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美 남북전쟁의 저격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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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지휘관은 좋은 표적…군단장도 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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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나폴레옹 전쟁과 미국의 남북전쟁 시기는 새로운 무기 발달과 함께 소총 디자인의 황금시기였다. 많은 회사에서 설계한 다양한 권총이 남북전쟁 때 북군과 남군 간 대규모 전투에서 사용됐다. 화약제조 기술 발달로 전투는 고강도 파괴력을 가져왔다.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은 최초로 현대적 전쟁 양상을 보여 주었다.
전투시 일선형 보병대열은 400m 이상의 거리에서도 위협적인 사격을 받을 수 있는 집단 표적을 제공했다.과거에는 기마 포병대가 기세 좋게 적진 300m 앞까지 전진해 압도적으로 산포를 쏟아붓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런 무모한 전술이 남북전쟁에서도 되풀이돼 포병들이 소총에 맞아 줄줄이 쓰러졌다. 그 결과 포병들은 전장에서 보병들의 후방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최초로 저격수의 장거리 사격이 나타나게 됐다. 적으로부터 500~600m 떨어진 거리에서 포병들은 소총 사격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저격병들의 공격을 받기 쉬운 상태였다. 양 진영에서 모두 사용한 엔필드 소총·스프링필드 소총은 450m 이상의 거리에서 사람 크기의 표적을 저격할 수 있는 믿을 만한 무기였다.
1864년 5월 9일 스포실바니아 전투에서 북군 제4군단장이었던 세지윅(J. Sedgwick) 장군은 남군의 공격 지역에서 부대를 순찰하는 중이었다. 그때 병사들이 작은 총소리에 놀라 피하는 것을 보고 세지윅 장군이 웃으면서 소리쳤다. “무슨 일인가 제군들! 겨우 총 한 방 소리에 놀라 피하다니! 이렇게 먼 거리에서는 코끼리도 명중시키지 못한다!”
바로 그 순간, 어디선가 총탄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날아와 그의 머리를 관통시켰다. 병사들은 경악하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가까이서 이를 목격한 장교는 그 놀라운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총에 맞은 장군의 얼굴이 천천히 나를 향했고 그의 눈 아래 왼쪽 뺨에서 피가 계속 솟구쳐 나왔다. 장군이 통나무처럼 나에게 쓰러지자 그를 부축할 사이도 없이 같이 넘어지고 말았다.”
세지윅 장군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북부 연합군의 진군을 더디게 했고 결국 그 전투에서 남부 동맹군이 승리하는 요인이 됐다. 이로 인해 1863년 7월, 워싱턴 시티 공세에서는 북군의 대규모 반격이 시작됐다. 남군의 저격수들은 북군 저격수들의 보복 표적이 됐다. 사기가 떨어진 북군의 전세를 가다듬기 위해 링컨 대통령까지 전선을 시찰했다.
전투가 한창 진행 중일 때 링컨 대통령의 바로 옆에 서 있던 주치의가 남군 저격수의 위트워스 총탄에 맞았다. “위험 합니다!” 옆에 있던 북군사령관이 대통령을 급히 방호함으로써 남북전쟁사에 있어 돌발적인 드라마틱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게 됐다. 미국의 남북전쟁 중 북부 연합군사령관 로즈클랜 장군은 장교들에게 남군의 저격을 피할 수 있도록 소형 계급장을 부착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장교의 표식이 되는 지휘도를 감추도록 했다. 그러나 혼란한 전장에서 장군들이야말로 항상 좋은 표적이었다. 고급 지휘관을 따르는 부대기와 나팔수, 좋은 말과 안장, 목에 건 값비싼 쌍안경 등은 상대방 저격수에게 훌륭한 표식인 셈이다. 결국 지혜롭지 못한 장군들은 저격수들의 밥이 됐다.
북군 버든 저격부대의 저격수 부사관 화이트(W.S. White)는 장거리 사격으로 많은 남군 지휘관을 사살했다. 페닌슐라(Peninsular) 전투시 버든 부대의 체스(G. Chase) 일병은 남군 병사들이 포를 장전하고 장교가 발사명령을 내릴 때마다 사수들을 사살해 이틀 동안이나 전선을 버티게 했다.
남북전쟁 동안 강력한 포병 사격은 이러한 저격수들을 제거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비용이 많이 들었다. 소총으로 무장한 몇 명의 저격수를 제압하기 위해 많은 대포를 동원하고 값비싼 포탄을 퍼붓는 것은 큰 낭비였던 것이다. 그만큼 저격수들의 가치와 전장의 위기감이 점점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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