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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버드 전(前) 미(美)대사의 후회

화이트보스 2009. 5. 26. 15:14

허버드 전(前) 미(美)대사의 후회

입력 : 2009.05.25 22:53

 
이하원·워싱턴 특파원

역사의 진실은 회고록(回顧錄)에서 드러난다는 말이 있다. 최근 2000년대 초반 한국에 근무했던 미국 측 인사들이 잇달아 내놓은 회고록은 그런 면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대한민국이 '좌회전'을 하던 2001년부터 주한 미(美) 대사로 재임한 토머스 허버드(Hubbard)는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그는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한 직후 조지 W 부시(Bush) 대통령의 사과를 강력히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 가장 크게 후회된다고 한미경제연구소(KEI)가 발간한 '대사들의 회고록'에서 밝혔다. 미국이 잘못 다룬 여중생 사망사건이 당시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도 기록했다.

같은 시기 주한미군 2사단장이었던 러셀 아너레이(Honore)도 얼마 전 이 사건에 대한 미국의 대응에 문제가 있었다고 술회했다. 재난(災難) 전문가로 활동 중인 그는 '생존(Survival)'이라는 책에서 이 문제를 언급했다. "여중생 사건 발생 후, 2사단의 입장 발표를 공보담당 소령에게 맡겼는데 이 장교는 사죄하는 태도가 아니라 해명하는 자세를 보였다"고 했다. "이는 결국 한국인들에게 잘못된 메시지를 주게 됐고 전국적인 시위로 이어졌다"며 "그때서야 내 실수를 깨달았지만 너무 늦었다"고 자책했다.

후회가 없는 인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이기에 늘 실수하기 마련이고 이는 후회로 이어진다. 그러나 한반도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주한 미 대사나 주한미군 고위 지휘관의 후회는 일개 민간인의 반성과 같을 수는 없다.

미 행정부 관계자들은 2002년 여중생 사건이 발생했을 때 당시로서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안보를 위한 훈련 중에 시야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생했다는 법적인 측면을 중시했다. 이 사건이 가져올 미래의 파장보다는 당시의 상황을 합리화하는 데 주력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대응은 미숙하다 못해 어리석었다는 것이 드러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를 당시의 주한 미 대사와 미군 2사단장이 7년 후에 발간된 회고록에서 입증한 것이다.

최근 버락 오바마(Obama) 미 행정부가 북한을 다루는 정책은 이런 상황을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다. 오바마 행정부는 부시 전 행정부와는 다른 정책으로 쿠바·이란·시리아 등과 화해하고 있는데 북한만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비판한다. 북한만이 대화에 응하지 않고 있다며 북한문제 우선순위의 '하향(下向)조정'을 합리화하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에도 북한이 상황판단을 잘못하고 있다는 평가에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고슴도치처럼 모든 침을 곧추세우고 2차 핵실험까지 감행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략은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북한 문제를 뒤로 제쳐놓은 채 북한의 자기파멸적 행위를 지켜보는 것이 최상책인지에 대해서는 재고(再考)해 봐야 한다. 부시 전 행정부의 북한을 무시하는 정책이 결국 북한이 2006년 핵실험을 하도록 자극했다는 일각의 평가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안보 정책 담당자들도 머지않아 회고록을 쓰게 될 것이다. 그때 "2009년 5월에 북한 문제를 심도 있게 검토했어야 했다", "좀 더 인내심을 갖고 끈질긴 대화노력을 했어야 했다"는 후회가 기록되지 않기를 기대한다. 북한이 핵탄두를 장착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전 세계를 위협하는 시나리오를 상상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돌파구를 찾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