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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이 법원을 떠나는 사회

화이트보스 2008. 12. 18. 09:17

법관이 법원을 떠나는 사회



얼마 전 현직 판검사를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정년을 채우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 열 명 중 두 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법관이 중간에 법복을 벗는 일이 없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해마다 상당수 법관이 법원을 떠난다. 올해는 군법무관 성적 상위자의 대부분이 대형 로펌 쪽으로 진로를 희망하였고, 모 일류 대학 로스쿨 입학시험 면접에서 지원자의 장래 희망 직종이 판사라고 말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직장에 대한 만족도는 업무의 난이(), 다과(), 직책의 중요성에 상응하는 보수, 일에 대한 자긍심 등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 점에서 법관직의 매력지수는 그리 높지 않은 것 같다. 우선 야근이 별 대책 없이 법관생활 내내 지속되고 있다. 법관에게 부여된 과제를 제대로 성취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내적인 고요함과 침착함이 요구되는데, 산더미 같은 기록 때문에 시간에 쫓기고 있는 법관에겐 이를 기대하기 어렵다. 사건의 진행 속도와 통계에 신경을 쓰다 보면 법정에서의 경청이나 당사자와의 소통이 자연 소홀해질뿐더러 창의적인 법리 개발이 힘들어진다.

그런데 각종 사건 중에는 법원에까지 오지 않아도 될 사건, 의미 없는 상소, 간략한 절차로 진행해도 되는 사건이 많다. 이런 사건 모두를 3심까지 같은 비중으로 진행하려면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든다. 효율적인 사법 운용을 위하여 무익한 소송을 자제하면서 약식처리 루트를 감내하고, 법관의 판단을 존중하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사건-기록관리 파묻혀 밤샘격무

그동안 대다수 법관은 보수 등 근무 여건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법의 정의로운 집행자라는 명예심으로 직책을 수행했다. 그러나 요즈음 만연한 개인주의적 풍토와 심화돼 가는 자본주의적 구조 아래에서 법관에게 마냥 선공후사()의 선비정신만으로 법관직을 감당하도록 고집하기는 어렵다. 법관의 지위와 역할은 막중하다. 재판의 독립을 위하여도 외국의 예를 참조해 그에 걸맞은 보수체계를 마련하여야 한다.

올해도 사회적 영향이 큰 여러 사건의 재판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한 사건에서는 판사의 절차 진행을 두고 여론이나 인기에 영합하려는 사법 포퓰리즘의 반영이라고 하고, 다른 사건의 결론에 대하여는 사회적 강자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대변한다는 비난이 있었다.

물론 법관의 잣대는 누구에 의하여 검증되어도 합리적이어야 한다. 법관은 자신의 관점이나 시각이 과연 객관적이고 논리적인지 항상 과학적, 실증적으로 검토하여야 하고,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한 비판적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간혹 재판에 고려되어야 한다면서 내세워지는 국민감정이나 정서, 여론 등은 대체로 그 실체가 확인되기 어렵고 모호하다. 어떤 때는 연출, 유도되거나 감성적일 수 있고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기도 한다. 판사는 이에 흔들리지 말고 긴 안목에서 시대변화의 의미와 흐름을 직시하여야 한다.

최근 법조비리 등 사법부에 대한 비난 보도로 판사의 사기가 많이 저하되었다. 국민의 사법부에 대한 인상은 대체로 대중매체에 의하여 형성되는데, 언론매체들은 전체적인 사법부의 모습을 눈에 띄는 소수의 예외적 존재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간혹 법관의 부정적 이미지가 과장되어 대다수 성실한 법관을 참담한 심정에 빠지게 한다.

물론 법관도 인간인 만큼 실수가 없을 수 없고, 국민의 사법 불신에 대하여 일정한 책임이 있다. 그러나 이를 침소봉대하거나 그 화살을 전체 조직의 문제로 돌려 마치 모두가 그 비난에 연루된 듯 비약, 매도하는 것은 곤란하다. 언젠가 사법부의 신뢰도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재판을 실제 경험한 사람의 신뢰도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높았는데, 이는 재판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 언론에 의하여 형성된 사법부에 대한 이미지가 훨씬 부정적임을 나타낸다. 언론 보도 등의 신중함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아울러 법관도 사법 불신의 원인이 무엇인지 이를 철저히 추적하여 그 제거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

사법비리 과장도 사기저하 한몫

어차피 로스쿨 개원으로 미국의 전통과 문화를 바탕으로 발전하여 온 법률가 양성제도를 채택한 이상 좋은 법률가가 법관직을 지망하고, 법관이 긍지를 가지고 정년을 마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시급히 마련되어야 한다. 어떻게 하여야 법정신을 지키려는 의지와 신념이 확고한, 겸손한 법관을 확보할 수 있을지 모두가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시점이다.

이주흥 법무법인 화우 대표변호사·전 서울중앙지법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