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라이 라마 14세가 웃음을 잃어가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불교(라마교)의 수장(首長)이자 최고 통치자인 법왕(法王)의 호칭이다. 티베트인들은 달라이 라마를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믿어왔다.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보살을 말한다. 역대 달라이 라마들은 관세음보살처럼 항상 얼굴에 자비로운 미소를 보여왔다. 1940년 즉위한 달라이 라마 14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있는 것은 바로 티베트의 암울한 미래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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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티베트 망명자들이 인도 다람살라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촛불 시위를 벌이고 있다./2 티베트 망명자 대표들이 인도 다람살라에서 특별회의를 열기에 앞서 국가를 부르고 있다. photo AP
- 중도노선 유지냐 유혈 독립투쟁이냐
티베트 망명정부 사상 첫 특별회의 소집
티베트에 대한 지배 체제를 강화하고 있는 중국은 그동안 달라이 라마 14세가 추진해온 ‘중도노선’을 거부해왔다. ‘중도노선’이란 고도의 자치제를 말한다. 외교와 국방은 중국 정부가 행사하고 그외 다른 모든 권한은 티베트 자치정부가 행사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과거 청나라 때의 티베트 통치 방식과 유사하다. 청나라는 1750년 티베트를 속국으로 삼고 대신(大臣)을 파견해 외교와 국방을 관장토록 했지만 달라이 라마의 다른 권한을 인정했었다. 중국은 1979년 달라이 라마 14세가 중도노선을 선언한 이후 8차례에 걸쳐 티베트 망명정부 측과 협상을 벌였지만 어떤 양보도 하지 않았다. 특히 지난 3월 티베트인 200명이 사망한(티베트 망명정부 주장) 소요 사태 이후 진행된 세 차례 협상에서 중국은 더욱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결국 달라이 라마 14세는 중국과의 협상 중단을 선언하고 티베트의 향후 투쟁 방향을 결정하기 위한 특별회의를 소집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소집된 이 특별회의(11월 17~22일, 인도 다람살라)에서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20만여명의 티베트 망명자를 대표하는 대의원 500여명은 달라이 라마 14세의 중도노선을 계속 고수한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대의원들이 당초 ‘독립노선’을 택할 것이란 예상을 깨고 중도노선을 선택한 것은 현실적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독립 요구는 중국과의 유혈 투쟁을 의미한다. 비폭력 평화노선을 포기하면 망명정부가 있는 인도나 티베트의 인권 신장을 주장해온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지지를 얻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고려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 회의에서 또 다른 중요한 두 가지 결정도 나왔다. 가까운 미래에 중국이 태도를 바꾸지 않을 경우 강경 독립노선으로 선회한다는 것과 당분간 중국과의 모든 대화를 중지한다는 것이다. 카르마 초팔 티베트 망명정부 대변인은 “중도노선의 성과가 없다면 우리는 부득이 중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는 노선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특별회의에서 이런 결정이 나온 것은 중국에 대한 티베트인들의 분노와 좌절감이 극단을 향해 치닫고 있음을 말해준다.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인도 다람살라의 회의장 주변에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독립을 요구하는 깃발들이 무수히 나부낀 것도 이런 맥락이다. 티베트인의 밑바닥 정서는 이미 독립노선 쪽으로 기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도노선을 택한 것은 달라이 라마 14세에 대한 존경심과 믿음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지금까지 비폭력 평화노선만이 티베트가 중국보다 낫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주장해왔다. 그의 이런 신념은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중국 정부는 지난 1959년 3월 티베트에서 무장 독립 운동이 전개되자 인민해방군을 투입, 티베트인 12만여명을 무차별 학살하고 사원 6000여개를 파괴한 바 있다. 당시 중국 군대의 만행을 목격한 달라이 라마 14세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인도로 망명해 현재의 망명정부를 세웠다.
달라이 라마 “무력투쟁하면 불교도 정체성 상실”
젊은 세대는 반발, 대규모 폭력사태 재발 가능성
달라이 라마 14세는 티베트인들이 무력투쟁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불교도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나라를 잃는 것보다 더 나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이런 달라이 라마 14세의 신념도 이제는 흔들리고 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독립노선은 실용적이지 않으며 대의원들 대다수가 중도노선을 지지했다”면서도 “하지만 중국에 대한 나의 신뢰는 점차 약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이런 발언을 한 것은 이번 결정이 고육지책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중도노선이 해결책이 될 수 없고 그렇다고 독립 노선을 택할 경우 엄청난 유혈사태가 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를 지지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로비 바넷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티베트인들이 대화의 상대로서 중국을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티베트인들의 중도 노선에 대한 신념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이는 향후 중국 정부에 큰 정치적 도전이 될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티베트의 젊은 세대들은 이번 중도노선 유지 결정에 상당히 반발하고 있다. 한 여성 대표는 “비폭력 노선은 우리의 문화에 뿌리를 둔 것이지만 많은 젊은 티베트인은 회담에 진전이 없어 강한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고 밝혔다. 티베트 문제 전문가이자 중국 재야의 유명 작가인 왕리슝(王力雄)은 “중국 공산당 치하에서 티베트 문제는 해결될 수 없으며 대규모 유혈 충돌이 다시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최소 달라이 라마 14세 사망 전까지 진전이 없다면 대규모 폭력사태는 불가피하다”고 내다봤다. 실제로 중국과의 대화 중단 결정은 망명정부 내 강경 그룹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무장 투쟁을 주장하는 강경그룹은 1969년까지 독립투쟁을 전개해왔고 1987년 10월 대대적인 민중 봉기도 주도한 적이 있다. 지난 3월 티베트 자치구 라싸(拉薩)와 쓰촨(四川)·칭하이(靑海)성 등 티베트족 집단 거주지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터져 나온 독립 요구 시위도 강경 그룹이 부추긴 것으로 중국 정부는 보고있다.- 강경그룹의 핵은 티베트 청년회의
세계 70개 지부에서 3만여명 활동
강경그룹 중에서 대표적 단체는‘티베트 청년회의(Tibet Youth Cngress·西藏靑年大會)’이다. ‘짱칭회(藏靑會)’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이 단체는 1970년 10월 인도에서 창설됐는데 현재 전세계 70개 지부가 활동 중이다. 회원이 3만여명인 이 단체의 회장 츠왕 릭진(Tsewang Rigzin·次旺仁增)은 “티베트의 젊은 세대들은 독립이 이루어져야만 종교와 문화가 보호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서 달라이 라마 14세의 중도노선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또 “중국 지도자들이 티베트인들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계속하는 한 짱칭회가 비폭력 노선을 계속 견지할 수 있을지는 보장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중국 언론들은 이 단체를 매우 부정적으로 보도해 왔다.
중국 언론들에 따르면 짱칭회는 알 카에다, 체첸 무장 테러단체, 동(東)투르키스탄 분리주의 단체와 같은 테러집단이며 자살 폭탄테러를 감행할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또 이 단체는 게릴라전을 위해 군사 훈련반을 운영하고 있으며 무기를 티베트로 반입하기 위한 루트를 개설하려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현재로선 중국 언론들의 보도 내용을 확인할 수 없지만 츠왕 회장의 말대로 티베트인의 인내가 한계에 도달할 경우 무력 투쟁을 전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내년 3월 10일은 달라이 라마 14세가 인도로 망명한 지 50주년을 맞는 날이다. 티베트 강경그룹은 벌써부터 이때를 계기로 대대적인 독립 요구 시위를 벌일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 만약 중국 정부가 이를 또 다시 유혈 진압할 경우 인권 존중을 강조하고 있는 오바마 미국 행정부와 중국이 대립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어떤 형태로든 티베트의 독립을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강경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두칭린(杜靑林) 중국 공산당 통일전선부 부장은 “조국의 통일과 영토의 완전한 보전은 언제 어느 상황에서도 동요할 수 없는 원칙”이라며 “티베트의 독립이건 반(半)독립이건 변형된 독립(달라이 라마가 주장한 고도 자치를 의미)이건 어느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의 이런 입장은 이미 베이징올림픽의 성공 개최라는 목적을 달성한 데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이 곤경에 빠져 티베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은 또 티베트에 독립이나 자치를 허용할 경우 바로 이웃한 신장 위구르 지역에서도 분리 독립 운동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중국은 또 티베트가 전략적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풍부한 지하자원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독립이나 자치를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중국 정부는 앞으로 티베트 지역에 한족(漢族) 100만명을 이주시킬 계획을 추진하는 등 티베트에 대한 동화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티베트의 전체 인구 270만명 중 92%는 티베트 사람인 장족(藏族)이다. 한족이 대규모로 이주할 경우 티베트 사회 전체가 크게 변화할 수 있다. 중국 정부는 이와 함께 티베트의 언어와 문화 말살 정책도 병행해서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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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네팔 경찰이 독립 요구시위를 벌이는 티베트 청년을 끌고 가고 있다. / 2 중국 무장 경찰들이 티베트 자치구 수도 라싸에서 주민들을 검색하고 있다./ 3 달라이 라마 14세가 법회에서 강연하고 있다. photo 로이터
- 중국, 달라이 라마 사망 기다리며 장기전 태세
차기 달라이 라마 지명에도 영향력 행사 나서
중국 정부는 올 73세인 달라이 라마 14세가 사망할 경우 티베트의 구심점이 사라질 것으로 보고 장기전을 펴고 있다. 달라이 라마 14세도 중국의 이런 의도를 간파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중국이 달라이 라마 15세를 임명하는 것을 어떻게든 막고 싶다”면서 자신이 죽기 전에 후계자를 임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후계자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달라이 라마를 선출하는 방식이 특이하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는 죽기 전에 차차기(次次期) 달라이 라마가 어느 곳에 태어날지를 유언으로 남긴다. 달라이 라마 사후 예언된 지역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복잡한 시험과 계시를 통해 진정한 환생자를 가려낸다. 달라이 라마 14세를 이을 후계자는 달라이 라마 13세의 유언에 따라 이미 정해져 있다. 이 후계자를 판첸라마라고 한다. 현재 판첸라마는 두 명이다. 한 명은 달라이 라마의 예언으로 선발됐지만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다른 한 명은 티베트 불교 어용 조직이 선출한 판첸라마다. 중국 정부는 지난해 7월 티베트 불교가 달라이 라마의 차기 후계자인 판첸라마를 지명하려면 승인을 얻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어 놓았다. 달라이 라마 14세가 중국의 속셈을 저지하려면 500여년을 이어져 내려온 전통을 어겨야 한다. 달라마 라마 14세의 고뇌가 갈수록 깊어질 수밖에 없다. 달라이 라마 14세를 추종하는 티베트인들의 번뇌도 깊어지고 있다.
/ 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truth21c@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