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역사에서 배운다/다시보는 6.25

<78>휴전회담과 이승만 대통령의 현명한 대처

화이트보스 2009. 1. 29. 19:47

<78>휴전회담과 이승만 대통령의 현명한 대처
한미상호방위조약·경제원조 받아내

6·25 때 중공군 개입은 전쟁을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게 했다. 한만(韓滿) 국경을 눈앞에 두고 있던 국군과 유엔군에게 이는 청천벽력이었다. 미국은 중공 참전이라는 새로운 상황을 맞아 확전·철군·휴전방안을 놓고 다각적으로 검토했다. 1950년 12월 4일~8일 위싱턴에서 미영은 정상회담을 갖고 유엔 후원하에 전쟁 이전 상태에서 휴전을 모색함이 최선의 방안이라고 판단했다.

유엔에서도 휴전이 본격적으로 논의되는 가운데 미국은 51년 5월 휴전을 전쟁정책으로 확정했다.특히 51년 6월 23일 미국과의 막후 협상 끝에 유엔 소련 대표 말리크가 휴전협상을 제의하면서 전쟁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하지만 휴전회담은 북진통일을 전쟁목표로 삼고 매진해 왔던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지난(至難)한 일이 됐다.

말리크 연설 후 미국은 유엔군사령관(리지웨이)과 미국대사(무초)를 통해 그들의 휴전방침을 한국에 통보했다. 이에 이대통령은 긴급 국무회의를 소집해 “우리에게 한반도 통일은 최소한의 요구다. 휴전회담이 있을 때 한국의 입장이 무시돼서는 결코 안 된다”며 정부의 입장을 발표했다.

또 6·25발발 1주년 기념연설에서 그는 “모든 공산당을 압록강 너머로 몰아낼 때까지 유엔은 자기들이 공언한 사명에 충실할 것을 요구한다. 유엔은 지금의 진격을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며 북진통일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그렇지만 세계 반응은 소련의 말리크가 던진 ‘휴전협상이라는 빵조각’을 받아먹으려고 허둥대는 꼴이었다.

인도의 네루는 전쟁 중지를 요구하기 위해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규합했고, 아랍연맹은 중공에 대한 더 이상의 압력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트루먼 대통령도 미국 독립기념연설에서 “한국은 보다 광범위한 투쟁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기억하라면서 충분한 정보를 가진 (미국) 대통령만이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영국 언론도 한국에서 유엔군 철수를 용이하도록 하는 등 ‘반이승만 노선’을 채택하며 이대통령의 휴전반대를 압박했다.이대통령은 ‘유엔의 문제아’라는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휴전을 완강히 반대했으나, 대세는 휴전으로 가고 있었다.

53년 4월 상병(부상자) 포로교환이 현실화되자, 이대통령도 이제 휴전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깨닫고 휴전협상 초기에 제시했던 중공군 완전철수·북한군 무장해제 이외에 한미 군사동맹·경제원조·국군증강·미군 주둔을 휴전조건으로 제시했다.이대통령은 “약소국 입장에서 미국에 순응해 휴전에 협조하면 비록 칭찬을 받을지 모르나, 그것은 (한국의) 자살을 재촉하는 행위”라며 괴로워했다.

이대통령은 휴전을 양보하는 대신 미국을 상대로 전후 한국의 생존에 필요한 안보를 확보하려고 했던 현명한 지도자였다. 이대통령은 미국에 전후 한국에 가장 절실한 한미상호방위협정을 휴전 이전에 체결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이를 피해가려 하자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해 “한국도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는 ‘이승만식 대미경고’였다. 덜레스 국무장관이 이를 보고받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깨워 “이렇게 되면 최악의 경우 전면전이 불가피하고, 자칫 확전으로 인해 원자탄을 사용할지도 모른다”고 할 정도로 미국에 충격이었다.

마침내 이대통령은 휴전을 반대하지 않겠다는 약속 대신 미국으로부터 한미상호방위조약·경제원조·국군증강 등 엄청난 원조를 당당하게 받아냈다. 이는 ‘자기 체중만큼의 다이아몬드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닌 인물’ 이승만이 아니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