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격수의 세계/미사일보다 더 무서운 ‘인간무기’

<15>스탈린그라드의 저격전

화이트보스 2009. 1. 26. 19:56

<15>스탈린그라드의 저격전
소련군 스나이퍼 투입 독일군에 강력 저항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의 붉은군대는 무기력한 전투에서 저격전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인식하고 많은 스나이퍼를 다양한 방법으로 운용했다.소련의 스탈린그라드를 둘러싼 거대한 전쟁은 최고 가치의 저격전으로 명승부를 기록했다. 볼가 강의 스탈린그라드 시 확보를 둘러싼 도시지역 전투에서 쌍방의 저격수가 중요한 요소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1942년 9월 독일의 제6기갑군과 4기갑군은 우크라이나의 광대한 평원으로 진격, 소련군을 포위해 스탈린그라드로 몰아붙였다. 독일군의 계속된 포격으로 모든 시가지가 불타서 붕괴되고, 저격수들에게 적합한 시멘트와 돌무더기 지형으로 변해 버렸다.

궁지에 몰린 소련군 부대에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라는 스탈린의 엄명이 떨어졌고, 적개심에 불타는 소련군 스나이퍼들이 시가지 전투에 투입됐다. 그들은 며칠씩 잠복작전에 들어가 시가지에서 고립된 상태로 활동했다. 적의 총구 앞에 노출된 지역으로 잠입한 저격수들은 온종일 부동상태를 유지하고 진지 이동은 오직 밤에만 가능했다.

소련군 스나이퍼들은 굶주린 늑대처럼 이를 갈았다. 소련의 상징인 스탈린그라드 시를 잿더미로 만든 독일군 원수들에게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다.영하 30~40도의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 저격수들은 먼저 살인적인 추위와 싸워야 했다. 고립된 진지에서 굶주림과 갈증, 그리고 공포와 싸우며 지루함을 견뎌야 했다.

소련의 일급 스나이퍼들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유례없는 명성을 날렸다. 의심할 여지없이 가장 유명한 저격수는 우랄산맥의 사냥꾼 출신 바실리 자이체프(Vasili Zaitsev) 중사였다. 그는 스탈린그라드의 제284 소총사단 1074연대의 저격수로 임무를 수행했다. 8월~10월 말까지 그는 200명 이상의 독일군을 죽였고, 부상으로 후송될 때까지 총 400여 명의 독일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일명 ‘토끼’라는 별명을 가진 자이체프는 스탈린그라드에서 하루 평균 30~40명의 독일군을 사살했다.자이체프는 자르(Lazur) 화학공장의 넓은 부지에 임시로 자신의 저격수 훈련소를 세웠다. 훈련은 기초적인 것이었지만 저격수의 생존율을 크게 향상시켰고, 독일군 살상 수를 높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단 2일 동안의 훈련과정이 끝나면 수료생들은 즉시 전선으로 투입됐다.

붉은군대의 저격수들은 독일 제6군사령부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모든 병사가 소련군 망원 조준경의 감시를 받고 있다고 느끼자 사기가 떨어졌고 공격 결정력을 잃었다.독일군은 생포된 소련의 신문기자에게서 자이체프의 명성을 들었다. 그는 독일군의 주요 표적이 됐다. 소련군 저격수의 기를 꺾어 놓기 위해서는 자이체프를 반드시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됐다.

사실상 독일군의 위협이 되는 소련군 저격수는 자이체프 외에도 많았다.이 무렵 독일 베를린 근처 작센의 스나이퍼 훈련소장인 쾨니히 소령이 스탈린그라드로 특파됐다. 소련군의 판단에 의하면 독일의 유명한 저격수인 그는 신분을 숨기기 위해 하인츠 토르발트 대령으로 위장하고 있고, 그가 자이체프를 제거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라고 믿었다.

자이체프와 그의 동료 저격수들은 쾨니히의 출현으로 살기를 띠기 시작했다. 소련군이 전후 기록에서 밝혔듯이 전선에서는 쾨니히의 위치를 추적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집중했으며, 자이체프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모든 저격수들은 독일군 전방 진지에 대한 일일 정찰 보고를 했다. 나는 나치 저격수들의 사격과 위장술, 그들의 스타일까지 알게 됐다. 그러나 쾨니히 훈련소 우두머리의 존재는 여전히 미스터리였다. 내가 그를 찾고 있는 것처럼 그도 주의 깊게 나를 관찰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졌다. 적의 망원조준 소총에 의해 동료인 모로쵸프가 죽었고 시예킨이 부상했다. 그들은 모두 노련한 저격수며 베테랑들이었다. 이제 분명한 것은 내가 찾던 나치의 ‘슈퍼 저격수’가 드디어 나타났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