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월 5일 국내 와인수입회사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오는 5월 7~9일 서울 코엑스 태평양홀에서 열리는 ‘서울국제주류박람회’ 개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서울국제주류박람회는 와인을 비롯해 위스키, 코냑 등 전세계 술을 소개하는 국내 최대 규모 술박람회다.
이날 회의에는 두산(최근 롯데에 인수), 금양, 까브드뱅, 아영, 대유, 길진, 래뱅드메일 등 와인업계 ‘빅 텐(10)’ 대표가 대부분 참석했다. 그러나 회의 분위기는 사뭇 어두웠다. 와인수입협회 관계자는 이 자리에서 “올해 주류박람회가 정상적으로 열릴 수 있을지 회원사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회의를 소집했다”고 말했다. 최근 경기침체와 고환율로 국내 와인시장이 급격히 위축되자 “자금 사정이 어려워 올해 주류박람회 참가를 포기하겠다”고 통보해온 회사들이 ‘빅 10’ 중 3~4개사에 달한다는 게 협회 측의 설명이었다. 또 ‘빅 10’ 중 또 다른 3~4개 회사 역시 “참가 여부를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고 이날 밝혔다.
- 그러자 까브드뱅 유안근 사장이 입을 열었다. 유 사장은 1987년 국내 와인수입이 허용되면서부터 와인비즈니스를 시작한 와인수입업계의 ‘산증인’이다. “햇빛이 눈부신 날이 있듯이 우박이 쏟아지는 날도 있는 법입니다. 지금 와인시장이 다소 어렵다는 핑계로 고객에게 와인을 알리는 노력을 우리 스스로가 등한시한다면 먼 훗날 와인시장에 새날이 올 것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덕분에 회의 분위기는 반전됐고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노력하자”고 참석자들이 입을 모았다는 후문이다.
88서울올림픽 앞두고 1987년 와인시장 개방
당시 11개사 대표 중 현재는 유 사장만 영업
까브드뱅(Cave de Vin) 유안근(56) 사장. 그는 1987년 10월 수입주류업체인 ㈜대유수입상사를 설립, 국내 와인 수입에 물꼬를 텄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정부가 1년 전인 1987년 와인 수입을 허용하자 대유수입상사를 비롯한 11개 회사가 와인 수입면허를 취득했다. 그러나 와인 수입면허를 받은 이들 회사 대표 중 지금까지 와인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사람은 유안근 사장, 단 한 사람뿐이다. 그의 얘기를 조금 더 들어보자. “1987년 10월 1일, 와인 수입 개방 당시 11개의 수입사가 수입면허를 획득해 와인 수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20여년이 지나는 동안 모두 오너가 바뀌거나 회사가 문을 닫았습니다. 현재 국세청에 등록한 수입회사는 500개가 넘는다고 하는데 지금의 양적·질적 성장을 이루기 위해 초기 업체들이 걸어온 20여년 세월이 그만큼 척박했다는 거죠.”
현재 유안근 사장이 대표로 있는 까브드뱅은 1994년 9월에 설립한 회사. 양적 규모로는 국내 8위 정도 하는 중견 와인수입회사다. 그러나 와인의 품질 면에서는 ‘국내 최고’를 자부한다. 1987년 대유수입상사 설립에 앞서 1년 전에 설립한 대유인터내셔날(지금의 대유라이프)은 ‘세계 최고의 와인잔’이라고 통하는 리델(Riedel) 잔을 국내 독점 수입·판매하고 있다.
그렇다면 1987년 와인 수입개방 당시 그가 처음으로 수입면허를 취득한 대유수입상사는 어떻게 됐을까. 대유수입상사는 유 사장의 경영 실패로 1994년 4월 매각됐다. 대유수입상사는 지금은 주인이 바뀌어 회사명도 대유와인으로 바뀌었다. 매각 당시 대유수입상사는 국내 최고의 와인수입회사였다. 프랑스 보르도 와인 중 판매 1위 브랜드인 무통카데(Mouton Cadet)를 비롯해, 미국 캘리포니아의 로버트 몬다비(Robert Mondavi), 보졸레 누보 와인을 전세계에 알린 조지 뒤뵈프(Georges Duboeuf), 프랑스 부르고뉴의 조셉 뒤랑(Joseph Drouhin), 프랑스 론 지방의 엠.샤푸티에(M.Chapoutier), 호주 린드만(LINDEMANS) 등 기라성 같은 와인 브랜드들을 독점 수입·판매했었다. 그러나 이 와인들을 그는 회사 매각과 동시에 한순간에 모두 잃었다.
커티샥 위스키 취급하다가 결국 회사 매각
“와인에만 전념하자” 1994년 까브드뱅 세워
그가 ‘눈물을 머금고’ 대유수입상사를 매각하게 된 것은 ‘위스키시장’에 발을 담갔기 때문이다. 1987년 와인에 이어 1988년 국내에 위스키 시장이 개방되자 그는 스카치 위스키 ‘커티샥(Cutty Sark)’을 들여와 국내 판매하기 시작했다. 당시 위스키와 와인 매출은 8대 2 정도로 위스키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러나 국내 대기업과 글로벌 위스키 회사의 국내 현지법인들이 잇따라 진출함에 따라 국내 위스키 시장은 금방 ‘레드오션(경쟁이 치열한 시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위스키 비즈니스 경험이 짧았던 유 사장은 사채까지 끌어들여 위스키 시장 공략에 나섰지만 외상채권이 비정상적으로 늘어나 결국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대유수입상사를 매각하기에 이른다. “대학 졸업 후 약 10년간 대한해운공사(대한선주 전신)에 몸담았는데 그때 샌프란시스코 주재원으로 3년 정도 일하면서 와인에 처음 눈을 뜨게 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만든 회사가 대유수입상사이고요. 그런데 8년 만에 이 회사가 문을 닫았습니다. 와인에 주력하지 않고 외도(위스키 비즈니스)를 한 잘못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와인 사업에만 주력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1994년에 까브드뱅을 설립했다. 까브드뱅은 ‘와인 양조장’이라는 뜻이다. 이후 그는 대유수입상사 시절보다 더 고급 와인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호주 최고의 와인 펜폴즈(Penfolds), 이탈리아 안젤로 가야(Angelo Gaja·지금은 신동와인이 취급), 그리고 25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오스트리아의 와인잔 리델 등을 새 파트너로 삼았다.
그러나 리델 잔은 가격이 워낙 비싸 특급호텔에서도 구매를 꺼릴 정도였다. 시중에 흔했던 크리스털 커팅 와인잔이 당시 1만원 정도였는데 리델 잔은 비싼 것이 한개에 10만원이 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델 잔은 전세계가 주목한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판매에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세계 최고가(最高價) 와인 잔인 리델 잔의 국내 대중화에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은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이다. 2000년 4월에 열린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현장에서 김 위원장이 리델 잔에 프랑스 최고급 와인(샤토 라투르·Chateau Latour)을 따라 김대중 전 대통령과 건배를 하는 장면이 국내는 물론 전세계에 타전되면서 리델 잔의 인지도가 급속도로 올라간 것이다.
와인 선물거래도 처음 시도해 짭짤한 재미
“개인도 맡길 수 있는 보관창고 짓고 싶다”국내 와인 수입 역사의 ‘산증인’답게 유 사장이 국내 최초로 시도한 와인유통 비즈니스는 한 손으로 다 꼽지 못할 정도다. 그는 1996년부터 선물환(先物換)거래로 와인을 사기 시작했다. 이는 병에 담기 전인 오크통 보관 단계에 있는 와인을 미리 구매하는 것(입도선매·立稻先賣)으로 와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없이는 시도할 수 없는 와인구매 방법이다. 유 사장은 1999년 IMF 직후에 국내 와인 시장이 위축되어 선물 거래로 사두었던 와인을 영국, 미국에 되팔았는데 순이익만 4억~5억원을 남겼다고 한다. 말하자면 수입대금을 치르고 외국에 보관 중이던 와인을 국내에 들여오지 않고 외국에 ‘재수출’해 돈을 톡톡히 번 셈이다.
와인 수입 1세대인 유 사장은 앞으로 와인 보관업에 더 열정을 쏟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은 사계절이 뚜렷해 와인 보관이 어렵습니다. 2001년 용인에 1만4500㎡(약 4400평)의 나대지를 사두었습니다. 이곳에 항온·항습 설비를 갖춘 와인보관창고를 만들어 특급호텔, 와인 수입사는 물론 개인도 자신들의 와인을 보관할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당장은 자금 여력이 없어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터뷰를 끝내면서 그가 평소에 즐겨 마시는 와인이 궁금해졌다. 와인수입사 대표인 만큼 늘 비싼 와인만 마실까. 물론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었다. “첫 직장에서 샌프란시스코 주재원 근무 당시 샤도네이(Chardonnay) 화이트 와인을 맛보고는 ‘이것이 정말 와인의 매력이구나’ 싶었습니다. 지금도 편안한 자리에서는 캘리포니아 샤도네이를 즐겨 마십니다. 물론 값싼 와인은 아니겠지요. 5만~7만원 정도. 와인메이커의 메시지나 혼이 느껴지는 와인을 말하는 겁니다.”
| 와인잔의 명품 ‘리델’ |
모차르트와 같은 해에 탄생, 250년 역사
종류·품종별 모양 제각각으로 수백 가지
“리델은 기능과 예술성을 완벽하게 살린 최고의 글라스이다. 이 글라스들은 훌륭한 와인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데 더 이상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아이템이다. 이 특별한 글라스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세계적 와인평론가 로버트 파커(Robert M. Parker)가 한 말이다. 아무리 좋은 와인도 잔을 제대로 갖춰 마시지 못하면 제 맛을 즐길 수 없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리델 회사에서는 전세계를 돌며 ‘와인잔 테이스팅’ 행사를 하며 와인잔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를 하고 있다. 가령 같은 와인을 각기 다른 모양과 크기의 와인잔에 따른 뒤 향을 맡고 맛을 보면 향과 맛이 다르다는 설명이다.
리델 측에서는 “사람의 혀에는 쓴맛, 신맛, 단맛 등을 느끼는 부위가 다르기 때문에 와인이 입안의 어느 부분에 먼저 닿느냐에 따라 와인 맛이 다르게 감지된다”며 “입구가 넓게 벌어진 모양의 글라스는 자연적으로 고개를 숙여 입안으로 한꺼번에 많은 양이 들어오지 않게 하기 때문에 레드 와인을 마시기에 적합하며, 반대로 입구가 좁은 글라스는 와인이 자연스럽게 입안으로 흘러 들어올 수 있도록 목을 뒤로 젖히게 되므로 화이트 와인용으로 적합하다”고 말하고 있다. 유안근 사장의 설명은 조금 더 전문적이다. “와인을 글라스에 따르는 순간부터 밀도와 비중의 차이에 따라 여러 층의 다양한 아로마(Aroma·향)가 글라스를 채우게 된다. 이때 나무 향이나 알코올 향은 글라스 바닥으로 내려 앉고 야채나 흙냄새, 미네랄 등의 입자는 글라스의 중간 부분을 채우게 된다. 또한 꽃 향기와 과일 향은 글라스 입구 쪽에서 가장 활발하게 느낄 수 있는데 이러한 다양한 아로마를 와인 글라스에 층별로 앉히는 것이 와인 글라스의 크기와 모양이다.”
모차르트가 태어난 해인 1756년에 처음 세상에 나온 리델 잔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그 종류도 다양하다. 보통 와인잔은 크기에 따라 작은 것은 화이트 와인, 큰 것은 레드 와인용 잔으로 구분되는데 리델 잔은 포도 품종에 따라 모양과 크기가 각각 다르다. 따라서 같은 화이트 와인 잔이라 하더라도 포도 품종이 ‘리슬링’ ‘샤도네이’ ‘소비뇽 블랑’이냐에 따라 리델 잔 모양이 모두 다르다. 레드 와인 잔은 그 종류가 더 많다.
/ 박순욱 차장대우 swpark@chosun.com
사진 = 이상선 조선영상미디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