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민족사의 재발견

연오랑, 현재까지도 일본 황실이 모시는 한국 하나님(韓神)

화이트보스 2008. 12. 13. 09:55

포항서 건너 간 '연오랑' 일본 天皇 됐다“
연오랑, 현재까지도 일본 황실이 모시는 한국 하나님(韓神)
 
박병식 사학자

“배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시마네현에 이르러 왕이 됐다“

고려 충열 왕 11년(서기1285년)에 중 一然(일연)이 펴낸 <삼국유사>에는 대충 다음과 같은 記事(기사)가 실려 있다.

“신라 제8대 아달라 왕의 서기 157년에 지금의 포항 근처에 있는 延日(연일)을 본관으로 하는 吳(오)씨 성을 가진 사내 즉 <연오랑>이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시마네현(島根縣)에 이르러 그 고장의 왕이 되었다.”

▲사학자 박병식 선생    ©브레이크뉴스
여기서 우리는 큰 의문에 부닥치게 된다. 즉 일본에 건너간 <연오랑(일본에서는 스사노오)라 한다> 이 무슨 까닭으로 별안간에 그곳 왕이 됐을까? 그것을 설명해 주는 것이 일본 <고사기>와 <일본서기>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일본에 당도한 이후의 <연오랑>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시마네현에 당도한 <연오랑=스사노오>는 그곳 주민들로부터 매년 추수 때만 되면 <오로촌=고구려사람>들이 곡식을 약탈해 가기 때문에 심한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북쪽 추운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독한 술을 즐겨 마신다. 그러므로 <스사노오> 즉 <연오랑>은 주민들의 하소연을 듣고 주민들에게 매우 독한 술을 준비 시켰다.

얼마 지나자 <오로촌=고구려 사람>들이 또 다시 곡식을 빼앗으러 왔다. 그들은 그들이 무엇보다 좋아 하는 술을 발견하고 그것을 가만히 놔뒀을 리 만무 했다. 그들은 <연오랑>의 짐작대로 그 독주를 있는 대로 퍼 마셨다. <오로촌> 무리가 독주를 마시고 깊은 잠에 빠졌음을 확인한 <연오랑>은 그들을 손쉽게 참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연오랑>의 칼이 <오로촌>이 차고 있던 칼에 부딪치자 저들의 칼에는 아무런 상처도 나지 않았는데 <연오랑>의 칼은 무뎌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사실로 보아 그 당시의 가야(한반도의 남부)는 아직 청동기(靑 銅器)시대였는데 고구려는 추운지방에서 高熱(고열)로 鐵器(철기)를 다루는 기술에 이미 익숙해 있던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숫자로는 별로 많지 않았던 <오로촌>이지만 일본 땅에서 5-6世代 동안이나 큰 세력을 누릴 수 있었던 것 도 그런 연유에서 였다. 이때 <연오랑>이 도착한 곳은 지금도 일본말로 <이나사노 하마>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이라사> 즉 <이르러신=오신> <하마=해변>를 뜻하는데 시마네현 이즈모시의 해변에 있으며 그 근처에는 일본 황실이 모시는 큰 신사(神社)가 있으며 거기에는 바로 <연오랑> 즉 일본에서 부르는 <스사노오>가 모셔져 있다.

참고로 추운 지방에 사는 <오로촌>이 곡식을 빼앗으려 온다는 이야기는 일본 고대사인 <이와쯔후미=上記>에도 자세히 실려 있다.

<연오랑>에게는 別名(별명)도 적지 않다. 그 첫째로는 <스사노오노미꼬도>인데 이는 <제일 첫 번째 吳(오)나라 왕>이란 뜻이다. 그 다음으로는 <오오나무치>인데 이는 <吳나라 임금>이라는 뜻이며 한자(漢子)로 吳國王(오국왕)이라고 표시해야 할 것이다. 셋째 번 이름은 <야찌호꼬(八千矛)> 神(신)이다. 이는 전쟁을 많이 겪은 사람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임에 틀림 없다.

일본 황실은 매년 봄가을 두 차례 한신제(韓神祭)를 치르고 있는데, 일본어(日本語) 사전에는 이때에 모시는 신(神)은 바로 <연오랑>(일본이름으론<오-나무치>)라고 풀이 돼 있다. 이 역시 吳國王(오국왕)이라는 뜻임은 물론이다. 즉 <오->는<吳> 그리고 <나>는 <나라(那)>이며 <무치>는 <귀한사람> 즉 왕(王)을 뜻 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포항 근처에서 서기 157년에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틀림없는 <연오랑>이 현재까지도 일본 황실이 모시는 한국 하나님(韓神)이라는 사실을 우리나라 문교당국은 알아 둬야 할 것이며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도 빠짐없이 잘 숙지(熟知) 시킬 필요가 있을 것 같다. minjock1944@hanafos.com

*필자/한민족문화연구원 학술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