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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를 가리켜 ‘나의 유일한 낙원’이라고 말하곤 했다.
불우여성들을 지속적으로 돕는다는 취지로 양지회관도 만들었다. 회원들이 모은 200만원 정도를 기금으로 서울 동대문구 숭인동에다 203평 대지에 연건평 275평 회관을 건립한 것이다. 200여 명의 여성이 그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편물 양재 미용 등 직업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고 주부들이 교양을 높일 수 있도록 강의실 도서실도 만들었으며 요식업 종사자, 버스 안내양들도 교육받게 했다.
무료진료소를 지어 난민촌 사람을 치료해주기도 했다. 여사는 일반 회원들과 똑같이 3인1조가 되어 진료소를 돌며 환자들을 돌보았는데 ‘여사가 손을 대면 상처가 낫는다’는 소문이 퍼져 환자들이 줄을 잇기도 했다. 당시 양지회 활동에 참여한 한 회원의 말이다.
“가까이 있으면 누구나 결점이 드러나게 마련인데 육 여사는 보면 볼수록 존경심이 깊어지게 하는 분이었다. 여사는 ‘남을 반성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얼마 전 ‘동행’이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낸 김대중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는 책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편의 평생 정적(政敵)이었음에도 부인 육영수 여사에 대해서만큼은 후한 평가를 내려 눈길을 끌었다. 육 여사 생전에 세 차례 만났다는 이 여사는 “육 여사는 따뜻하고 반듯한 성품을 지녔으며 남편의 독재를 많이 염려한 것으로 알려진 청와대 속의 야당”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루에도 10여통씩
민원 편지가 폭주하자 비서실에서 검열을 했다. 육 여사는 이를 알고 검열하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국민의 소리를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생전 육영수가 양지회 회원들에게 했던 말 중한 대목이다.
“혁명한 사람의 아내가 국민과의 대화를 막아버리면 혁명정신이 무색하지 않습니까. 박 장군이 주도하여 이룩한 혁명은 어느 개인적인 의사가 아니라 국민의 총의를 대신하여 이룬 것이니 혁명가의 아내는 국민과의 대화 통로를 폭넓게 마련하여 의사를 충분히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절차에 구애되지 않고 되도록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겠지요.”
여사는 하루에도 수십통씩 날아오는 편지를 ‘그냥 답장만 해도 무방한 것’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 세 가지로 나눈 뒤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비서나 소속 행정기관에 연락해 사실 여부를 확인하게 한 후 정성을 다해 매듭지어주었다.
자기 선에서 할 수 없는 것들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민원인이 이해할 수 있게 알려주었다. 또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공익(公益)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일이 있으면 대통령에게 보고해 힘을 빌리기도 했지만 그런 일은 드물었다.
여사는 하루 일과를 끝내고 2시간 이상씩 서재에 틀어박혀 답장을 썼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을 상대로, 그것도 바쁜 일정을 쪼개 힘들고 괴로운 내용을 붙들고 일일이 답장을 쓴다는 것은 보통 정신이 아니고선 하기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서식이 일정한 사무적인 것도 아닌, 복잡한 사정들이 얽혀 있는 글들에 대한 회신을 하루에도 10여 통씩 줄기차게 쓴다는 것은 끈질긴 성의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한 해에 처리한 서신이 5000여 건 가까이 된다.
이런 간접 소통 외에 여사는 직접 소통에도 열심이었다. 육 여사 하면 나환자 돌보기 사업을 빼놓을 수 없다.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이 나환자와 악수하면서 미소 짓던 육 여사를 기억한다.
여사가 나환자한테 관심을 가지게 된 때는 1965년 봄이었다. 식목일이 다가오자 몸은 비록 불편하나 꽃을 보며 마음을 환하게 가졌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꽃씨상자를 나환자 마을에 보내준 것이다.
그 후 일반 목욕탕에 갈 수 없는 환자들을 위해 공중목욕탕을 지어주었고 나환자들의 일이라면 발 벗고 도왔다. 한번은 나환자를 부모로 둔 아이들이 정상아를 둔 학부형들의 집단행동으로 초등학교 입학하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이 100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아들 지만 군과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일반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여사는 어느 날 비서 한 사람만 데리고 경기도 양주군 나환자촌을 찾았다. 얼굴은 찌그러져 있고 호미를 들고 있는 손도 마디가 떨어져 나간 흉측한 몰골이었지만 육 여사는 그들을 만지고 안는 데 개의치 않았다. 여사는 코를 흘리고 있는 아이를 덥석 안아 올리며 직접 손수건으로 코를닦아주기도 했다.
한 소녀가 드링크 한 병을 들고 여사 앞에 놓더니 고개 숙여 인사하고 도망치듯 달아났다. 하는 양이 어른들이 미리 연습을 시킨 것 같았다. 여사는 빙그레 웃으며 “이건 서울 가는 차안에서 마실 테니 냉수를 한 그릇 달라”고 했다. 그러고는 맛있게 마셨다.
모두들 깜짝 놀라는 한켠으로 큰 감동을 받았다. 자기들을 벌레 대하듯 하며 얼굴을 보기도 싫어하고 심지어 감염도 안 된 아이들과 자기 아이들을 한 공간에서 공부시키기 싫다며 초등학교 입학도 반대하는 게 사회 사람들의 정서 아닌가.
‘나의 어진 아내 영수’
그런데 영부인인 그가 자기들과 악수하는 것은 물론이요 자기들이 사용하는 그릇에 담긴 물까지 맛있게 마시고 물론 뭉개진 손을 일일이 잡아주며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했다.
1974년 8월15일 육 여사의 사망이 박정희를 고독하게 만들어 유신체제를 약화시키는 데 결정타가 됐다는 증언과 주장은 많다. 실제로 육 여사는 박정희 삶에 결정적이고 절대적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애초부터 세속적인 가치와는 다른 것이었다. 박정희는 육 여사의 아버지 육종관씨 말대로 ‘집안 내력을 알 수 없는’군인이었을 뿐이고 육 여사보다 여덟 살이나 연상이었으며 게다가 이혼남이었다.
더군다나 두 사람의 만남은 전쟁 중, 그것도 국군이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던 1950년 8월 하순 부산에서 시작됐다. 난리판에 군인에게 시집가 아이들을 고아로 만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육 여사는 개의치 않았다.
요절한 정치학자 전인권씨는 인간 박정희를 심리학적 상상력으로 복원해 평전을 낸 바 있다. 평전에서 그는 “육영수는 심리적 고아였던 박정희에게 새로운 인식을 제공했고 사실 육영수야말로 박정희를 정치적 리더로 만든 진정한 장본인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실제로 두 사람의 관계는 겉으로는 육 여사가 순종적이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박정희가 육 여사에 의존했다고 봐야 한다.
미 육군포병학교에서 교육을 마치고 귀국하던 박정희 당시 준장은 1954년 6월 배 위에서 이런 일기를 쓴다.
‘나의 어진 아내 영수, 그대는 내 마음의 어머니이다. 셋방살이, 없는 살림, 좁은 울 안에 우물 하나 없이 구차한 집안이나 그곳은 나의 유일한 낙원이요 태평양보다 더 넓은 마음의 안식처이다.’
이 글에서처럼 박정희는 아내를 어머니처럼, 여신(女神)처럼 대했다.
육 여사는 내조의 정신적 방향이나 임무를 세 가지 면으로 요약해 지켜가려 노력했다고 한다.
첫째, 가정에 근심을 덜어줌으로써 남편에게 일에 충실할 수 있는 정신적 안정을 주어야 한다.
둘째, 남편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구석을 아내가 협조한다.
셋째, 남편의 건강을 살핀다.
이런 그녀가 진정 원했던 것이 청와대 생활을 마치고 시골에서 남편 아이들과 함께 단란하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었음은 자연스럽다. 여사는 삼선(三選)개헌을 묻는 국민투표를 앞둔 1969년 10월14일 국민투표에 대한 감상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감상이랄 게 뭐 있겠어요. 만약의 경우 나야 보따리 싸가지고 훌훌 나가서 가족들과 알뜰하게 살면 그만이지요” 라고 했다.
여사는 생전에 “앞으로 언젠가 이 자리를 물러나게 되면 그때는 진정 즐거움을 느끼며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동족이 쏜 총탄에 맞아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육영수 신화
소설가 남지심씨는 육영수 여사 평전 ‘자비의 향기’서문에서 2006년 8월15일 열린 육영수 여사 32주기 추모식 풍경을 스케치하고 있다.
남씨가 놀란 것은 추모객들 중에 과거 박 대통령과 함께 국정에 참여했거나 현재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은 100여 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2000여 명이 정치와는 아무 상관없는 서민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폭염이 내리쬐는 공휴일 아침에 30여 년 전에 이 땅을 떠난 영부인을 추모하기 위해 모였다.
남씨는 “부모가 자식 곁을 떠나고 자식이 부모 곁을 떠나도 모든 것을 잊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 피를 나누고 목숨을 나눈 사람도 잊고 사는 세태인데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곳에 있었던 영부인을 매년 잊지 않고 찾게 하는 힘인가”라고 묻는다.
정승이 죽으면 조문객이 없어도 정승 집 개가 죽으면 정승에게 눈도장 찍으려는 사람들로 문턱이 닳는 게 권력이다. 그러나 육 여사 추모행렬은 비정하고 허망한 권력의 속성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남씨 말대로 참으로 ‘불가사의한 힘’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또 다른 평전을 쓴 작가 홍하상씨는 “육 여사야말로 국민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일만 골라서 한 가장 정치적인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남편이 시위대를 탄압할 때 학생들을 감쌌고 남편의 정권 연장에도 동의하지 않았으며 늘 가난한 사람들을 만났고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으니 말이다.
과거는 잊히게 마련이지만 육영수 신화는 시간이 갈수록 굳어지고 있다. 생전의 그녀의 삶은 진정한 여성적 리더십이란 무엇인 지를 몸으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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