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무신정권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
몽골은 거란 소탕을 자신의 공으로 주장하면서 고려에 무리한 공물을 요구했습니다. 고려는 종래에도 요와 금에 대해 공물을 보낸 적이 있지만, 공물의 대가로 그 이상의 답례품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몽골의 경우는 답례품이 없는 일방적인 징발이었기 때문에 고려의 반발이 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에 왔다 돌아가던 몽골 사신 저고여가 압롱강가에서 피살당하는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몽골은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려에 대해 국교 단절을 선언했습니다.
더구나 이 당시는 동아시아에 다시 전쟁의 기운이 감도는 때였습니다. 칭기즈칸의 뒤를 이어 몽골의 태종이 되었던 오고타이가 본격적으로 금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때였으므로 오고타이는 장군 살리타로 하여금 고려 공격을 명령했습니다. 이것이 몽골의 1차 침략이었습니다.
살리타는 기습적으로 서북 지방을 점령한 후, 별동부대를 남하시켜 개경을 포위하고 충주, 청주까지 공격했습니다. 이에 당황한 최우 정권은 일단 몽골에 강화를 제기함으로써 위기를 수습했습니다. 살리타는 서북지방에 72명의 다루가치라고 불리는 지방 감시관을 남기고 돌아갔습니다. 몽골은 그 후 다루가치를 개경에까지 파견해 많은 공물과 인질, 그리고 기술자까지 요구했습니다.
몽골의 무리한 요구가 더욱 심해지자 최우 정권은 몽골과의 결전을 다짐하고 강화도로의 천도를 단행했습니다. 강화 천도는 물에 약한 몽골의 약점을 이용한 전술로 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집권층이 자신들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최우는 100여 개의 수레에 자기 재산을 챙겨 강화도로 수송했습니다. 그러나 본토의 백성들에게는 산성과 섬으로 피신하라는 명령만을 내렸을 뿐, 별다른 대책을 세워주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은 엄청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몽골은 금을 정복한 뒤에 고려에 대한 더욱 집중적인 공격에 나섰습니다. 몽골의 침략은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지배자 최의가 암살당해 몽골과 화의가 성립하는 1258년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계속되었는데, 그 기간은 무려 30년이나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1254년에 시작되어 6년간이나 계속된 마지막 침략의 피해는 대단히 커서 몽골병에게 포로가 된 남녀가 20만 6,800명이며 살육된 자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지나간 지역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몽골병의 침입이 있은 이래 일찍이 이처럼 혹심한 피해는 없었다"라고 <고려사>에 기록될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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