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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부산을 ‘1일 생활권’으로 묶은 경부고속도로가 1970년 오늘 개통됐다. 당시 경부고속도로 총 길이는 428㎞이다. 서울 양재동에서 시작해 대전~대구~부산 구서동까지 이어지는 도로이다. 하지만 2008년 6월 현재, 차로 확장과 도로 직선화 등을 통해 417.4㎞로 단축됐다.
1967년 4월 박정희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첫 발표됐을 때, 여론의 반응은 싸늘했다. ‘부자들의 관광길이 될 것이다’ ‘나라의 재정을 거덜 낼 것이다’ 등이 반대 이유였다.
하지만 재선에 성공한 박 대통령은 육군 3개 공병단을 투입하며 공사를 강행해 2년 5개월 만에 완공했다.
경부고속도로는 수도권과 영남 공업지역, 우리나라 2대 수출입 항구인 인천항과 부산항을 연결하며 한국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됐다. 그러나 공사기간 동안 77명의 인부가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일도 발생했다. 6개의 터널, 346개의 다리가 있으며 인터체인지 35개소, 분기점 9개소에 휴게소는 30곳이 있다.2008년 현재 우리나라 고속도로는 24개 노선에 총 길이 3132㎞이며 하루 평균 357만 대의 차량이 이용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 "현대 정주영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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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4월29일.박정희 대통령은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제6대 대통령 선거운동을 하면서 경부고속도로 건설 공약을 발표했다. 1964년 12월에 서독을 공식 방문한 그가 1932년에 건설된 본~쾰른 간 아우토반(autobahn)을 시속 180㎞로 달리며 고속도로의 경제적 효용성을 절감하고 간절히 꿈꿔 오던 터였다.
그러자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고속도로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부유층의 유람로를 만들려느냐","1인당 GNP(국민총생산) 142달러인 나라에서 그게 왜 필요하냐" 등등…. 외국에서도 시기상조라고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67년 11월7일 건설부 장관에게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지시했다. 다음 달 15일에는 '국가기간고속도로건설계획조사단'이 출범했다. 박 대통령은 국무위원들을 배석시킨 뒤 조사단원에게 일일이 임명장을 줄 만큼 애착을 쏟았다. 국토개발계획을 비롯해 각 노선과 단면도의 비교 검토 및 건설비 산출,용지 매수에 따르는 자료 등도 직접 챙겼다.
"현대 정주영을 불러."
박 대통령은 정주영 현대건설 회장에게 고속도로 건설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부탁이라기보다는 명령에 가까웠다. 마침 현대건설은 태국에서 99.7㎞의 고속도로 공사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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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2월1일.서울 원지동에서 경부고속도로 기공식이 열렸다. 한반도의 국토를 뒤흔든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첫 발파 소리는 21세기 대한민국의 밑거름이 됐다. 이미 박 대통령의 지시로 고속도로 기공식 석 달 전부터 육군의 3개 공병단이 공사를 시작했다.
현대건설은 특유의 뚝심으로 밀어붙였다. 정 회장도 진력을 다했다. 그 해 4월3일 오산∼대전 간 공구(106.6㎞),9월11일 대구∼부산 간(123㎞),이듬 해 1월13일에 대전∼대구 간(152㎞)이 착공됐다.
"공기를 앞당기자.평생 부르짖은 첫번째 구호이자 전략이다. 나는 당시로는 천문적이라 할 수 있는 800만달러어치,1989대의 중장비를 투입했다. 1965년 말 민간업체가 보유한 총 장비 수가 1647대였던 점을 감안하면 해외에서 사들인 중장비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땅에 태어나서' 정주영 자서전)
박 대통령은 마치 전쟁을 치르듯 직접 '전투병사들'을 지휘했다. 헬기를 타고 공사현장을 수시로 둘러보는가 하면 지프를 타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현장으로 달려갔다.
모든 사람들이 공기단축을 위해 그야말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달렸다. 겨울에는 언 땅 위에 짚을 깔고 휘발유를 뿌린 뒤 불을 지르고,트럭 꽁무니에 버너를 매달고 반복운행을 하면서 땅을 녹인 뒤 지반을 다졌다. 서울∼수원 간은 착공 11개월 만인 1968년 12월21일에,수원∼오산 간은 같은 해 12월29일에 개통했다. 1969년에는 오산∼천안 간,천안∼대전 간,대구∼부산 구간이 완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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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은 고속도로 개통 테이프를 자른 뒤 "가장 싼 값(1㎞당 1억원)으로 가장 빨리 이룩한 대(大)예술작품"이라며 감회에 젖기도 했다.
경부고속도로는 한강의 기적을 견인한 대한민국 경제의 대동맥 역할을 해냈다. 경부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서울∼대전 간을 버스로 오가려면 무려 여덟 시간이 걸렸다. 경부고속도로는 대한민국을 일일생활권으로 바꿔 놓았다. 한국도로공사는 현재 경부고속도로의 경제적 편익이 연간 13조5500억원에 달한다고 추산했다.
이후 호남,남해,영동,서해안,중부,중앙고속도로 등이 잇따라 건설됐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당시 우리나라 고속도로 길이는 457.5㎞(경부 428㎞,경인 29.5㎞)로 하루 이용차량이 9000여대에 불과했다. 38년이 지난 현재 총 26개 노선 3368㎞로 하루 평균 360만여대가 고속도로를 이용하고 있다. 정부는 2020년까지 총 연장 6000㎞의 고속도로를 구축할 계획이다.
그러나 도로에 비해 21세기의 신교통수단으로 재부상 중인 철도에 대한 투자가 그동안 거의 전무했다는 점이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정일호 국토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경부고속도로가 오늘날 한국의 경제발전을 이끈 견인차였지만 자동차 중심의 도로교통을 고착화시키는 부작용을 낳았다"며 "고유가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철도의 투자를 늘려 균형 있는 교통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경부고속도로 서울∼대전 구간은 고속도로의 기능을 상실한 만큼 제2경부고속도로와 서울 강남권에서 출발하는 고속철도 지선 건설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문권 기자 mkkim@hankyung.com
경부고속도로 개통
입력 : 1999.08.03 17:39 경부고속도로 개통(197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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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대륙을 잇는 중요 고속도로는 들소들이 다니던 길을 따라 만들어진 것
이라고 한다. 길은 그 자체가 인류 문명의 이정표였던 것이다. 한국인의 경
우도 예외는 아니다. 경상도가 경주와 상주, 전라도가 전주와 나주를 이어
주고 있는 길을 의미하였듯이 우리의 지역 이름은 모두 길에서 비롯된 것이
다. 일제 때 만든 길을 신작로라고 불렀던 사람들은 산업화의 구호와 함께
스스로 고속도로를 만들었다. 그리고 육간 대청 같은 넓은 길을 시속 100㎞
로 달리면서, '우리는 잘 살아 보세'의 노래와 함께 축배를 들었다. 바로
그 무렵(1958) 미국에서는 금세기 동안 교통사고로 길 위에서 죽은 사람이
125만명이나 되고 그것은 그 기간동안 미국에서 전쟁으로 죽은 전사자보다
도 많은 숫자라는 사실을 발표하고 있었다. ( 이어녕 이화여대 석좌교수).
사진설명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함께 서울∼부산 천리길이 4시간 거리로 단축됐다. 총 길이 428km에 공사비 429억원, 2년 5개월만의 완공이었다.
공화당은 1970년 7월 7일 "5000년 민족사상 일찌기 누구도 꿈꾸어 본 적
없는 대동맥이 준공됐다"고 성명을 냈다. 신민당은 같은 날 "빈약한 재정
속에서 국민의 과중부담으로 400여억원을 투입한 것은 투자 순위가 전도된
전시행정"이라고 비난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을 알리는 목소리였다. 총길이 428㎞에 걸쳐 4차선 아
스팔트가 깔리면서, 서울∼부산 천리길이 4시간 거리로 줄어든 날이었다.
기업들은 운송기간이 단축될 것이라 좋아했고, 농어민들은 생필품을 값싸게
살수 있다고 웃었다. 명실상부해진 '1일 생활권'에 감동한 것이었지만, 한
국도로공사가 나중에 추산한 연 8조2000억원의 차량운행비 및 시간단축 절
감비, 1300억원대에 이르는 산업 성장효과를 예상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고속도로 건설을 지시한 게 1967년 11월.1968년 2월
착공 이후 2년 5개월만에 끝을 본 초스피드 건설이었다. 당시 공사비가 총
429억원이었으니 1㎞당 1억원이 소요된 절약형 건설이기도 했다.그나마도 구
상 당시, 현대건설이 400억원선, 건설부가 450억원선, 국방부는 계산을 포기
해 백지를 냈고, 서울시는 "182억원이면 족하다"는 답을 낸 끝에 360억원으
로 예산이 잡혔다가 공사 도중 증액한 액수였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대
구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준공식에서 "가장 싼값으로 가장 빨리 이룩한 대예술
작품"이라고 자랑할 수 있었던 공사였다.
새로운 사회적 현상이 생겨나기도 했다. 경찰은 도로 길이에 놀라 안전운
행에 관한 전단을 뿌리고 2시간 이상 계속 주행을 금지했을 뿐이지만, 인명
을 대규모로 앗아가는 대형 교통사고의 다발 가능성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
다. 고속도로 구상과 함께 서울 말죽거리에서부터 뻗어나간 부동산 투기 붐
은 인터체인지 부근 임야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현상으로 자리잡으며 '복덕방'
의 수를 늘려나갔다.
그리고, '개발독재'의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공사에 참여한 15개 건설업
자들이 적자 보상책으로 향후 정부공사의 독점을 건설부에 요청했고 건설부
도 거절 못하고 있다는 얘기가 튀어나왔다. 새 장비와 기술, 그리고 정부와
의 연대를 포함, 급격하게 벌어진 건설업계의 실력 격차가 일군의 대기업 지
배체제를 공고히 할 것이라는 지적은 이후로도 유효한 것이었다. 경부고속도
로는 분명 70년대 이후 가시화된 근대화의 상징이며 견인차였다. 그러나 건
설의 착상에서부터 소요기간, 예산, 과정 등에 너무나도 한국적 성장의 모습
들이 함축된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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