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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산군 중심부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형제봉이 있다. 바로 그로스 피셔호른(Gross Fiescherhorn·4,049m)과 힌터 피셔호른(Hinter Fiescherhorn·4,025m)이다. 그린델발트 계곡에서는 형인 그로스 피셔호른만 보이는데, 표고차 1,300m의 북벽은 알프스에서 가장 어려운 빙벽들 중 하나로, 그 위협적인 모습은 아이거 북벽과도 견줄만하다.
알피니스트들이 일반적으로 접근하는 융프라우요호쪽에서 이 형제봉을 봤을 때는 북벽에 비해 덜 웅장하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두드러진 암릉 등반선 때문이다. 물론 이 봉우리들을 오르는 가장 일반적인 루트(PD/II급)는 뮌히요호 산장에서 에비히슈네펠트(Ewigschneefeld) 빙하를 경유해 두 봉 사이 안부인 피셔자텔(Fieschersattel·3,923m)을 경유한다.
그러나 지난 여름 필자 일행은 동남쪽으로 흐르는 피셔 빙하 상의 핀스터라르호른 산장(Finsteraarhorn Hut·3,048m)에서 출발해 긴 빙하를 타고 올라 두 봉우리를 오르고서 4km 길이의 암릉인 북서릉(AD/III급)으로 하산했다.
- ▲ 네번째로 오른 4,000m봉 그로스 피셔호른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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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스터라르호른 산장에서 피셔 빙하로
새벽 4시, 알람시계의 울림에 일어난다. 임덕용 선배와 후배 나현숙과 함께였다. 서둘러 침상을 정리해두고 간밤에 챙겨둔 짐을 들고 나온다. 핀스터라르호른 산장의 작은 윈터룸에 함께 묵은 독일 산악인 둘을 위해 우리는 아침도 먹지 않은 채 조용히 산장을 떠난다.
헤드랜턴을 밝히며 산장에서 100여m 떨어진 곳까지 내려온다. 설피를 놓아둔 설사면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우리는 간단히 아침을 챙겨먹는다. 스프에 빵이다. 그러면서 수통에 물도 채우고 안전벨트도 착용하고 배낭을 다시 꾸리면서 긴긴 하루의 산행을 준비한다.
곧 설피를 들고 100여m 높이의 쿨와르를 내려서서 평탄한 피셔 빙하에 닿는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빙하를 거슬러 오른다. 설피를 단단히 조여맨 우리는 한 발 두 발 완만한 경사의 빙하 위를 걷는다. 어느새 날이 밝아와 헤드랜턴이 필요 없을 정도다. 이른 시각이라 빙하 표면이 얼어있어 플라스틱 설피의 버적거리는 소리만 들려온다. 드넓은 빙하 좌우로 그로스 그룬호른(Gross Grunhorn·4,044m)과 핀스터라르호른(4,274m)이 솟아있다.
이제 그로스 그룬호른 정상부에 아침햇살이 비치기 시작한다. 빙하를 타고 내려오는 바람이 차지만 매섭지는 않다. 아직 빙하 바닥이라 고도가 높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를 걸었을까. 2시간쯤 되자 크레바스 지대가 나타난다. 오늘 우리가 오를 피셔호른에서 시작한 빙하가 동쪽으로 흐르다가 남쪽으로 방향을 틀며 고도를 낮춰 형성된 세락지대다. 우리는 이곳을 오른쪽으로 우회한다. 머리 위 사면에서는 거대한 눈사태가 발생해 있다. 그 위를 타고 넘는다.
- ▲ 모진 바람에 맞서 힌터 피셔호른 정상으로 접근하고 있다. 뒤로 핀스터라르호른이 솟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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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따르던 임 선배는 이 세락지대를 왼편으로 오르자고 제안하지만 필자는 오른편이라 주장한다. 바로 9년 전 이 빙하를 내려와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가파른 빙설사면을 설피를 신은 채 오른다. 균형을 잡으며 몸을 밀어올리기 위해 스키스틱에 힘을 잔뜩 주다보니 팔이 저려올 정도다.
몇몇 크레바스들을 건너고 우회하며 계속해서 오른다. 고도를 높이자 꽤나 찬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동쪽 능선에 가린 빙하에는 여전히 응달이 져 있다. 차츰 방향을 피셔호른쪽으로 틀어 저 멀리 눈 언덕에 드리운 양달에 빨리 접근하고픈 생각뿐이다.
드디어 크레바스 지대를 벗어나 한동안 완사면의 응달진 빙하를 거슬러 오른다. 이윽고 빙하 표면에 햇살이 닿는 곳이다. 2시간 반 이상 쉬지 않은 터라 우리는 배낭을 내려놓고 쉬며 따뜻한 차를 끓여 마신다. 우리가 오른 빙하 너머로 핀스터라르호른이 거대한 성곽처럼 아침햇살을 등지고 있다. 알프스 4,000m급 82개봉 중에서 우리가 두 번째로 오른 봉우리다.
이제 또 출발이다. 햇살을 받아 한결 따뜻하다. 이제 발길은 피셔호른을 따라 서쪽으로 빙하를 굽어 돌며 오른다. 드넓은 설사면을 지그재그로 길을 내며 걷고 또 걷는다. 큰 눈언덕을 오르자 마침내 그로스 피셔호른과 힌터 피셔호른이 보인다. 동쪽에서 접근하는 우리에게는 힌터 피셔호른이 좌측에 위치해 있다. 말 그대로 큰 피셔호른 뒤에 숨어 있는 형상이다.
- ▲ 우리가 이미 오른 핀스터라르호른을 등지고 긴긴 피셔 빙하를 거슬러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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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일이 수평으로 휘날릴 정도의 강풍 속으로
우리는 우선 왼편에 있는 작은 피셔호른으로 접근한다. 이윽고 정상 아래 설사면이다. 고도가 4,000m나 된 탓에 태양이 솟아있건만 춥다. 바람이 매섭다. 배낭을 벗어두고 설피 대신 아이젠을 착용한다. 남북으로 이어진 정상 능선을 오르기 위해 남쪽 능선을 택한다. 북쪽에서 오르는 능선은 출발부터 위험해 보인다. 습설의 가파른 설사면 위에 커니스가 심하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선 남쪽에서 접근하기 위해 가파른 설사면을 10시 방향으로 오른다.
눈이 깊어 한 발 한 발 조심해서 내딛는다. 이윽고 정상부 능선에 올라선다. 우리가 새벽부터 올라온 피셔 빙하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능선을 따라 조금 오르니 마침내 반대편 산들이 훤히 보인다. 융프라우와 뮌히, 아이거가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바람이 세차다. 안자일렌을 한 자일이 바람에 수평으로 휘날릴 정도다. 강풍에 맞서 기우뚱거리는 몸을 가누며 약 100m 북쪽으로 이동한다.
비좁은 바위능선을 조심해서 횡단한다. 긴 능선 중간쯤이다. 가장 높아 보이는 바위 정점이 두 군데다. 약 10여m 떨어진 두 곳 중 어디가 정상일까 싶어 좀 더 북쪽으로 가본다. 막상 그곳에 가보니 아닌 것 같아 돌아온다. 바로 그때 남쪽 정점의 바위 위에 조그마한 차돌맹이가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가 등정기념으로 두고 간 거였다. 가만히 보니 M자의 산 모양에 피켈을 들고 있는 사람의 형상이 그려져 있다. 이곳이 힌터 피셔호른의 정상임을 증명하는 표시였다.
우리 셋은 세 번째로 오른 4,000m봉 등정을 축하하며 잠시 머물고서 곧장 하산길에 접어든다. 여전히 맹렬하게 불어대는 바람 때문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얼마 후 배낭과 설피 등을 둔 지점으로 돌아온 우리는 곧장 피셔자텔로 이동한다. 그로스 피셔호른을 오르기 위해서다.
한동안 설사면을 비스듬히 내려가 완사면을 오르니 피셔호른 안부다. 오목한 눈밭에 닿으니 한결 따뜻하다. 이곳서 점심을 먹으며 쉰다. 물론 본격적인 등반을 위해 장비도 새롭게 착용한다. 조금 전의 힌터 피셔호른 등정 때와는 달리 모든 짐을 지고 올라야 하기에 배낭에 설피까지 매단다.
다소 묵직한 배낭을 짊어지고 그로스 피셔호른을 오르기 시작한다. 한동안 남릉의 우측 설사면을 가로지른다. 형이라 그런지 힌터 피셔호른보다 높고 어렵다. 한낮의 열기에 녹은 눈표면 아래에는 강빙이 형성되어 있다.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조심해서 혼합지대를 올라 바위능선에 선다.
이제부터 암릉 좌우를 오가며 정상으로 향한다. 몇몇 바위구간에는 아이젠 자국들이 보여 길 잃을 염려는 없다. 하지만 설사면에서는 이른 시즌이라 누군가 지나간 발자국은 없다. 조심조심하며 오르고 또 오른다. 홀드들이 커 등반은 어렵지 않다.
- ▲ 북서릉을 따라 조심스럽게 하산하는 일행. 우측 아래는 그린델발트 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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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터 피셔호른~피셔자텔~그로스 피셔호른 한번에 꿰
안부를 출발한 지 약 1시간 걸려 정상에 선다. 편편한 바위에 주저앉아 등정의 기쁨을 만끽한다. 우리의 네 번째 4,000m봉 등정이었다. 첫 번째로 오른, 서쪽에 있는 뮌히로부터 남동쪽의 핀스터라라호른, 그리고 바로 몇 시간 전에 오른 힌터 피셔호른까지 훤히 건너다보인다. 그러한 기쁨을 느긋하게 즐기기에는 시간이 없어 우리는 곧장 하산을 시작한다.
북서릉으로 길을 잡는다. 9년 전 이 북서릉을 따라 오른 적이 있기에 이 길을 택했지만 처음 대하는 것처럼 낯설다. 조심조심 발걸음을 뗀다. 칼날 설릉과 암릉이 연이어진다. 어려운 구간에서는 임 선배가 먼저 내려간다. 뒤이어 후배가, 그리고 필자가 조심스럽게 뒤따른다. 우리가 지닌 자일이 30m 짜리뿐이라 어떤 구간에서는 애를 먹지만 한 발 한 발 북서쪽으로 고도를 낮춘다.
먼저 내리는 이들 아래로 거대한 그린델발트 빙하가 펼쳐져 있다. 수많은 크레바스들이 입을 벌리고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해 마음을 졸인다. 그리고 저 멀리 아이거가 솟아 있다. 북벽의 명성에 걸맞게 남벽도 위압적인 형상이다.
채 4,000m가 되지 않는 아이거이지만 검은 형상의 단일 바위벽이 주변을 압도하고 있다. 그 좌측으로 뮌히와 융프라우가 솟아 있다. 하지만 그린델발트 계곡이나 크라이네 샤이데그쪽에서 보는 압도적인 파노라마 풍광보다는 못하다.
- ▲ 피셔 빙하 상부의 크레바스 지대를 지나자 아침 해가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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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시간쯤 클라이밍다운을 하고 마침내 경사가 완만한 설릉에 닿는다. 이미 시간은 오후 4시가 다 되어간다. 하지만 해가 지려면 네댓 시간은 더 있어야 하기에 우리는 눈밭에 퍼질러 앉아 쉬기로 한다. 바람 부는 설릉에 모여앉아 눈을 녹인다. 수통의 물이 다 떨어져 모두 목이 말라 있었다. 셋 모두 손바닥을 펴 모아 바람을 막으며 가스버너 주위에 앉는다.
지루한 기다림 후 미지근한 물을 마신다. 그리고 내친김에 라면까지 끓여먹기로 한다. 이번 산행을 위해 임 선배가 특별히 준비한 것인데, 이렇게 힘들 때 그 진가가 발휘되는 식품이다. 많은 시간을 공들인 만큼 라면 맛은 일품이었다. 이 힘을 바탕으로 우리는 또다시 배낭을 짊어진다.
이제 길은 완만한 설릉을 따르기에 셋이 함께 움직인다. 안자일렌을 하고 간다. 앞장선 임 선배가 크레바스에 한쪽 발이 빠져 바짝 긴장하기도 한다. 능선 위였지만 작은 크레바스가 있었던 것이다.
설릉은 끝없이 이어졌다. 이젠 아이젠이 필요 없을 거란 생각에 설피로 갈아 신는다. 한데 얼마 가지 않아 거대한 급사면이 나타난다. 할 수 없이 설피를 벗고 킥스텝으로 내려간다.
높이 100m 이상의 설사면은 한낮의 태양열에 잔뜩 녹아 발걸음을 떼자 조그마한 눈덩이에도 흘러내리면서 차츰 커다란 힘을 합치더니 저 아래쪽에서는 제법 큰 눈사태를 이룬다. 바짝 긴장하며 킥스텝을 하는데, 이미 눈사태로 흘러내린 사면을 타고 내리는 게 안전해 그쪽으로 내려간다. 사태가 난 사면에서는 더는 눈사태가 없을 거란 생각에서다.
제는 단단해진 사면 위를 스텝을 확실하게 만들며 내려간다. 이윽고 하단부에서는 엉덩이를 이용한 글리세이딩을 하기 적당한 거리와 경사도라 털썩 주저앉는다. 바짝 긴장하며 미끄러운 설사면에 몸을 맡긴 채 흘러내린다. 어느새 작은 눈언덕 하나를 지났는데, 베르그슈른트였다.
잠시 후, 온몸에 잔뜩 묻은 눈을 털고 뒤돌아보니 아래에는 제법 큰 크레바스가 있었다. 아무것도 몰랐기에 눈썰매를 탄 것이지 알고서는 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 ▲ (좌)에비히슈네펠트 빙하에서 본 그로스 피셔호른(좌측)과 힌터 피셔호른. 뒤쪽에서 올라 좌측 능선으로 횡단했다. (우)정상부 혼합지대를 조심해서 지나고 있는 임덕용 선배 뒤로 힌터 피셔호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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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셋 모두 안전하게 급사면 아래에 당도한다. 이젠 정말 우리 앞에 놓인 위험은 없을 거라 여기며 눈밭을 가로지른다. 이제 시간은 제법 흘렀다. 어느새 구름이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다. 빠르게 다가와 흩어져 지나가는 구름들로 보아 곧 뭔가 한바탕 쏟아질 기세다. 발걸음을 서둘지만 힘겹다. 큰 눈언덕을 하나 오른다. 드디어 저 멀리 빙하 건너편에 뮌히요호 산장이 자그마하게 보인다. 하지만 갈 길이 멀기만 하다. 북서릉 끝자락은 거의 다 내려왔지만 설사면을 비스듬히 타고 내려 빙하에 닿아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완사면의 빙하를 거슬러 올라야 했다.
급기야 비마저 내린다. 이윽고 우박이다. 급히 복장을 챙겨 입는다. 콩알 만한 우박이 쉴 새 없이 쏟아진다. 그래도 묵묵히 걸을 따름이다. 셋 모두 말이 없다. 이윽고 빙하에 닿았다. 이젠 좀 편하게 걷나 싶지만 편편한 빙하 바닥의 눈은 한층 더 젖어 있다. 설피를 신고 걷는 발걸음이 무겁게만 느껴진다. 그래도 설피가 한결 수월하다. 아마 설피가 없다면 몇 걸음이라도 제대로 뗄 수 없을 것이다. 모두 말없이 고개만 내밀고 걷고 또 걷는다. 다행히 저녁 9시가 다 되어도 날이 훤하다.
이윽고 산장에 다가가자 우박이 멈춘다. 산장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가파른 설사면을 오르자 산장지기 여주인이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든다.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새벽 4시부터 움직인 긴긴 하루였다. 우리 셋 모두에겐 잊을 수 없는 하루였다. 뮌히 산장의 포근한 침상에서 하룻밤 묵은 우리는 다음날 융프라우요호를 거쳐 그린델발트로 하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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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정보
베르너 산군의 형제봉 그로스 피셔호른과 힌터 피셔호른은 1862년 7월에 H. B. 조르주와 가이드 C. 알머 일행에 의해 남서릉을 통해 초등되었다. 이 봉우리들을 오르는 일반적인 루트는 뮌히요호 산장에서 출발할 때는 에비히슈네펠트 빙하를 경유해 두 봉우리 사이의 안부인 피셔자텔을 경유하는 코스(PD/II급)다. 하지만 핀스터라르호른 산장에서 출발해 등정 후 우리가 택한 하산길인 4km 길이의 북서릉(AD/III급)을 경유하는 경우도 많다. 한편 산악스키를 이용한 산행도 권할 만하다. 두 봉우리 정상부 가까이까지 산악스키로 접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핀스터라르호른 산장은 봄여름 성수기에 산장지기가 상주하며, 그 외에는 작은 윈터룸만 개방해둔다. 성수기에는 예약 후 이용하는 게 바람직하다. 전화번호 41 (0)33 855 29 55. 스위스산악회 소유인 이 산장의 1박 요금은 28스위스프랑이며, UIAA 가맹단체 산악회원인 경우 1/3 할인을 받을 수 있다.
뮌히요호 산장은 사설산장이기에 할인혜택이 없다. 산장지기가 4~5월과 6월 말~9월 중순까지 상주한다. 융프라우요호에서 접근이 쉽고 인기가 있어 성수기에는 예약 후 찾아가는 게 바람직하다. 1.5리터 물 1병이 12프랑, 하룻밤 숙박비는 28프랑이며 기타 식비 등은 비싼 편이다. 전화번호 41 (0)33 971 34 72, email : info@moenchsjoch.ch
/ 글·사진 허긍열 한국산악회 대구지부 회원·www.goalp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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