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최부잣집 자본주의’가 보수의 살길이다
경주 최부잣집 자본주의’가 보수의 살길이다
신지호 평론가·전 국회의원 jayho63@gmail.com
▲ 경북 경주 최부자 고택. photo 경북도청 |
상류층의 도덕적 타락이 세간의 화제가 될 때마다 등장하는 단어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부와 권력은 그에 상응하는 책임감과 의무,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수반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보수세력은 21대 총선이 끝나면서 완전한 비주류로 전락했지만, 여전히 탐욕스러운 기득권 세력으로 인식되며 ‘비주류 기득권’이라는 초유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이중적 불리함을 극복하고 국민적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로마가 천년을 지탱하도록 받쳐준 힘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있었다고 강조한다. 로마의 귀족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솔선수범하여 최전선에 나가 피를 흘렸고, 공중(公衆)을 위해 금쪽같은 자기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곤 하였다. 로마 건국 이후 500년 동안 원로원에서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이 15분의 1로 급격히 줄어든 것도 계속되는 전투 속에서 귀족들이 많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국방부 장관과 육해군 참모총장을 합쳐 놓은 권위와 권한을 지닌 집정관급 사령관 10명 이상이 전사하였다.
이러한 귀족층의 솔선수범과 희생에 힘입어 로마는 고대 세계의 맹주로 자리할 수 있었다. 한편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그것을 행하는 사람 스스로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자신들의 명예와 긍지를 더욱 높여 충만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노력이었다는 것이 시오노의 주장이다. 로마 공화정의 귀족들은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이 개인의 자유와 번영의 필수조건임을 깨닫고 실천했던 것이다.
로마의 이러한 전통은 유럽과 미국에 계승되었다. 영국의 고위층과 부유층 자제가 다니는 사립명문 중·고교인 이튼스쿨 졸업생 중 2000여명이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했다. 한 학년이 1200명 정도이니 엄청난 숫자였다. 미국의 제25대 대통령(1901〜1908)이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퇴임 후인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아들 넷을 참전시켰는데, 눈이 나빠 시력검사판을 외워 군인이 되었던 막내 쿠엔틴이 프랑스에서 전사했다. 남은 세 아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하였고 그중 둘이 전사하였다. 6·25전쟁 때는 미군 장성의 아들 142명이 참전해 35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당시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의 아들은 야간폭격 임무 수행 중 전사했으며,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아들도 육군 소령으로 참전했다.
한국 상류층의 타락과 도덕적 해이에 관련하여 한국에는 로마와 같은 훌륭한 전통이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오는데, 필자는 이러한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다. 당장 경주 최부잣집 사례를 들 수 있다. 최부잣집의 여섯 가지 가훈(六訓)은 곱씹을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는 지혜의 보고(寶庫)다.
1. 과거를 보되 진사(進士) 이상은 하지 말라.
2. 만 석 이상의 재산은 모으지 말라.
3. 흉년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4.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5.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6. 며느리에게 3년간 무명옷을 입혀라.
조선시대 진사는 초시(初試) 합격자로 요즘으로 치면 사무관(5급)에 해당한다. 그 이상의 벼슬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당쟁이 심했던 그 시절, 정쟁에 휘말려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지 않겠다는 고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를 최근 상황에 빗대어 재해석하면, 정경유착을 피하고 정경분리를 실천하는 지침으로 삼을 수 있다.
최부잣집은 재산이 만 석을 넘으면 사회에 환원했는데, 소작료를 낮춰주는 방법을 썼다. 그러다 보니 소작인들은 최부잣집의 논이 늘어나기를 희망했다. 조선시대에는 흉년이 들면 심한 경우 쌀 한 말에 논 한 마지기를 넘기기도 하였다. 부자들에게는 헐값에 땅을 사들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최부잣집은 금기시하였다.
최부잣집의 한 해 소작료 수입은 쌀 3000석 정도였는데, 1000석은 집안에서 쓰고, 1000석은 과객 접대에 사용하고, 나머지 1000석은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 썼다. 과객이 많이 머무를 때는 그 수가 100명을 넘었는데, 신세를 진 이들은 다른 지역의 정보를 전해주는 메신저 노릇을 하였으며, 여론을 조성하여 최부잣집의 명성이 전라도는 물론 이북까지 퍼지도록 했다. 유명 과객으로는 신돌석, 최익현, 의친왕 이강, 손병희, 최남선, 정인보, 여운형, 김성수, 송진우, 조병옥 등이 있었다.
최부잣집이 위치한 경주 교동에서 사방 100리는 동으로는 경주 동해안, 서로는 영천, 남으로는 울산, 북으로는 포항이었는데, 아사자가 없도록 수입의 3분의 1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 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었다. 당시 창고 열쇠를 가지고 있던 안방마님들의 절약 정신을 함양하기 위해서였다. 보릿고개 때는 집안 식구들도 쌀밥을 먹지 못하게 했고, 은수저는 절대 사용하지 않도록 했다. 타인에게 후하고 자신에게 엄격했던 것이다.
최부잣집의 덕행은 자신들의 복으로 돌아왔다. 부자는 3대를 넘기기 힘들다(富不三代)고 했는데, 12대(300년)에 걸쳐 만석을 유지하였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좋은 일을 많이 한 집에 반드시 경사가 있기 마련이다. 동학 후 활빈당이 부자들을 습격할 때도 최부잣집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최부잣집의 상극(相剋)이 아닌 상생(相生)의 철학, 공동체가 유지되어야 우리 집안도 지금의 편안함을 계속 누릴 수 있다는 지혜로운 판단은 한국 보수가 소중히 여기고 계승해야 할 훌륭한 유산이다. 대기업의 중소벤처기업에 대한 납품단가 후려치기, 기술 절취, 재벌의 골목상권 진입 등 상극의 문화가 팽배해 있는 오늘, 최부잣집의 육훈은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빌 게이츠는 2008년 1월 24일 ‘창조적 자본주의(Creative capitalism)’라는 제목의 세계경제포럼 연설에서 인간에게는 이기심과 타인을 보살피고자 하는 두 가지 강한 본성이 있다고 했다. 세계적 경영대학원인 와튼스쿨의 교수 애덤 그랜트는 두 가지 동력이 뒤섞인 사람이 가장 큰 성공을 거둔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이익뿐만 아니라 타인의 이익 실현에도 높은 관심을 갖고,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주변의 축복 속에서 성공의 열매를 향유한다는 것이다. 그랜트는 이런 유형의 사람을 ‘이기적 이타주의자’라고 명명했다. 경주 최부잣집은 이기적 이타주의자였다. 한국 보수는 새로운 침로(針路)로 ‘경주 최부잣집 자본주의’를 구상해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