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04.19 23:57
김시덕·고려대 일본연구센터 HK연구교수

전근대(前近代)는 물자가 부족한 시대였다. 그렇기에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근세 일본에서도 사람들은 가능한 한 모든 물자를 재활용했다. 책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사서오경이나 불경과 같은 '훌륭한' 책을 찍을 때에는 질 좋은 종이를 쓰고 겉표지도 정성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책이 용도 폐기되면 그냥 없애버리는 게 아니라 분해해서 다시 종이로 떴다. 그러면 원래 책에 찍혀 있던 먹물이 섞여서 시커먼 종이가 만들어진다. 이런 종이로는 첫 책보다 아래 단계의 책을 찍었다. 전근대 봉건사회에서는 책에도 계급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책은 겉표지도 열악한 재료로 만들기 때문에 경도(硬度)를 보강하려고 사람 머리카락이나 손톱을 섞어 넣었다. 생각해보시라. 종이 섬유와 잘 엮이는 머리카락·손톱은 훌륭한 단백질 덩어리인 것이다. 고서에 섞여 있는 까만 머리카락을 볼 때면, 몇백 년 전 일본 사람이나 지금의 나나 똑같은 사람이구나 하는 기묘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당시 일본 사람들은 이런 책을 귀히 여기지 않아서 화장실 같은 데서 읽고 팽개쳐두곤 했다. 이런저런 의미에서 고서는 옛 사람들의 DNA와 당시의 병균을 오늘날에 전하는 타임캡슐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옛 책을 볼 때는 손을 두 번 씻어야 한다. 책 보기 전에는 책 보존을 위해, 책 본 뒤에는 내 건강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