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핫이슈
인격과 자아의 성장·발달을 이야기할 때 흔히 드는 우화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사람이면서도 다른 거다. 지혜를 쌓고 인격을 수양하면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고, 아집이 쌓이고 욕심이 늘면 어제보다 못한 내가 되는 것이다. 사상이나 이념도 마찬가지다. 시공을 초월한 절대진리의 사상과 이념 따윈 없는 거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미국 작가 엘렌 글래스고의 말이 그런 뜻이다. “한 번도 현대적인 때가 없었을 만큼 낡은 이념이 없고, 결코 낡은 게 되지 않을 만큼 현대적인 이념도 없다.” 그런 이념의 틀에 스스로 얽매여 세상의 변화를 못 보는 인간이 늦될 뿐이다.
요즘 황석영 논란의 중심에도 그런 인간의 늦됨이 있다. 좌파 지식인이 큰 맘 먹고 우파 정부 좀 돕겠다고 나섰는데 뭐가 논란거린지 모르겠다. 왼쪽이건 오른쪽이건 국가 잘되고 국민 잘살게 하는 게 이데올로기의 존재이유일진대 양쪽 진영 모두 앙칼진 비판들을 쏟아내니 이상한 노릇이다.
왼쪽에선 ‘변절자’란 호통이 벼락친다. 식민지 시대 부역 작가들에 견주는 소리까지 들린다. “한 번 돌무더기는 영원한 돌무더기”라는 (보수단체서 많이 듣던) 논리가 그들 것이었던가. 대선 때 비판했다고 국민투표로 당선된 대통령이 임기 마칠 때까지 사사건건 반대하고 발목 잡아야 한다는 게 그들의 ‘진보적’ 생각인가. 참으로 딱한 사람들이다. ‘유라시아 평화열차’라는 깜짝 이벤트가-그 말을 듣고 대통령이 무릎을 쳤든 말든-황석영의 생각대로 남북 화해의 물꼬를 틀 수 있다기보다 남북관계가 진전됐을 때나 가능한 일이란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가 말하는 ‘알타이 연합’이니 ‘몽골+2코리아’ 계획도 중국 눈치 안 볼 수 없는 우리에게 얼마나 실현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다. 하지만 인민을 굶기는 인민 낙원, 노동자를 억류하는 노동자 천국, 세습 3대를 바라보는 민주주의공화국에 무조건 양보만을 요구하며 그의 계획을 코미디라 비웃는 왼쪽 사람들보다는 훨씬 진취적이고 생산적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딸 게 아닌가. 적어도 재야와 정부 사이의 소통 창구는 열어놓았잖느냐 말이다. 그게 바로 ‘중도실용’인 거다.
더 참을 수 없는건 오른쪽 반응이다. 노벨상을 노린 ‘위장 전향’이라는 건 애교에 속한다. 뭐,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고 그렇게 해서 노벨상을 탈 수 있다면 그것도 손해나는 일은 아닐 터다. 하지만 정권을 창출하는 데 애쓴 우파 문인들은 놔두고 어찌 좌파 문인을 전용기에 태우느냐는 데는 정말 동의하기 어렵다. 결국 자리 보고 도왔단 얘긴가. 그러잖아도 아는 사람만 쓰는 인사로 위기를 자초했던 이 정부다. 지적을 하려면 “하고많은 좌파 문인들 중에 꼭 평소 알고 지내던 황석영이었어야 했느냐”고 물었어야 한다는 말이다.
에피카르모스는 “손이 손을 씻는다”는 명언을 남겼다. 그가 철 지난 이념 대립의 현장인 대한민국에 있었다면 달라졌을 말이다. “왼손이 오른손을 씻는다.” 반대라도 무방하다. 중요한 건 씻는 거지 왼손이냐 오른손이냐가 아니다. 씻으려면 마주 잡아야 한다. 떨어져서 상대 탓만 해서는 양손 모두 깨끗해질 수 없는 것이다.
이훈범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