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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섬사람들은 '자字'와 '호號'문화를 계속 고집했을까?섬에 대한 새로운 관점

화이트보스 2019. 12. 26. 21:56


왜 섬사람들은 '자字'와 '호號'문화를 계속 고집했을까?섬에 대한 새로운 관점, '섬의 인문학' 담론

박혜련 리뷰어 | 승인 2016.04.04 13:51

섬은 생활공간, 관광지, 문학적 상징 등 여러 의미로 존재한다. 섬과 도서문화에 대한 연구를 주도해온 중진 역사학자인 강봉룡 목포대 교수는 「‘섬의 인문학’ 담론」(『도서문화』 제44집, 2014년 12월)에서 ‘섬의 인문학’에 대한 기초공사를 시도했다. 기초공사란 섬이라는 단어의 유래, 연관된 개념들에 대한 정확한 규정, 섬을 바라봐온 인간적 관찰의 틀이 역사적으로 변해온 과정,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섬 담론화의 방향 제시다. 

이 글의 큰 특징은 섬을 양면적 속성에서 파악한다는 점에 있다. 섬은 바닷길을 매개해주는 ‘소통’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바다에 의해 단절되는 ‘고립’의 공간을 상징하기도 하다. 섬에 연관된 인간의 삶과 섬을 둘러싼 역사적 표현행위는 모두 이 둘의 길항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강봉룡 교수는 섬과 바다가 자연 환경적, 인문 사회적으로 긴밀한 관계에 있다고 보고, 둘을 하나로 묶은 ‘도서해양’이라는 용어를 제안하고 이를 위한 예비논의를 두툼하게 구축하고 있어 주목을 요한다.
 

양면성의 구체적인 사례,
소통성과 고립성을 앞세운 시대

그렇다면 ‘도서해양’, 즉 섬과 바다는 어째서 양면적인가? 우선 일반적인 차원에서 접근해보자. 고요한 바다와 거친 바다를 떠올려볼 수 있다. 쾌청한 하늘 아래에서 바람을 가르는 쾌속페리선과 태풍으로 항구에 묶여서 종이배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는 어선들을 떠올려볼 수 있겠다. 이것을 논문에서는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

“바다를 위험한 공간, 단절의 공간, 장애물로 인 식하게 되면 섬은 그 바다에 의해 차단되어 고립되는 폐쇄 공간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고, 반대로 바다를 세계를 이어주는 통로(바닷길)로 인식하게 되면 섬은 바닷길에 의해 소통되는 개방 공간(징검다리)으로 인식되게 된다. 결국 섬과 바다는 그 인식에서도 ‘도서해양’이라는 일체一體의 단어로 수렴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15쪽)

이런 양면성은 역사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글쓴이는 고려시대까지는 소통성이, 조선시대에는 고립성이 각각 두드러졌다고 제시한다. 우리 역사를 큰 흐름에서 짚어볼 때,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는 해양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던 ‘해양의 시대’다. 이 시대에 바닷길(해로)은 일국을 넘어서 동아시아 차원으로 작동하는 열린 길이었고, 섬은 그 길을 통해 동아시아 문물이 교차하고 집산하는 징검다리, 문물교류의 아고라로 기능했다. 

예를 들어 백제의 경우를 보자. 삼국시대까지는 주로 연안해로를 통해서 동아시아 문물이 소통되었고 연안의 섬들이 그 길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위의 지도에서 보이는 임자도와 그 옆의 지도, 그 밑의 장산도 등에서는 매우 큰 규모의 성지와 많은 석실분이 발견되었다. 이런 풍부한 유산은 6세기경 동아시아 무역왕 백제의 존재를 새삼 떠올려보게 한다.   

흑산도

그런 다음 해금海禁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강 교수에 따르면, 조선은 500년 동안 해양활동을 금지하는 정책을 견지해왔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나라치고 이처럼 장구한 세월 동안 해금으로 일관 했던 사례는 세계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며 강 교수는 혀를 내두른다. 조선 후기에 접근해 온 서양의 배를 ‘이양선異樣船’이라 부르며 배척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조선이 사대했던 중국의 배는 어땠을까? 예외는 없었다.  조선의 해금정책은 요지부동이라 중국의 배마저 ‘황당선荒唐船’이라고 부르며 용납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섬은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공간’으로 간주되었고, 섬 주민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도서해양전략’을 앞세워 40여 년의 항 몽전을 이어온 삼별초세력이 몰락하면서, 이에 동조했던 도서해양세력 역시 몽골과 고려왕조가 취택한 이른바 ‘공도空島’의 조치로 인해 붕괴되었고, 이와 함께 왜구가 창궐하여 섬과 바다가 황폐화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고려왕조는 해양력의 총체적 퇴락과 함께 망했고, 새로운 왕조 조선은 ‘해금海禁’을 앞세워 해양활동을 금지하고, 섬에 사람을 살지 못하게 하는 ‘공도’ 조치를 더욱 강화함으로써 해양력 퇴락의 추세에 결정타를 가했다.” (21쪽)

주목할 점은 지배층과 민중의 섬 인식이 판이하게 달랐다는 사실이다.  조선시대 섬과 바다는 ‘고립성’의 속성을 강하게 띨 수밖에 없었다. 지배층은 섬을 간척하여 농경지를 확보하는 수단으로써만 활용했을 뿐, ‘바닷길의 징검다리’로 활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중들의 섬에 대한 생각은 그들과 달랐다. 폐쇄적인 양반중심사회에서 수탈과 탄압의 대상으로 삶을 위하던 찌들린 조선의 민중들에게 섬은 마음의 도피처고, 피안의 이상향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지식인 중에는 그들을 대변하려는 이도 있었으니, 허균과 같은 이가 대표적인 예다. 허균의 ‘섬 유토피아’론은 어쩌면 정반대의 현실에 대한 절박한 저항의 목소리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섬에 사람이 아예 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섬 주민들은 육지에서의 온갖 천대를 받았지만, 그것을 무릅쓰고 살아갔다.  그 와중에서도 섬 주민들은 자의식을 키워갔다. 흑산도인 김이수가 1791년 1월 18일 상경하여 정조의 어가행렬을 가로막고 擊錚을 올려 흑산도 부역의 과중함을 시정해 줄 것을 직언한 사건은 그 대표적 사례다.

“섬 주민들의 자의식 표출은 다른 방식으로도 나타났다. 섬 주민들이 호적에 올린 정식 이름 이외에 ‘자字’와 ‘호號’를 칭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것이 그 예다. 자와 호의 사용은 육지에서도 양반사회에서나 관행하던 바고, 그마저 오늘날에는 거의 사라졌음에도, 섬 주민들이 아직까지 이를 유지해왔다는 것은 나름의 ‘자의식’의 표현일 수 있다. 또한 섬 주민들이 가짜 관직임명장(교지)이라 할 ‘공명첩’을 구입하여 아직까지도 가보로 소중하게 간직해온 사례가 왕왕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23쪽) 

 

섬에만 남아 있는
상상초월 민족문화의 원형

이렇듯 섬 주민들의 ‘자의식’은, 천시 받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적극적 행동’으로 표출되기도 했고, 육지 양반사회의 관행을 따르려는 ‘소극적 모방’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주목해야할 것은, 그들의 삶의 방식 중에는, 육지에서는 사라져버린 민속의 원형태가 의도와는 상관없이 유지·전승되어온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몇 가지 현저한 사례를 들고 있는데, 장례문화와 관련해서는 진도의 ‘다시래기‘와 비금도의 ‘밤달애‘, 서남해 도서지역에서 산견되는 ‘초분‘ 등을, 놀이문화와 관련해서는 서남해 도서지역의 ‘뜀뛰기 강강술래’와 ‘산다이‘ 등이다.

다시래기와 밤달애란 숙연해야할 장례식에 음주가무의 난장이 가미되는 독특한 ‘축제식 장례’를 말한다. 초분이란 시신을 곧바로 매장하지 않고 땅 위에 자리를 만들어 안치한 후에 짚으로 덮고 이엉을 얹어 육탈할 때까지 유지시키는 임시적 무덤이다. ‘뜀뛰기 강강술래’란, 남녀가 함께 어우러져서 행하는 가무의 놀이인데, 먼저 여자들이 느리고 장중한 민요를 부르며 남성을 유인하는 ‘어루기’ 단계를 거치 고, 남자가 동참하여 함께 하는 흥겨운 ‘뜀뛰기’ 단계를 거쳐서, ‘겨루기’ 단계 에 이르러 다양한 놀이로써 구애와 짝짓기에 이르게 된다.

이런 걸 보면 섬이라는 특색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여자들끼리 곱게 시작해서 곱게 끝내는 것과 달리 매우 원시적이고 본능적이며 카니발적이다. 생에 대한 날것의 의지로 가득하다.  이런 카니발적 요소는 '산다이'에서도 드러나는데 장례식 과정에서 여자계원들이 특정 남성을 성희롱하고 의례적 윤간을 행하는 특별한 사례가 ‘추자도 산다위’라는 이름으로 보고되기도 했다.

진도의 강강술래

‘섬의 인문학’으로 풀어갈
미래의 과제들

글쓴이는 조선시대에 섬과 바다를 방기한 결과가 어떠했는지 돌아보고, 섬과 바다를 중시하고 개방적 진출을 시도했던 이전 시대의 역사적 경험도 환기하자고 말한다. 일찍이 육당 최남선이 「바다를 잊어버린 국민」이라는 제하에서 다음과 같이 논파한 적이 있다. 

“우리 국민생활의 과정에 있어서 가장 비통한 사실이 무엇이었느냐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분명히 반도국민 임해국민으로서 바다를 잊어버린 일 그것이었다. (…) 바다를 알고 지낼 시기의 광이 어떠했음은 우리가 알지 못하지마는, 바다를 잊어버린 뒤의 우리의 환난이 어떻게 큰 것은 우리가 분명히 체험하고 또 시방도 그 시련의 중에 있다 할 것이다.” (28쪽)

나아가 저자는 오늘날 분쟁의 첨병이 되어버린 섬을 공유성의 가치로 바라볼 것을 제안하면서, 파르도주의를 언급한다. 파르도주의란 바다가 ‘인류의 공동 재산’임을 주창해온 해양법학자 파르도의 사상이다. 그렇다면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섬 문제도 ‘섬의 인문학’으로 해법을 찾을 수 있을까.

박혜련 리뷰어  wideeply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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