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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들이 멋진 고속함으로 다시 태어나 감사…" 주간조선 기사

화이트보스 2009. 1. 13. 14:28
[weekly chosun] "아들이 멋진 고속함으로 다시 태어나 감사…"
[최초인터뷰] 2002년 제2연평해전 영웅 故 윤영하 소령 부친 윤두호씨
"사람들 왔다 가면 아직도 며칠씩 마음 아파"
인터뷰 요청에 “할 말 없다” 집에 찾아가도 “만나고 싶지 않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아들 이름 딴 ‘윤영하함’ 취역식에 못 가
<이 기사는 weekly chosun 2038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조성관 편집위원 maple@chosun.com

2008년은 제2연평해전 영웅들의 유가족에게 가장 뜻깊은 한 해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직후 대선 공약대로 제2연평해전 기념식을 국가행사로 격상시켰다. 이에 따라 정부는 2008년 6월 29일 평택 2함대 사령부에서 국무총리와 정당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2연평해전 6주기 기념식’을 거행했다. 해군교육사령부와 해군사관학교에도 윤영하 ·한상국·조천형·황도현·서후원·박동혁 6인의 영웅 흉상이 세워졌다. 노무현 정부 시절 ‘제2연평해전’의 의미가 축소돼 2함대사령관이 기념식을 주관해왔던 것을 감안하면 상전벽해 같은 변화였다.

2008년이 며칠 남지 않은 12월 17일 해군 진해기지에서 윤영하함(艦) 취역식이 열렸다. 해군이 개발한 유도탄고속함(PKG) 1번함에, 2002년 6월 제2연평해전 당시 참수리 357호 정장(艇長)이었던 윤영하 소령의 이름을 붙였다.

신문에서 이 기사를 접한 기자는 가장 먼저 윤소령의 부친 윤두호씨를 떠올렸다. 예비역 해군대위(해사 18기)인 윤씨는 아들 이름을 딴 함정이 취역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감격했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윤두호씨와 부인 황덕희씨는 이날 취역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윤씨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해 현재 집안에서 재활 치료를 하기 때문이었다.

기자는 지난 12월 19일 윤씨와 전화통화를 했다. “찾아뵙고 윤영하함 취역 소감을 듣고 싶다”고 하자 윤씨는 “오지 마세요.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기자가 다시 “잠깐이라도 좋습니다”라고 말하자 윤씨는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국민들을 사랑합니다”라고 답했다. 그리곤 “전화 끊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기자가 윤두호씨를 처음 만난 건 2003년 6월 6일 대전 국립현충원에서였다. 장교묘역 12지구에서 만났을 때도 윤두호씨는 인터뷰를 거절했다. 윤씨는 “어떻게 쓸지 방향을 잡았을 것 아닙니까. 그럼 그렇게 마음대로 쓰세요”라고 말하곤 고개를 돌렸다. 세상에 대한 분노가 가득한 말투였다. 윤씨는 사진 찍히는 것도 한사코 거부했다. 그래서 ‘서해교전 1주년, 유가족들은 말한다’ 기사(주간조선 2003년 6월 19일자)에서 윤씨 사진이 실리지 못했다.

세상이 바뀌었지만 윤두호씨의 태도는 5년 전과 똑같았다. 고 황도현 중사의 어머니 박공순씨는 “윤 선생님이 몸이 불편하셔서 우리들이 12월 27일에 집 근처로 가서 송년회를 가질 예정”이라면서 “그때 오시면 윤 선생님을 뵐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며칠 뒤 박공순씨로부터 2008년 유가족 송년회는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방법이 없었다. 기자는 12월 27일 토요일 오후 윤씨를 찾아가기로 했다. 전철 4호선 오이도역에서 내린 뒤 윤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문 안 열어주셔도 할 수 없습니다. 가겠습니다. 세상도 바뀌었는데 한 말씀 해주셔야죠.”

그러자 윤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세상이 바뀌지 않았어요. 그대로요. 아직 멀었습니다.”

윤씨 자택은 시흥시 월곶동의 한 아파트. 다리만 건너면 소래포구다. 오후 4시쯤 아파트 초인종을 눌렀다. 만일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월요일에 한번 더 찾아오자는 심산이었다. 20여초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조금 뒤 ‘징-’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부인 황덕희씨가 현관에 나와 “왜 오시지 말라는데 오셨어요. … 멀리까지 오셨는데 잠깐 들어오세요”라고 말했다.


윤씨는 거실에 선 채로 기자를 맞았다. 윤씨의 머리칼은 멋진 은발(銀髮)이었다. 부부는 이 아파트에서 둘째 아들(영민씨)과 살고 있다. 윤씨는 허리에 명치 끝까지 올라오는 두꺼운 복대를 두르고 있었다. 한눈에도 걸음걸이가 힘들어 보였다. 부인 황덕희씨가 설명했다.

“2008년 3월 교통사고를 당한 후 장파열, 갈비뼈 골절 등으로 수술을 세 번이나 받았습니다. 척추 수술도 했죠. 현재는 약도 다 끊고 많이 좋아진 상태예요. 집안에서만 왔다갔다 하고 있습니다. 허리 근육이 좋아지면 외출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윤씨가 말을 거들었다.

“내가 마음대로 움직여야 (기자로부터) 도망도 가는데, 내가 이러니 꼼짝 못하고 당합니다(웃음). 차나 한잔 하고 가세요. 하지만 사진은 안 됩니다.”

5년 만의 재회였다. 거실에서는 윤 소령의 사진을 찾을 수가 없었다. 대개 거실에는 가족 사진을 하나쯤은 걸어두는 게 보통인데. 서 있던 윤씨가 의자에 조심스레 앉았다. 그리곤 입을 뗐다.

“그날(2002년 6월 29일) 이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겠다고 했는데 전부 거절했습니다. 근데 이회창 총재가 찾아오겠다고 직접 전화를 걸어오는 데는 거절할 수가 없었죠. 대신 ‘카메라는 안 된다’고 조건을 달았죠. 실제로 비서하고만 오셨어요. 그 뒤에 고등학교 친구의 동생인 손학규 경기지사도 다녀갔고요. 그게 전부였습니다.”

2002년 이회창 총재가 찾아와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기억합니다. ‘아까운 사람들을 잃었다. 영웅으로 만들어 주겠다. 교과서에 이름이 올라가도록 해주겠다’는 취지의 약속을 했습니다.”

손학규 지사는 무슨 말씀을 하셨나요.

“기억이 안 나네요. 손학규씨는 고등학교 동기생의 친동생이라 마다할 수 없었지요.”

당시 정부 여당 사람은 찾아오겠다는 사람이 없었나요.

“있었지요. 이름을 밝히긴 그렇고. 하지만 제가 다 거절했죠.”

열흘 전 윤영하함 취역할 때 진해에 가지 못해서 속상하셨죠.

“섭섭했죠. 내가 당연히 가야 하는데. 그날은 갈 수 있어야 했는데….”

선박 전문가이신데, 윤영하함은 어떤 특징이 있나요.

“프로펠러 엔진이 아닌 워터 제트 엔진이라는 거죠. 이젠 서해 연안에서 어망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답니다. 작은 배들은 워터제트 엔진을 달고 있지만 해군이 배를 최대한 키워 워터제트 엔진을 장착하는 데 성공했다는 겁니다.”

2008년은 제2연평해전 유가족들에게 정말 의미있는 한 해였습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 6월 29일을 국가기념일로 승격했는데.

윤씨는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울컥 목이 메이는 게 역력했다.
“감사하죠. 국가기념일로 승격해 준 것에 대해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들이 멋진 고속함으로 다시 태어나 감개무량합니다. 2함대, 해군본부에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노무현 정부 시절, 기념식이 의도적으로 축소되었고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제2연평해전의 의미를 왜곡하는 발언들을 많이 했습니다. 국방장관조차도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그때 굉장히 힘드셨죠.

“(그때 얘기)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좋은 것만 기억하고 살자고요. 감사한 마음만 표시하고 싶습니다.”

옆에서 얘기를 듣고 있던 부인이 고개를 돌려 베란다 유리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져 있었다.

윤씨는 노무현 정권 시절 얘기를 애써 자제하고 있었다. 윤씨가 노무현 정권에 대해 공개적으로 발언한 것은 2007년 가을 딱 한 번이었다. NLL은 영토선이 아니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 나온 직후였다.

그 해 10월 17일 윤씨는 재향군인회관에서 유족대표로 성명서를 읽었다. 윤씨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위대한 아들을 둔 자랑스런 아버지임에도 그동안 침묵해야만 했던 한(恨) 많은 아버지가 더 이상은 분노를 참을 수 없어 노 대통령에게 외칩니다”라고 말했다. 윤씨는 또 “기억하십시오. 유가족들의 피눈물이 아직도 마르지 않았음을…”이라고 말했다.

최근에 아드님을 꿈에서 만난 게 언제입니까.

“이상하게 전 꿈을 거의 안 꿉니다. 꿈에서 아들을 만난 적도 없어요. 꿈을 꾸고 잊어버리는 건지…”

거실에 아드님 사진이 하나도 안 보이네요.

“꼭 사진을 봐야만 떠오르나요. 사진이 없어도 금방금방 생각나지.”

아드님이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한 건 아무래도 아버지 영향을 받아서겠죠.

“강요한 적은 없고, 영향은 받았겠죠.”

이 질문에 비로소 윤씨는 길게 말을 이었다.

“아들에게 이런 말은 한 적이 있죠. ‘영국과 미군 해군장교들 봐라. 전부 명문가·귀족 출신이다. 해군장교가 되면 국가로부터 대우를 받는다. 그래서 나도 해군장교가 되었다. 해사 가고 싶으면 열심히 공부해라’라고 말했죠. 처음에 걔가 군인에 대해 별로였어요. 근데 특차 전형이니까 한번 시험이나 보겠다고 하데요. 입학시험 보러 갔다와서는 ‘이번에 떨어지면 내년에 다시 시험보겠다’고 하더군요. 아마 생도들 모습이 멋있어 보였나 보죠(웃음). 근데 첫 번째 도전에 덜컥 붙고 말았죠.”

아버지의 길을 따라 걷겠다고 한 아들이 대견하셨겠어요.

“기분 좋았죠. 그 지긋지긋한 군대에 (아들까지) 또 집어넣었냐고 말하는 동기생들도 있었죠(웃음). 하지만 그들도 나중엔 무척 부러워했죠.”

윤씨는 대위로 전역한 뒤 해운회사에 근무했다. 1982년 2월부터 3년간 런던지사에 근무했다. 윤씨는 “아무래도 아들이 영국에서 살면서 보고 느낀 게 해사 진학에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드님이 당시 사귀는 여자친구가 있었나요.

“없었던 걸로 되어 있죠.”

윤씨가 의자에 앉은 지 20여분이 되었을까. 윤씨는 허리 통증을 느끼는 듯했다. “힘드시면 일어나세요”라고 부인이 말하자 윤씨는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일어섰다. 고통스러워하는 윤씨를 더 이상 괴롭힐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국민께 한 말씀 해주시죠.

“대한민국 정부에 감사드립니다.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애국시민에게 감사합니다. 기념식을 국가행사로 격상해 줘서 고맙습니다.”

윤 선생님을 직접 뵈었으니 더 이상 이런 일로 찾아오지 않겠습니다.
이 말에 부인이 대답했다.
“오시지 말라니깐… 이러고 가면 (우리들이) 몇 날 며칠 마음이 아파서 얼마나 힘든데….”

기자는 윤 소령이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복사해 가겠다고 부탁했지만 부인은 “찾기 힘들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부인은 대신 동생 방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윤소령이 임관할 때 찍은 기념 사진과 어린 시절 형제가 나란히 찍은 사진이 놓여있었다. 사진 액자 속에서 형제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윤영하함 - 대함·대공·전자전 가능한 차기 고속정

유도탄고속함(PKG) 1번함(440톤). 1년7개월간의 시운전과 인수 평가를 거쳐 취역했고 차기고속정사업(PKX)의 결실로 평가 받는다. 국방과학연구소(ADD)가 독자개발한 전투체계를 바탕으로 대함전(對艦戰)뿐만 아니라 대공전·전자전 및 함포지원 능력을 갖췄다.

전장 63m, 전폭 9m, 최대속력 40노트. 76㎜ 함포 1문과 대함유도탄 등으로 무장했으며 선체 방화벽과 스텔스 기능을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지휘 및 기관통제 기능을 분산토록 설계되었다. 특히 함정이나 항공기, 미사일 등 적 표적을 탐지하는 레이더와 위성을 통해 자동으로 적에 대한 정보와 위협을 수집·분석하고 이를 무장체계와 연결해 대함(對艦), 대공(對空), 전자전 등을 수행할 수 있다.

76㎜ 및 40㎜ 함포는 물론, 사거리 140㎞ 이상의 한국형 대함 미사일 KSSM 유도탄도 장착, 장거리 표적에 대한 공격 또한 가능해 적 함정 여러 척과 동시 교전이 가능하다는 것이 해군의 설명이다. 유도탄고속함 후속함은 2009년부터 본격 생산에 들어가 2015년까지 20여대가 실전 배치될 예정이다. 취역식에 참석한 박남준씨(박동혁 병장의 부친)는 “규모는 작지만 내용이 알차고 성능이 좋아 매우 흡족하다”고 말했다.
출처 : 제 2연평해전 전사자 추모본부
글쓴이 : ▶Φ◀ 빤스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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