 자체가 여자의 부차성(副次性)이나 종속성을 선포하고 있다. 그 기록에 따르면, 하느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 남자를 만들었고, 그 남자의 갈비뼈 하나를 취해 여자를 만들었다.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에 불과한 것이다.

역사에 기록되는 ‘행운’을 지닌 여자는,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주로 극단적 역할을 맡았던 이들이다. 전형적 예로 잔다르크를 들 수 있다. 그녀에겐 성녀(聖女)의 이미지와 광녀(狂女)의 이미지가 뒤섞여 있다.

그녀를 저주하며 불태워 죽인 사람들에게나 그녀를 ‘오를레앙의 성녀’로 숭배하는 사람들에게나, 잔다르크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그녀의 거처는 천당이거나 지옥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 위에는 그녀의 자리가 없다.

특별히 악독하거나 특별히 거룩한 여자들만 역사에 기록된다. 잉글랜드 여왕 메리1세(피의 메리ㆍBloody Mary)나 프랑스 앙리2세의 비(妃) 카트린 드 메디시스(이 두 여자의 손은 신교도의 피로 흥건했다), 또는 성모 마리아나 테레사 수녀 같은 이들 말이다.

우리가 다음 주부터 살펴볼 여자들이 반드시 그런 극단적 여성들은 아니다. 그렇다고 아주 평범한 여자들도 아니다. 너무 평범해서 역사 기록자의 눈이나 작가들의 상상력에 걸려들지 않은 여자(들)를 내가 찾아내거나 지어내서 살펴볼 수는 없다. 이 연재물은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필 여자들은 우리에게 이미 알려진 여자들이다.

그녀들의 범주는 넓다. 누구는 지금 살아있을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구는 이미 죽었을 수도 있다. 누구는 10대의 아이돌 그룹 멤버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구는 80대의 소설가나 극작가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그 80대의 소설가나 극작가가 만들어낸 인물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나는 이 연재물의 주인공들을 실존했던(하는) 여자들에 한정하지 않을 것이다. 예술가의 상상력 속에서 빚어진 여자들도, 그러니까 예술작품 속의 여자들도, 그 삶이 흥미롭다고 판단되면, 나는 펜을 들이댈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내가 꽤 공정한 사람인 듯 보인다. 죽은 자와 산 자를 차별하지 않고, 실존인물과 허구인물을 차별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살펴볼 여자를 고르는 일에서 나는 매우 편파적이고 불공정하기 쉬울 것이다.

나는 우연히 내 눈에 걸려든 여자들만을 살필 것이다. 나는 살펴볼 여자들의 리스트를 만들지 않았다. 그것은 네 해 전 ‘시인공화국 풍경들’을 쓸 때부터 실천해온 원칙이다.

무원칙이라는 원칙을, 비체계라는 체계를 나는 선호한다. 그 여자들은 어느 날 일식집에서 초밥을 집는 내 젓가락에서 튀어나올 수도 있고, 서울 지하철3호선에 나붙은 광고에서 튀어나올 수도 있다.

홍제천변을 스치는 내 걸음걸이에서 떠오를 수도 있고, 잠자리에서 읽는 만화책에서 떠오를 수도 있다. 그 결과는 치우침으로 나타나기 쉬울 것이다. 이를테면 특정한 시대나 공간의 여자들이 다른 시대나 공간의 여자들보다 훨씬 더 많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 선택은 인물의 역사적 중요도가 아니라 내 취향과 변덕을 반영할 것이다. 앞질러 짐작해보자면, 동양(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으나) 여자보다는 서양 여자가 더 자주 나올 것 같고, 옛날 여자보다 비교적 가까운 시기의 여자들이 더 자주 나올 것 같다.

그러나 이 무원칙 안에서도 작동하는 원칙은 있을 것이다. 우선 나는 독자들 귀에 익숙한 여자들을 고르려고 애쓸 것이다.

이를테면 허난설헌이나 로자 룩셈부르크나 퀴리부인이나 힐러리 클린턴이나 박근혜 같은 실존여자들, 샤흐라자드나 보바리 부인이나 마농 레스코 같은 이야기 속 여자들, 또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그림이나 음악의 소재가 된 여자들. 방금 거론한 이들을 이 연재물에서 다 다루겠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대다수 독자들에게 낯설 것이 분명한 인물을 대상으로 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대상 인물에 대한 사전 정보를 독자들과 내가 많이 공유할수록, 소통이 매끄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원칙이 없다면, 나는 우리 동네 슈퍼마켓의 여점원 얘기나 가끔 들르는 도서관의 사서(司書) 얘기를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그렇게 사적으로만 알고 있는 여자(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룰 여자들은, 실존인물이든 허구인물이든, 꽤 유명한 사람들이다. 역사학자들의 관심이나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한 여자들 말이다. 이따금 일부 독자들의 귀에 선 이름이 나올지도 모르겠으나, 원칙적으로 이 시리즈 ‘여자들’은 ‘유명한 여자들’이다.

유명한 여자들을 골라야 할 이유가 독자들의 (잠재적) 관심만은 아니다. 나는 이 연재물에서 어떤 여자(들)의 일대기를 쓸 생각이 없다. 혹시 내가 로자 룩셈부르크나 클라라 체트킨을 등장시킨다면, 나는 이 유명한 사회주의자들의 생애를 밑두리콧두리 늘어놓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정보들은 백과사전이나 전기물(傳記物)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나는 그녀들의 생애에 대해 독자들이 상당한 정보를 독자들이 이미 지니고 있다고 치고, 혁명의 열정과 사랑의 열정이 교차하는 모습이나 19세기 말 20세기 초 여성운동을 들여다보며 내 소감을 늘어놓을 것이다.

혹시 내가 마농 레스코나 보바리 부인을 등장시킨다면, 아베 프레보나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소설을 요약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독자들이 그 소설들을 읽었다고 치고, 여자들의 환상과 변덕과 허영심에 관심을 집중시킬 것이다.

물론 그들 생애의 정보를 아예 생략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일 누군가의 삶에 대한 정보가 완전히 생략된다면, 그 사람에 대해 무슨 논평을 하는 것에 아무런 뜻이 없을 테니 말이다. 나는 주인공들의 전기적(傳記的) 정보를 되도록 헐겁게 스케치하고, 그 여자들의 삶(의 어떤 순간)에서 내가 떠올린 잡감에 집중할 것이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이 연재물은 여자 얘기가 아니다. 어떤 여자를 실마리 삼아, 시쳇말로 ‘코드’를 끄집어내, 그 코드에 대한 내 생각을 담는 이념적 에세이가 될 것이다.

나는 페미니즘 코드로 여자들을 옹호할 생각도 없고, 마초 코드로 여자를 낮추볼 생각도 없다. 그러나 내가 본디 자이노파일인 만큼, 내 생각의 회로는 그 여자(들)의 삶에 친화적이고 호의적이기 쉬울 것이다.

이 유명한 여자들에 대한 내 이런저런 생각들이 독자들의 흥미를 끌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더 바라는 것은 그 생각이 깊이를 획득하는 것이다. 그 둘 다를 이룰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