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닷컴 버블 붕괴 예측' 실러 교수의 세계 경제위기 진단
"집 사두면 무조건 오른다? 그런 스토리는 이미 과거지사"
IT·주택 버블 일으킨 것도우리 주변의 성공 스토리들…
경제 회복하기 위해선자신감 되찾을 '이야기'가 필요
지난 2000년 미국 주식시장은 후끈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3월10일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 지수가 5048로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그 즈음 미국 서점에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 한 권이 선보였다. 바로 <비이성적 과열(Irrational Exuberance)>. 이 책의 서문은 이랬다. "지금 주식시장은 투기적 버블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사람들은 주식이라는 주문(呪文)을 외우며 돈을 쏟아 붓고 있다."
불길한 예측은 한달 여 만에 현실이 됐다. 나스닥 지수는 4월14일 3321를 기록, 최고점 대비 30% 이상 폭락했다. 이른바 '닷컴 버블'의 붕괴를 알리는 서막(序幕)이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2005년 이 책의 개정판이 나왔고, 서문 내용은 이렇게 바뀌었다. "미국과 전 세계에 과거 어느 때보다 강한 주택 투기 열풍이 뿌리내리고 있다. 사람들은 집값이 계속 오르면 나중엔 집을 결코 사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해 집을 사는데 몰입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버블의 징조이며, 궁극적인 파멸을 부를 수 있다." 누구도 예언을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2년 뒤 미국 주택시장 버블 붕괴에서 비롯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전 세계 경제를 파국으로 몰아갔다.
- ▲ ‘불길한 예언자’란 별칭과 달리 로버트 실러 미 예일대 교수는 Weekly Biz와 가진 인터뷰에서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는“도요타가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 때 모두 미쳤다고 했지만, 그들은 사업을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잘됐다”면서“그것이 바로 경제를 움직이는 야성적 충동의 힘”이라고 말했다. /마크 다이 포토저널리스트
이 책의 저자가 바로 로버트 실러(Schiller·63) 미 예일대 교수다. 그가 쓴 이 책은 2000년 이코노미스트지(誌)가 그 해 '최고의 책'으로 선정했고, 뉴욕타임스(NYT)는 "실러 교수가 월가의 구루(guru) 지위에 올라서게 됐다"고 평가했다. 그에겐 종종 '카산드라(Cassandra·불길한 예언을 하는 사람)'란 음울한 별칭이 따라붙는다. 두 번의 대형 버블 붕괴를 정확히 예측했으니 틀린 말도 아니다.
그는 미국을 대표하는 주택가격 지수인 '케이스-실러지수'를 개발한 부동산 석학(碩學)이지만, 주식과 금융 분야에서도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FT(파이낸셜타임스)가 지난 3월 그를 '세계 경제를 구원할 글로벌 리더 50인' 중 한 명으로 선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 그가 최근 '이야기(story) 경제론'이란 독특한 이론을 주장해 경제계에서 큰 주목을 끌고 있다. Weekly BIZ는 지난 1일 미국 뉴헤이븐(New Haven)에 있는 예일대를 찾아가 실러 교수와 1시간30여분 동안 단독 인터뷰했다. 그는 경제학에 심리학을 접목시켜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냈다. 요약하자면 이랬다.
"거시 경제의 상승과 하락은 근본적으로 이야기에 의해 일어난다. 이해하기 쉽고 인간적 흥미를 자아내는 이야기들은 전염되면서 경제를 움직인다. IT 버블과 주택 버블을 낳았던 것도 이야기였다. 빠르게 세계화되는 경제에서 내 주변의 친구와 이웃, 가족 모두가 성공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거대한 이야기가 통째로 무너졌다. 경제가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을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 불행히도 아직은 그것이 없다. 이번 경기 침체가 장기화될 것이라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지금 주식을 사야 할 때인가"라는 질문에 "기업 수익 대비 주가수준이 역사적 평균 수준으로 떨어지긴 했지만, 세계 경제가 여전히 위험하기 때문에 주식을 많이 보유할 때인지 확신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과거 여러 차례 버블 붕괴 때의 경험으로 보면 주가는 과도하게 하락(overshooting)하곤 했어요. 저는 앞으로 더 나쁜 뉴스들이 나오면서 주가를 더 떨어뜨릴 수 있다는 점을 여전히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 대가(大家)는 특히 주택시장에 대해 비관적이었다. 그는 "미국 주택시장이 회복하는 데는 5년 이상이 걸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주택시장의 문제도 예의 '이야기론'을 통해 설명했다.
"지난 10년 동안 사람들은 세계 경제가 급속하게 성장해서 땅이 부족하고, 주택을 사야 할 때라는 생각을 가졌죠. 사람들의 머릿속에 이런 그림이 있었죠. '모든 가격은 오른다. 유가가 오르고, 원자재도 오르고…'. 주택을 포함해서 모든 것이 부족해지고 있다는 아주 단순한 생각을 하게 됐던 겁니다. 일종의 '골드 러시(gold rush)' 같은 것이었죠. 사람들은 그래서 주택도 사고 싶어했어요. 그런데 이제 우리는 모든 가격이 떨어지는 걸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앞으로 어디로 갈지 모르겠지만, 아마 예전과 같은 느낌을 다시 갖게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는 "투자의 일환으로 주택을 사는 것은 매력적이지도, 현명하지도 않다"고 부연했다. "과거를 살펴보면 주택 투기보다는 토지 투기가 더 많았습니다. 집은 시간이 갈수록 가치가 떨어지고, 관리도 해야 하고, 시간이 지나면 유행에도 뒤떨어집니다. 결국에는 그걸 부수고 싶어집니다. 그게 좋은 투자가 되겠어요? 투자 수단으로 집을 사는 것은 마치 100대의 새 차를 사서 창고에 집어넣고 보관했다가 20년 후에 파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과연 현명한 생각인가요? 평범한 사람이 1만 에이커의 땅을 사는 것은 어렵겠죠. 그러나 사람들은 집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고, 나도 투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국 그건 아마추어들의 게임이 되고 마는 겁니다."
뉴욕에서 자동차로 2시간쯤 걸리는 코네티컷주(州) 뉴헤이븐의 예일대 캠퍼스. 지은 지 100년이 넘은 건물이 많아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로버트 실러 교수의 연구실은 캠퍼스 내 코웰재단경제연구소 1층 출입구 쪽에 있었다. 20㎡ 남짓한 자그마한 방에서 그는 비서와 같은 책상을 쓰고 있었다.
"야, 성, 적…", "로, 버, 트, 실…". 인터뷰에 앞서 그의 저서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의 한국어판을 건넸더니, 그는 더듬더듬 우리말로 제목을 소리 내어 읽었다. 깜짝 놀라, "한국어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몇 년 전 제자들 초청으로 한국에 며칠 머무르면서 심심풀이로 배웠다"고 말했다.
세계 경제 회복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 미국 주택시장이고, 실러 교수는 이 분야에서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권위자이다. 기자는 그에게 주택시장에 대한 질문을 집중적으로 던졌다.
- ▲ 로버트 실러 미 예일대 교수
■ "주택시장, 더 떨어질 것… 다시 오르려면 5년 이상 걸릴 것"
―미국 주택시장이 바닥을 쳤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어떤 긍정적인 신호라도 있나요?
"글쎄요, 바닥을 친 건지 강한 의심이 듭니다. 주택 가격은 지난 3년 동안 계속 떨어졌지요. 최근엔 정말 빨리 떨어졌어요. 집값 하락은 악화된 시장 심리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개선된 신호가 있느냐고 물었는데, 지난 3개월 동안 소비자 신뢰(consumer confidence)와 주식 가격에서는 그런 신호가 있었죠. 지난 3월 이후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주식 시장이 마찬가지였죠."
그러나 실러 교수는 "당분간 주택 가격은 기껏해야 횡보(level-off)하는 정도이거나 계속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했다. 미국 집값은 케이스-실러지수 기준으로 2006년 4월 이후 32.2%가 하락했지만 아직은 바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설명은 이랬다.
"지금이 살 기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일부에서는 부동산 시장에 뛰어들 때라며 열광하고 있다는 인상도 받아요. 만약 그런 사람이 충분히 많다면 다시 붐(boom)이 시작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그렇게 되기 힘들다고 생각해요. 의심스러워요.
역사적으로 주택시장은 주식시장과 강력한 상관관계가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대공황
지금도 비슷한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많은 주택이 압류당하고 있고, 완공된 주택은 팔리지 않아서 엄청난 재고(在庫)로 남아있어요. 이런 것들이 주택시장에 후유증을 낳고 있어요. 두 시장의 이야기(story)는 전혀 속성이 다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주택시장이 당분간 계속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에요."
―그럼, 앞으로 주택시장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요?
"많은 사람이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 결정을 바꾸고 있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은 집을 소유할 것인지, 세 들어 살 것인지 고민하고 있어요. 대부분은 집을 언제 사고팔아야 할지 고민할 필요 없이 세 들어 사는 것도 좋다고 결정하고 있어요. 집을 살 필요가 있나? 은행 대출을 받아야 하고, 빚을 못 갚으면 집을 압류 당해서 창피당할 위험도 있고, 왜 그런 것 때문에 귀찮아져야 하나? 이런 생각을 갖고 있죠. 그리고 그게 수요를 줄이게 됩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부동산 투자로 골치를 썩이려 하지 않아요. 부모들의 집을 떠나 집을 사는 것이 현명한지 다시 생각해 보고는 그냥 부모들과 함께 사는 것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즉 그들에겐 부동산 투자에 대한 흥분이 없어요. 5년 전만 해도 달랐어요. 당시 부모와 함께 사는 젊은이들은 이렇게 생각했어요. '나는 성인이 되고 싶다. 집을 나가서 나의 길을 가고 싶다.' 집을 사는 것은 그렇게 하는 하나의 방법이었죠.
그러나 지금은 만약 나의 길을 가고 싶다면 자신의 일에 더 집중하거나, 박사 학위를 따든지 해야 하지 않을까요. 주택을 사는 것은 더 이상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택시장에 들어오지 않을 겁니다. 신뢰 지수가 높아져도 갑작스러운 변화를 보기는 어렵습니다. 수요가 갑자기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실러 교수는 "2000년대 들어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많은 나라가 동시에 주택 버블을 겪었다"면서 그 원인을 '중국과 인도, 그리고 다른 나라들의 급속한 발전'에서 찾았다. 그는 "감각 있는 사람들은 빨리 부자가 됐고, 그들에겐 '부동산을 사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말했다.
실러 교수의 지적은 지난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 투자자들의 심리와 궤를 같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강남 불패(不敗)','집은 무조건 사두면 오른다'는 믿음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실러 교수는 "우리가 다시 예전과 같은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 주식 시장, PER는 정상… 불확실한 경제 변수
주식 전문가이기도 한 실러 교수는 최근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몇 달 전보다 주식 시장을 덜 비관적으로 본다"고 말해 비관론을 접은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달랐다.
―교수님은 저서 〈비이성적 과열〉에서 PER(주가수익비율·주가를 1주당 순이익으로 나눈 것으로 높을수록 주가가 고평가됐음을 의미)가 높을수록 증시 붕괴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는데, 지금 미국 증시의 PER는 어느 수준인가요? 역사적 평균보다 높은가요?
"저는 컴퓨터를 이용해서 10년 평균 PER를 산출하는데 그동안 주가가 많이 떨어져서 지금은 거의 장기 평균 수준이에요. 15가 약간 넘는 정상 수준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 상황이 나빠지고 있어서 별로 안전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주택시장에도 비슷한 용어가 있는데, PRR(Price Rent Ratio·집값 대비 임대료 비율)입니다. 그동안 주택가격이 많이 떨어져서 지난 30년 동안과 비교하면 약간 높은 정도에 불과합니다. 건축비 대비 집값 비율(price construction cost ratio)도 계속 떨어지고 있어요. 몇 년 전과 달리 우리가 더 이상 터무니없이 집값이 높은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은 것은 맞습니다."
―다우지수가 1만5000포인트를 넘을 것으로 생각하세요?
"1999년 어떤 TV 쇼에 출연해서 내가 했던 질문이 생각나네요. 그 쇼에 '다우 3만6000'이란 책의 저자들도 함께 출연했죠."
―3만6000이라고요?
"(웃음) 네, 그래요. 책이 그 당시 막 나왔는데, 그들에게 물었죠. '혹시 책 제목을 바꾸기에는 너무 늦었나요? '다우 1만5000'은 어때요?'라고 했지요. (웃음) 분명히 장래에 그런 일(3만6000포인트 회복)이 일어날 겁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꽤 먼 얘기죠."
■ "경제는 야성적 충동과 자신감, 스토리가 중요"
실러 교수는 최근 행동경제학자이자 200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 애컬로프(Akerlof) 미 U.C.버클리 교수와 함께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이란 책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실러 교수는 경제를 움직이는 핵심 요인으로 야성적 충동과 자신감, 이야기를 꼽았다. 이 세 가지 요소는 긍정적으로 발현되면 '기업가 정신'으로 이어져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반면, 자신감이 지나치면 야성적 충동은 투기 붐으로 연결된다.
야성적 충동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원래 2000년 전 '스피리투스 애니멀리스(spiritus animalis)'란 라틴어에서 나온 말이에요. 사람을 움직이는 활기찬 정신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이 말을 근대적 의미로 처음 쓴 인물이 바로 존 메이너드 케인스(Keynes)예요. 그가 1936년에 쓴 <고용, 이자, 화폐의 일반이론>에서 처음 등장했죠. 그는 당시 야성적 충동이 사람들로 하여금 비즈니스를 시작하고, 직원을 고용하고, 돈을 소비하도록 움직이는 정신이라고 말했죠. 그런데 그는 이 충동이 경제 이론으로는 분석하기 힘들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그건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불확실한 것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와 관련되기 때문이죠.
이코노미스트들은 경제를 확률이나 숫자로 설명하고 싶어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확률, 저런 일이 일어날 확률 말이죠. 그리고 우리는 그런 확률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사실 우리는 미래에 대해선 정말 무지합니다. 그게 근본적인 문제인 거죠. 만약 사람들이 완벽하게 합리적이라면 무력해져서 아무런 일도 벌이려 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사업을 시작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정말 열심히 하려고 하겠지만, 장차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불확실한 게 너무 많아요. 경제가 좋아질지,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 그 어떤 것도 상상할 수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일을 벌입니다. 바로 야성적 충동 때문입니다."
그는 도요타(Toyota) 자동차의 사례를 들었다. "도요타가 1930년대에 설립됐을 때, 사람들은 '미친 것 아니냐'고 생각했죠. 이미 자동차 산업은 미국과 유럽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들은 사업을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잘 됐어요. 이해가 안 되죠. 만약 그들이 합리적이었다면 사업을 시작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확인하기 힘들고 예기치 못한 야성적 충동의 움직임입니다."
―그런데 요즘 기업들은 야성적 충동의 기반이 되는 자신감을 잃은 모습 아닙니까?
"음~. 우리는 대공황 이후 처음으로 자본주의의 충격을 목격했습니다. 그게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요? 자신감이 이토록 많이 흔들렸던 적은 없어요. 이번 경기 침체의 영향은 일반 대중보다는 특히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더 강력해 보입니다.
기업가가 아닌 일반인들은 대부분 집과 직장을 잃지 않았고, 주식도 많이 갖고 있지 않아요. 많은 사람이 두려움은 있지만, 상처가 크지는 않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은행이나 연준(FRB)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릅니다. 위기는 일반인에게는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죠. 이슈가 뭔지 이해를 잘 못하죠.
하지만 사업가들은 걱정이 많습니다. 그들은 은행이 적절한 자본을 갖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게 불확실하다는 겁니다. 사업가들이 불안해하고 돈을 안 쓰면 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칩니다. 은행 대출과 IPO(기업공개) 시장이 거의 죽어 있어요. 비즈니스 자신감이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럼 야성적 충동이 회복될 가능성이 있을까요?
"경제는 이야기에 의해 움직입니다. 한때 인터넷 버블과 커뮤니케이션 혁명에 대한 스토리가 있었죠. 그건 정말 생생한 이야기였죠. 모든 사람이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 눈으로 봤고, 우리의 일상은 전자제품에 둘러싸여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그건 호경기의 이야기가 됐죠.
그런데 그게 최근 불황 이야기로 대체되면서 사람들은 대공황을 말하기 시작했어요. 모두 두려움에 빠졌죠. 그런데 일단 대공황 스토리는 사라진 것처럼 보이고, 사람들은 예전보다 걱정을 덜 하고 있어요. 그럼 낙관적인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오바마(Obama) 스토리가 있는데,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을 고무시키는 이야기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걸로 충분한지는 자신이 없어요. 저는 다음 이야기가 무엇이 될지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중국의 부상(浮上)도 낙관적인 스토리가 되지 않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지금이 중국의 시대라고 말하는데,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중국은 뭔가를 계속 발견해 왔어요. 경제 성장에 해를 끼쳤던 정치 체제에서 벗어났고, 수천 년 동안 대단한 문명을 이뤄냈죠. 개인적으론 중국의 부상을 기대하고 있어요. 지금의 위기도 중국을 막지는 못할 겁니다. 뭔가를 이루려면 50년쯤은 걸리겠지만 중국은 계속 전진할 겁니다.
나는 과학과 발견을 좋아해요. 지금 중국과 다른 아시아 나라들의 새로운 발견을 기대하고 있어요. 금세기는 이들 나라의 수십억 사람들이 감춰뒀던 잠재력을 발휘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 얘기는 미국과 독일이 위협받는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좋은 뉴스라고 생각해요. 살아 있어서 신나는 시대입니다.(It's great time to be alive.)"
―좋은 이야기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요?
"예. 맞아요. 자본주의의 좋은 점은 인간의 공격 본능에 배출구를 제공한다는 것이죠. 누굴 다치게 하는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본래 공격적이에요. 그러니 비즈니스 세상에서 서로 싸우도록 해보자는 겁니다. 물론, 다치는 사람은 없어요. (웃음)"
그러나 실러 교수는 펀더멘털에 문제를 일으킨 2가지 사건, 즉 '누적된 주택 재고'와 '자동차 산업의 붕괴'로 인해 사람들이 기존에 갖고 있던 자신들의 삶의 방식이나 생각을 바꾸게 될 것이고 이는 실물 경제 회복을 더디게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 의사 결정의 변화라고 할 수 있죠. 지금 사람들은 저축을 더 하거나, 새 차를 너무 자주 사면 안 되겠다고 결심합니다. 과거에는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저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지금은 반대가 됐죠.
이번 위기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갖고 있던 기본 가정(假定)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고, 오랫동안 그런 상황이 지속될 겁니다. 결국 야성적 충동의 결핍으로 인해 경제 부진이 생각보다 오래갈 것 같아요. 제가 말하는 야성적 충동이란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가정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사업가가 될 것인가, 시인이 될 것이냐 하는 거죠. 그런데 지금은 시인이 돈을 더 많이 버는 것 같아요. (웃음)"
■ "충동과 자신감 과잉 막으려면 정부 개입해야"
최근 글로벌 위기는 야성적 충동이 최악의 위기를 잉태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실러 교수는 이처럼 야성적 충동이 부정적으로 발현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국가의 적절한 개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정부를 부모(父母)에 비유했다. 부모는 분명한 한도를 정해서 아이들이 야성적 충동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해야 하지만, 그 한도가 너무 엄격해서 아이들의 독립심과 창의성을 해쳐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위기에는 정부의 개입이 반드시 필요한 건가요?
"이번 같은 시기에는 사람들이 부정적인 자기실현적 예언(negative self-fulfilling prophecy)을 하게 되죠. 비즈니스 환경이 좋지 않으니 지출도 안 하고, 투자도 하지 않고, 고용도 하지 않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게 정말 사실이 됩니다. 개인이 이걸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스스로 낙관적이 되겠다고 결정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정부만이 문제를 풀 수 있죠. 지출을 통해 해결할 수 있어요. 자신감이 무너지기 전에 빨리 그런 일을 하면 경제가 앞으로 나가게 할 수 있습니다. 미국 의회가 올해 통과시켰던 경기 부양책 규모는 GDP의 2%였죠. 그건 충분하지 않을 수 있지만, 자신감의 붕괴를 막기에는 충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리적으로 큰 피해를 보지는 않았던 겁니다."
실러 교수는 지난해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미국과 전 세계가 대대적인 경기 부양책과 재정 지출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해왔다. 그는 경기 급등기에는 다른 의미에서 정부의 시장 개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럴 때 정부는 과잉을 막으려고 시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30년 동안 정부가 그런 일을 결코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경제 환경에서 살았죠. 그런데 그건 실수였어요. 지금의 위기는 경제 이론의 과오(過誤)에서 초래된 측면도 있어요. 경제 이론은 '규제 없는 경제'의 완벽함을 지나치게 칭찬했어요. 그들은 야성적 충동의 근본적인 취약성(vulnerabilit ies)을 이해하지 못했던 겁니다. 바로 야성적 충동의 변화에 의한 취약성 말이죠.
자본주의 시스템에 개입하는 정책을 편다는 점에서 오바마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개입이 너무 심하지만 않다면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우리는 여기에서 더 앞으로 나아갈 것이고, 그런 뒤에는 정부가 자본주의 시스템에 덜 개입하는 방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망가진 금융 시스템을 재구축하는 데도 정부가 나서야 하나요?
"세계 각국 정부는 이번 기회를 활용해 자본주의가 더 잘 작동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건 더 나은 자본주의 인프라를 구축하고, 금융을 민주화하는 걸 뜻합니다. 국민을 위해 더 잘 작동하는 자본주의와 위험 관리(risk management)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사실 이번 금융 위기는 위험 관리의 실패가 근본 원인이었죠.
예컨대, 사람들은 분산투자의 원칙을 어겼어요. 사람들은 하나의 도시, 하나의 집에 집중 투자했고, 금융기관들은 그 돈의 90%를 빌리라고 부추겼어요. 그래서, 평생 저축한 돈으로 높은 레버리지 투자를 하게 됐어요.
지금 정부는 눈앞의 위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더 나은 자본주의 시스템을 개발하는 데에도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 "심리학자인 아내에게 가장 큰 도움"
당초 1시간으로 예정했던 인터뷰는 1시간 2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인터뷰 내내 실러 교수는 숫자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도 자신의 이론을 물 흐르듯 펼쳐냈다.
―교수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누구입니까?
"(음~) 준비를 안 한 질문인데, 오바마는 자신의 어머니라고 대답했죠. 저는 심리학자인 아내 버지니아를 먼저 꼽고 싶어요. 저는 항상 그녀와 대화합니다. 다른 사람 중에는 내가 미시간대학 학부에 다닐 때 만났던 심리경제학자 조지 카토나(Katona)가 있죠. 그에게 큰 감명을 받고, 심리학 공부를 하게 됐어요. MIT대 은사이신 로버트 소로우(Solow)와 프랑코 모딜리아니(Modigliani) 교수도 있어요."
늘 예언을 적중시켰던 그였지만, 혹시 틀린 예측을 한 적은 없었을까.
"글쎄요, 저는 항상 예측도 헤지(hedge)하려고 노력하죠….(웃음) 음~ 아마 분명히 있었는데…. 그래요, 유가(油價)예요. 저는 유가가 그렇게 급등했다가 떨어질지는 몰랐어요. 조금 놀랐어요."
―혹시 최근에 읽었던 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 있습니까?
"미국 작가인 에드워드 벨라미(Bellamy·1850~1898)의 〈뒤를 돌아보면서(Looking Backward)〉'라는 책을 최근에 읽었습니다. 책은 1887년의 시점을 기준으로 2000년까지 미국 사회의 달라지는 모습을 상상해서 쓴 소설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미국이 자본주의를 포기하고, 사회주의를 택해 사회주의의 낙원이 될 것으로 그렸죠. 신용카드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나오기도 하지요."
인터뷰가 끝난 뒤 그는 사진작가의 요청으로 10여분 동안 다양한 포즈를 취하면서도 결코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는 사진 찍을 때 '치즈~'를 한국에서는 어떻게 부르냐고 묻기도 했다. 환한 웃음만큼이나 희망적인 이야기들을 그가 찾아내길 바라면서 그의 방을 나왔다.
◆ 로버트 실러는 누구
美최고 권위 주택 지수 '케이스-실러지수' 개발
경제학에 심리학 접목해 행동경제학 새 지평 열어
미국 미시간대를 졸업한 로버트 실러(Robert J. Schiller) 교수는 MIT(매사추세츠공과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36세에 예일대 경제학과 교수가 됐다.
거시경제와 금융, 리스크 관리 등을 전공한 그는 1981년 'American Economic Review'에 게재한 논문을 통해 당시 경제학의 주류였던 '효율적 시장 모델' 이론에 반기를 들면서 처음 주목받았다. 그는 1987년 미국의 가장 권위 있는 주택가격 지수로 인정받는 '케이스-실러지수'를 개발하면서 학자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심리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1991년 이후 리처드 탈러(Thaler) 시카고대 교수와 함께 전미경제연구소(NBER)의 행동금융학 워크숍 프로그램을 주도하면서 경제학에 새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실러 교수는 뉴욕타임스나 월스트리트저널 등에 칼럼을 꾸준히 게재하고, 1990년 이후 8권의 책을 내는 등 왕성한 저작 활동도 하고 있다. 1991년엔 〈매크로마켓(Macro Market)〉이란 책으로 폴 새무얼슨상을 수상했다. 2000년 3월 발표된 〈비이성적 과열〉은 행동경제학 이론을 바탕으로 닷컴 버블 붕괴를 정확히 예측해 '현대판 경제학의 고전'(이코노미스트지)이란 찬사를 받았다. 이 책이 나온 뒤 실러 교수는 세계적인 석학(碩學)의 반열에 올랐고, 이후 2005년 부동산 버블 붕괴마저 예측해 우울한 예언자란 별칭을 얻게 됐다. 올해 초 금융경제학 발전 공로로 '도이체방크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