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월스트리트 내부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가 속속 밝혀지면서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다.
출발지는 다를지라도 1997년의 한국이나 2008년의 미국의 금융위기는 모두 급격한 流動性(유동성) 위기로부터 발생했다. 한국은 제조업 분야에서 과잉투자 때문에 제조업의 부실이 금융권으로 轉移(전이)됐다. 미국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의 부실이 금융권으로 전이됐다.
이런 위기 상황이 닥쳐오면, 結者解之(결자해지)를 외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은 망하도록 시장에 맡겨두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한다.
제조업의 경우, 기업이 不實化(부실화)하면 그 기업을 청산하거나 매수자에게 인수시키면 된다. 그러나 금융기관이 부실화하고 이로 인한 불안감이 확대되면 시스템 內(내)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영향권하에 들어간다. 경제전문 변호사인 찰스 R 모리스는 “금융업의 경우, 경영자와 株主(주주)에게는 高(고)수익이 발생하지만, 손실은 대개는 社會化(사회화)된다”고 말했다.
월스트리트發(발) 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 “잘난 척하더니 꼴 좋게 됐다”고 내심 快哉(쾌재)를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 금융위기로 지구촌 모든 나라들이 극심한 신용경색, 株價(주가)폭락과 경기위축으로 고통을 겪게 됐다.
시장이 붕괴되는 상황이 되면 당연히 최종 貸付者(대부자)인 정부가 나서야 한다. 물론 위기 발생의 원인제공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시급한 것은 금융시스템을 안정시켜 경제에 대한 불안심리의 확산과 급격한 신용경색으로 인한 연쇄 도산을 막는 것이다.
지난 1997년 外換(외환)위기로 IMF의 구제금융을 받았을 때,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은 IMF 등 국제금융기구나 歐美(구미)언론으로부터 ‘情實(정실)자본주의’ 운운 하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이번 월스트리트 發(발) 금융위기가 전개되는 과정을 보면서, ‘어떻게 그처럼 견제장치 하나 없이 무한정 신용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라는 의구심과 함께 ‘미국식 정실자본주의’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美정부가 투입한 公的 자금은 GDP의 5%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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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W 부시 美 대통령(가운데)이 지난 9월 19일 금융위기 대응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부시 대통령 왼쪽은 벤 버냉키 FRB(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오른쪽은 헨리 폴슨 재무장관. |
이번 금융위기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에 의해 촉발됐지만, 금융위기가 이처럼 확대再(재)생산되는 데는 투자은행에 대한 무분별한 규제완화 탓이 크다.
2004년 6월부터 시행된 통합감독대상(CSE) 제도에 의해 골드만 삭스, 모건 스탠리, 메릴린치, 리먼브러더스, 베어스턴스 등 5大(대) 대형투자은행들은 總(총)부채 규제, 즉 부채총액은 純(순)자산의 15배 이내로 제한되는 규제로부터 면제됐다. 덕분에 이들 대형 투자은행들은 자기자본의 30배에 달할 정도의 막대한 레버리지를 일으킬 수 있었다. 美(미) 증권거래위원회는 금융위기가 확산되던 9월 26일이 되어서야 CSE 제도 폐지를 발표했다.
이번 금융위기의 와중에서 20년 전에는 미 금융기관들이 다루는 대출 가운데 80%가 금융당국의 규제를 받았지만, 2006년에 이르러서는 불과 25%만이 규제를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아마 이렇게 규제완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업계의 로비가 적지 않게 작용했을 것이다.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 당시 IMF로부터 지원 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가혹한 경제프로그램의 이행을 요구 받았다. 이 프로그램에는 재정긴축, 금융긴축(고금리) 등과 같은 거시경제정책과 동시에 금융개혁, 기업개혁, 노동시장개혁, 그리고 공공부문개혁 등으로 이루어지는 제도개혁이 포함됐다. IMF처방은 미국식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3대 원칙 즉, ▲정부간섭 최소화 및 시장기능 중시 ▲株主(주주)자본주의의 강화 ▲개방화 등으로 대표될 수 있다.
이번 금융위기와 관련해서 의미가 있는 부분은 부실 금융기관의 정리에 관한 내용이다. 외환위기 당시 한국 금융기관의 부실대출의 규모는 86조8000억원으로 총자산 규모 340조6000억원(1997년 6월 말 기준)의 25.43%에 달했다. 반면에 현재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로 인한 미국 금융기관의 부실 규모는 약 1조 달러(IMF 추정)로 총자산 규모 12조1132억 달러(2008년 6월 말 기준)의 8.30%에 해당한다.
금융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1997년 11월 이후 10년간 公的(공적)자금으로 투입된 자금은 총 168조5000억원(금융권 및 제조업 포함)으로 1997년의 명목 국내총생산(GDP) 5164억 달러 대비 28.7%에 해당한다. 이 가운데 91조7000억원이 회수됐다(2008년 6월 말 기준, 회수율 54.4%).
미국의 경우, 미국 정부가 미국 내 全(전)금융사의 모기지 관련 부실자산 인수를 위해 투입하기로 결정한 공적자금 7000억 달러는 2007년 미국 GDP 13조8413억 달러의 5%에 불과하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투입하기로 결정한 7000억 달러 외에 금융위기 지원 금액은 이미 1조640억 달러에 달한다. 여기에는 베어스턴스를 인수하는 JP모건 체이스의 인수지원금 290억 달러, 패니메이, 프레디맥의 國有化(국유화)자금 2000억 달러, AIG 구제금융 850억 달러, 미국 내 전금융사 MMF 지불보증자금 500억 달러가 포함된다.
美는 株主 책임 묻는 데 소홀
외환위기 당시 한국의 금융과 기업 구조조정은 엄격한 自己責任(자기책임)의 원칙에 입각해서 행해졌다. 한마디로 가혹하다고 할 정도였다. 대주주는 물론 少額(소액)주주들도 예외 없이 부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때문에 일부 금융기관과 기업 주주들의 경우 갖고 있던 주식은 휴지조각이 됐다.
동화은행·동남은행·대동은행·경기은행·충청은행 등은 退出(퇴출)됐다. 공적자금이 투입된 한일은행이나 상업은행 등은 국유화됐다. 서울은행과 외환은행은 外資(외자)의 손에 넘어갔다. 국민은행·신한은행·하나은행 등은 합병을 통해 거듭났다.
미국에서도 씨티그룹과 모건스탠리의 외자 유치, JP모건과 BOA의 금융기관 인수합병, 리먼브러더스의 퇴출, 그리고 패니메이, 프레디맥 등의 국유화 조치가 이어졌다.
한국과 미국 모두 유동성 위기를 극복해 가는 과정은 엇비슷하다. 그러나 부실에 대해 주주들의 책임을 묻는 데 있어서는 차이가 크다. 미국의 경우, 주주들은 새로운 자본 투입에 따라 주주들의 자본 희석이 이루어지는 정도의 손실을 감수해야 하지만, 기존 주주들에 대한 책임은 거의 묻지 않고 있다. 시장경제원리의 가장 중심에 있는 ‘자기책임의 원리’는 거의 무시되고 있는 셈이다.
앞으로 투입될 7000억 달러의 공적자금은 부실자산을 매입하는데 사용될 예정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계속적으로 주택가격의 추가 하락이 예상되고, 파생상품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상태에서 이 공적 자금은 밑 빠진 독에 부은 물처럼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지난 9월 중순 AIG가 유동성 부족 사태에 직면했을 때 필요자금의 규모는 200억 달러에 불과했다. AIG는 “300억~400억 달러의 지원이면 충분하다”면서 미국 정부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며칠 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850억 달러의 크레디트라인을 AIG에 추가적으로 제공했고, 이후에도 지원 금액은 계속 불어났다.
지난 10월 31일字(자) <뉴욕타임스(NYT)>는 “이미 두 차례나 자금지원을 받았던 AIG가 또다시 210억 달러를 지원 받아 이미 세 차례에 걸쳐서 1440억 달러를 받게 됐다”고 보도했다.
이들 자금은 대부분 파생상품 거래에 따르는 증거금 부족분을 충족하는데 사용됐기 때문에 앞으로도 증거금 부족분을 얼마나 더 채워 넣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특히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게 되면 그야말로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꼴’이 될 것이다.
부분 國有化를 통한 금융기관 정상화가 최선
영국은 미국과는 다른 선택을 하고 있다. 영국은 지난 10월 8일 8개 대형은행을 중심으로 정부가 250억~500억 파운드의 은행 出資(출자)를 실시했다. 은행 국유화를 통한 정상화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지난 10월 3일 발표된 미국의 금융구제법안이 부실자산 매입에 초점을 맞춘 데 반해, 영국의 경우는 持分(지분)출자를 통한 은행들의 재무구조 개선과 함께 대출시장 경색 해소, 부실자산 처리 촉진 등을 도모하고 있다.
영국의 공적구제 방안은 유럽 각국에 유력한 표준모델로 제시되고 있다. 9월 28일 네덜란드와 벨기에, 그리고 룩셈부르크 등이 영국과 비슷한 공적구제 모델을 속속 도입했다. 한국금융연구원은 유럽 각국의 동향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번 영국의 구제대책 발표 이후 독일·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 등 여타 유럽연합(EU) 회원국들도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적극적인 대응 방안을 잇달아 표방하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는 은행들의 대출기능 정상화를 위해 영국식 모델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이탈리아는 은행들의 자금조달 지원을 위한 200억 유로의 안정기금 설립을 추진하고 있고, 스페인도 은행자산 매입을 위한 300억 유로의 긴급펀드 조성계획을 공표하고 있다.”
국유화라는 단어가 가진 어감은 그다지 좋지 않다. 그러나 납세자의 돈을 부실 금융기관에 투입할 때는 당연히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 새로운 자금 투입에 따른 자본희석은 약과이고 減資(감자)와 같은 일들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외환위기 당시 감자 등의 방식을 택했던 우리나라는 가장 가혹한 조치를 선택했던 셈이다.
유동성 위기에 직면한 금융기관들은 이미 시장에서 신뢰를 상실했다. 그들이 자본을 확충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자산을 헐값에라도 내다파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賣物(매물)들이 대거 시장에 쏟아져 나오면 추가적인 자산가격 하락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헤지 펀드들의 마진 콜과 투자자들의 자금회수 요구로 내다파는 주식 때문에 주가가 폭락하는 현상을 우리는 이미 목격한 바 있다.
부실화된 자산을 매입하는 방안도 最低(최저)가격으로 인수한다 해도 추가적인 자산가격 하락에 따라서 추가적인 부실 발생을 피할 수 없다.
결국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代案(대안)은 지분 출자를 통해서 부분적인 국유화를 추진하고 이를 기초로 금융기관의 正常化(정상화)를 이룬 다음에 다시 민간에 매각하여 납세자의 돈을 회수하는 방식이다. 이 방법이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우리가 시행했던 방식이기도 하다.
스웨덴, 은행에 투입했던 공적자금 100% 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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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기 해법으로 은행 부분 국유화 방안을 제시한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
이런 점에서 올해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크루그먼이 11월 13일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영국 총리 고든 브라운이 제대로 하고 있다’는 칼럼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700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두고 벤 버냉키 FRB 의장과 헨리 폴슨 재무장관 사이에 異見(이견)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벤 버냉키 의장은 개인적으로 ‘정부의 직접 자본 투입’ 방안을 선호한 데 반해, 폴슨은 금융업체의 부실자산을 매입하는 방안을 선호했다.
이를 두고 크루그먼은 “알다시피 폴슨은 귀중한 몇 주의 시간을 보내고서야 방향을 바꾸었다. 하지만 지금도 짜증날 정도로 느리게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폴슨의 초기 대응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된 것이라는 느낌을 떨치기 힘들다. 私益(사익)을 위하고 公益(공익)을 외면하는 철학을 가진 행정부에서 일하기 때문에 금융분야의 부분 국영화를 선택하기 힘들었을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미국인들에게 국유화라는 아이디어는 사회주의와 동의어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불편한 단어임에 틀림이 없다. 특히 폴슨 재무장관은 골드만 삭스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CEO출신이다. 그는 이론적·이념적으로 부분적이건 전체적이건 간에 국유화라는 아이디어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반해 영국인들은 국유화라는 아이디어에 익숙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다. 때문에 노동당 정부이건 보수당 정부이건 필요하면 언제든지 국유화라도 실시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아무튼 현 상황에서 정부가 개입해서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하면 그 자금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미 역사적인 경험이 있다.
스웨덴에서는 1991~1992년 高點(고점) 대비 부동산 가격이 60% 폭락하면서 부동산을 담보로 갖고 있던 은행들이 줄줄이 유동성 위기로 내몰렸다. 스웨덴의 대형 은행 7개 가운데 5개가 공적자금을 투입하지 않고선 파산할 상황에 이르렀다.
1992년 말 스웨덴 정부는 부실은행 구제를 위해 국내총생산의 4%에 해당하는 183억 달러(20조원)를 투입해 은행 국유화를 단행했다. 정부는 경영권을 인수한 후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통해서 회사 가치를 크게 올렸다. 이후 스웨덴 정부는 정상화된 은행들로부터의 배당 수익과 은행매각 비용 등으로 공적자금을 100% 가까이 회수했다.
국유화 방식 취하지 않으면 모럴 해저드 우려돼
국유화 방식을 취하지 않을 경우, 정부가 관련 부실자산을 매입하는 단계에서 금융기관들의 기기묘묘한 모럴 해저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지난 10월 7일 美(미) 하원에서 열린 금융위기 청문회에서는 구제금융을 간신히 받는데 성공한 AIG의 모럴 해저드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AIG 임원들이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캘리포니아州(주) 모나치 비치의 세인트레지스 리조트에서 44만 달러짜리 초호화판 콘퍼런스를 개최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AIG임원들은 방값으로 20만 달러, 식사와 온천 비용으로 각각 15만 달러, 2만3000달러를 쓴 것으로 알려졌다.
하원의원들은 “납세자로부터 구제 받은 뒤 1주일도 안돼 우리는 AIG경영진들은 이 나라 최고급 휴양지에서 승리의 축배를 드는 것 같은 모습을 보게 됐다”, “그들이 매니큐어, 페디큐어, 마사지 등을 받고 있을 때 미국인들은 고지서의 세금을 지불하고 있었다”고 비판했다.
미국 등은 한국·스웨덴 등 과거의 성공사례로부터 배워야 한다. ‘인간은 조그만 틈이라도 있으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혈안이 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는다면, 이번 금융위기 속에서 미국 등 각국 정부는 돈은 돈대로 투입하고서도 소기의 성과는 거두지 못할 공산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