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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5,895m 킬리만자로에

화이트보스 2009. 9. 5. 22:21

표범은 없고, 고독한 나를 발견하다
체감 영하 10도 별 쏟아지는 새벽
5,149m 마웬지산 너머 장엄한 일출
최고봉 우후루봉 한편엔 만년설
해외기행 - 김세준 기자, 아프리카 5,895m 킬리만자로에 올라
글 김세준 기자 [sjkim@joongang.co.kr] 사진 김세준·이기평

카랑가캠프에서 바라본 킬리만자로의 밤은 별이 한 움큼씩 떨어진다. 아련한 텐트의 불빛이 정감있게 다가온다.

_세븐 서밋(Seven Summit)

딕 배스는 미국 텍사스에서 석유회사를 경영하며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 옆에 미국 최대 규모의 스키리조트 ‘스노버드’를 건설한 굴지의 사업가였다. 1985년, 그는 지구의 최고봉 에베레스트(8,850m) 정상을 밟음으로써 인류 최초로 개인이 7대륙 최고봉을 모두 등정하는 영광을 안았다.

당시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였던 딕 배스는 산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그러던 그가 워너브러더스의 사장인 프랭크 웰스와 의기투합해 1년에 7대륙 최고봉을 모두 오른다는 야심찬 목표를 세웠다. 그 무엇이 성공한 사업가의 자리도 던져 버리고 폭풍한설 몰아치는 산꼭대기로 나가게 만든 것일까?

딕 배스는 이에 대해 “치열하고 스트레스가 심한 비즈니스 생활에서 등반은 귀중한 해독제이며, ‘세븐 서밋’은 얼마 남지 않은 인생에서 남은 시간을 다 쏟아 부을 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라고 설명한다. 이들이 이룩한 영광의 ‘세븐 서밋’은 1998년 중앙m&b에서 <불가능한 꿈은 없다>는 이름으로 국내에 소개됐다.

최근 들어 국내에서도 해외 트레킹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박성용 전 <월간마운틴> 편집장이 지은 <성공하는 CEO들은 왜 산에 오르는가>에 소개된 CEO들의 공통적 지론은 “개인의 건강뿐 아니라 회사나 조직을 살리는 데 등산만 한 것이 없다”고 입을 모은다.

크라운·해태제과의 윤영달 회장의 경우 산에서 ‘크로스마케팅’이라는 아이디어를 얻어 부도난 회사를 살리는 한편 해태제과까지 인수하는 등 화려하게 재기한 CEO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이처럼 유명 기업의 CEO들도 이제는 국내 산은 물론 해외 고산 트레킹을 통해 삶의 가치나 기업경영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하기 위해 찾고 있다.

7대륙 최고봉은 에베레스트(아시아)·아콩카과(남미·6,960m)·매킨리(북미·6,194m)·엘브루즈(유럽·5,642m)·빈슨매시프(남극·4,897m)·코시어스코(호주·2,230m)이며,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5,895m)도 여기에 속한다. 킬리만자로는 ‘세븐 서밋’ 가운데 아마추어 등산객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산이다. 에베레스트·아콩카과·매킨리를 오르려면 등반장비는 물론 암벽·빙벽기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킬리만자로는 자신의 체력과 의지만 있다면 정상을 밟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산이다. 그러나 해외 고산 등반은 체력만 믿고 나섰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가급적이면 기후와 상황에 맞는 적확한 장비를 갖춰야만 즐겁게 산행을 즐길 수 있다.

김경준 딜로이트컨설팅 부사장은 자신의 저서인 <엄홍길의 정상경영학>에서 “로마군은 병참으로 이겼다”며 “8,000m 히말라야 원정은 장비와 물품을 챙기는 수준에 따라 베이스캠프 생활과 등반의 질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설명한다. 히말라야 원정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킬리만자로 등반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산행 중에는 얇은 옷도 가능하지만 밤에는 기온이 뚝 떨어진다. 킬리만자로 정상인 우후루피크를 등정하는 날은 일출을 전후해 정상에 오르게 된다. 바람이 거셀 경우 체감온도는 영하로 곤두박질치기 때문에 의류를 꼼꼼히 챙겨야 고생을 덜 수 있다.

7월24일~8월4일 대한산악연맹이 주최하고 <중앙일보>와 코오롱F&C가 후원한 청소년 오지탐사대 중 아프리카팀과 함께 킬리만자로와 메루산(4,566m)을 올랐다. 킬리만자로를 말할 때 가장 먼저 케냐와 함께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연상하게 된다.

글 김세준 기자 [sjkim@joongang.co.kr] 사진 김세준·이기평

그러나 킬리만자로 등반은 케냐가 아닌 탄자니아에서 시작하고, 그곳에서 표범이나 하이에나의 그림자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검은 대륙-아프리카. 비록 피부색은 검지만 이들의 영혼은 맑고 깨끗하다.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한결같이 “잠보(안녕이라는 스와힐리어)”라고 인사한다. 비록 어려운 국가경제로 삶이 고달퍼 밤거리의 치안은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아무리 힘들더라도 상대방에게 건네는 인사에서 이들의 때 묻지 않은 맑은 영혼을 엿볼 수 있다.

특히 30여 년간 사회주의 국가였던 관계로 이웃인 케냐보다 순수한 사람들이다. 케냐에서는 사람들이 붐비는 길거리에서 꾀죄죄한 모습의 10대 청소년들이 대낮에도 본드를 마시며 구걸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누구 하나 탓하는 사람이 없으니 안쓰럽고 측은한 기분이 앞선다. 인천공항에서 방콕을 거쳐 케냐의 나이로비공항까지는 17시간30분, 나이로비에서 킬리만자로 등반이 시작되는 탄자니아의 아루샤까지는 육로로 다시 7시간이 소요된다.

서울을 출발해 아루샤까지 꼬박 하루가 걸리는 장거리 여행인 셈이다. 케냐의 국경도시 나망가를 지나 아루샤로 이어지는 길 양쪽으로는 물 한 방울 없는 거대한 고원이 펼쳐진다. 이들의 주식인 옥수수는 말라 비틀어져 있고, 도로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공사로 파헤쳐져 흙먼지가 부옇게 날린다.

아프리카 여행의 첫 모습은 답답함 그 자체다. 그러나 아루샤에서 맞는 첫째 날 아침은 상쾌함으로 시작된다. 이름 모를 새들이 이른 새벽부터 지저귄다. 해발 1,800m의 날씨는 우리의 가을 아침과 같아 공기가 달다. 전날 느꼈던 답답함은 간 곳 없이 사라진다. 아루샤는 탄자니아에서 수도인 도도마, 행정수도인 다레살람에 이은 세 번째 규모의 도시다.

킬리만자로 트레킹이나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된 응고롱고로·세렝게티국립공원의 사파리를 시작하는 거점도시다. 그런가 하면 아프리카 최남단인 케이프타운에서 최북단 카이로까지의 중간지점이 바로 아루샤다. 시내 중심가에는 이를 기념하는 중앙탑이 세워져 있다.

킬리만자로 등반은 산장을 이용하는 마랑구루트(4박5일), 야영하면서 등반하는 마차메루트(6박7일)로 나뉜다. 대부분은 기간이 짧고 산장마다 물과 식자재가 풍족해 일명 ‘코카콜라루트’로 불리는 마랑구루트를 선호한다. 이에 반해 마차메루트는 코스가 길며 고소증세를 더 느끼게 되고 난이도도 높기 때문에 ‘위스키루트’로 불린다.

다만 정상을 오르는 마지막 구간은 마랑구루트보다 짧고 편한 것이 특징이다. 마랑구루트는 마랑구게이트(1,850m)에서 출발해 만다라산장(2,700m)~호롬보산장(3,870m)~키보산장(4,705m) 등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어 동반하는 포터가 몇 명 안 되므로 경비도 적게 드는 이점이 있다.

마차메루트는 마차메게이트(1,800m)를 출발해 마차메캠프(3,100m)~시라캠프(3,840m)~바란코캠프(3,950m)~카랑가캠프(4,200m)~바라푸캠프(4,600m)를 거쳐 정상인 우후루피크에 올라서게 된다. 이 코스는 야영 및 취사장비를 갖춰야 하므로 포터가 마랑구루트보다 서너 배는 더 필요하다.

다만 마랑구루트는 산장의 수용 능력 때문에 하루 입장객을 80명으로 제한하므로 예약이 필수다. 마차메루트는 야영하기 때문에 무제한으로 등반객을 받는다.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마차메루트를 올라가 본다.

글 김세준 기자 [sjkim@joongang.co.kr] 사진 김세준·이기평

우후루피크 정상을 알리는 표지 말뚝▶

_킬리만자로

첫날 = 열대 밀림지대를 지나가므로 쾌적한 가운데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캠프에 다가가면 눈앞에 우후루피크의 모습이 펼쳐진다. 마차메캠프에서는 필히 캠프 사무실에 들러 등록을 마쳐야 한다. 5시간30분 소요. 이튿날 = 흰색의 에버레스트플라워가 흐드러지게 핀 관목지대를 지난다.

사방이 탁 트여 조망이 뛰어나지만 고도를 740m나 올려야 하므로 일부 등산객은 고소증세를 호소한다. 5시간30분 소요. 고소증세가 심한 사람은 40분 거리의 시라산장까지 4륜구동 구급차가 올라오므로, 이곳을 통해 하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후로는 바라푸캠프까지 3일간 오로지 올라야 하므로 유경험자나 치프 가이드와 잘 상의하는 것이 좋다.

응급차는 웨스트킬리만자로의 론도로시게이트에서 호출을 받고 올라오는데, 1시간이 소요된다. 3일째 = 고도는 조금 올리지만 산행 일정 중 가장 힘든 날이다. 특히 라바타워(4,600m)까지 고도를 높였다가 바란코캠프로 다시 내려간다. 고소적응이라는 의미는 있지만 많은 등산객이 이 구간에서 힘을 많이 소진한다.

산행 구간에는 선인장이 곳곳에서 반겨 지루함을 덜어준다. 7시간30분 소요. 4일째 = 절벽을 끼고 오르면서 폭포도 관망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를 가질 수 있다. 낮은 고개를 서너 번 오르내리다 보면 카랑가캠프에 닿는다. 산행 구간 중 마지막으로 식수를 얻을 수 있는 곳이므로 나머지 이틀간의 식수를 여기서 구해 다음 캠프로 올려야 한다.

모든 일은 포터가 해준다. 4시간30분 소요. 5일째 = 사막지대를 걷는 기분이 들 정도로 평지 구간이다. 정상 등정을 위해 이날 밤 출발하므로 점심을 먹고 억지로라도 눈을 붙여야 한다. 이른 저녁을 먹고 다시 눈을 붙였다가 자정을 전후해 누룽지나 라면을 끓여 배를 든든히 채운 후 출발한다.

잠을 자두지 않으면 우후루피크를 오르면서 졸음이 쏟아져 어려움을 겪는다. 6일째 = 자정부터 등반을 시작한다. 스텔라포인트에 도착할 즈음이면 마웬지산(5,149m) 너머로 해가 뜨기 시작한다. 하늘에는 수많은 별이 반짝이지만 일출 직전이어서 기온이 떨어져 체감온도는 영하 10도를 밑돌 정도다.

트레킹을 할 때 하루에 올릴 수 있는 적정고도는 500~600m다. 이날은 약 1,400m의 높이를 올려야 하므로 대다수 등산객에게는 무리가 온다. 가끔 구토를 하는 등반객을 볼 수 있다. 스텔라포인트에서 우후루피크까지는 1시간30분 정도 소요되며 분화구를 둘러가는 코스여서 지루함이 느껴진다.

만년설은 지구온난화의 영향을 받아 정상의 남쪽 사면에만 약간 남아있을 뿐이다. 정상에서 바라푸캠프까지는 급경사면을 따라 3시간을 내려와야 하며, 여기서 늦은 아침을 먹고 음웨카캠프(3,100m)로 다시 하산하면 킬리만자로에서 마지막 야영을 하게 된다. 이날의 총 산행시간은 14~15시간으로 체력소모가 심하기 때문에 체력관리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음웨카캠프는 킬리만자로 야영지 중 가장 분위기가 뛰어나다. 맥주와 음료수 등도 판매하고 쾌적한 공간을 제공해 등반의 피로를 풀기에 좋다. 7일째 = 음웨카캠프에서 서너 시간 밀림지대를 내려오면 산행의 종착지인 음웨카게이트(1,800m)에 도착한다. 음웨카루트는 야영하는 등산객의 유일한 하산 코스로, 거꾸로 올라갈 수는 없고 물자 보급을 위한 포터들만 통행이 가능하다.

이곳에서 하산신고를 마치면 비로소 우후루피크를 등정했다는 증명서를 발급받게 된다. 등정 증명서는 가이드가 정상을 밟은 사람에 한해 공원 사무실에서 발급받아 사인을 한 후 나눠준다. 수년 전까지도 금전 거래를 통해 등정 증명서를 구할 수 있었으나 최근에는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글 김세준 기자 [sjkim@joongang.co.kr] 사진 김세준·이기평

_메루

메루산을 등반하기 위해서는 모멜라게이트에서 총을 휴대한 레인저와 동행해야 한다. 아루샤국립공원 내에 있어 갑자기 출몰하는 버팔로로부터 인명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 근무하는 레인저의 총은 저마다 다르고, ‘과연 총에 총알은 있는지, 그리고 총은 제대로 작동이나 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낡았다.

킬리만자로와 마찬가지로 포터의 짐 무게가 20kg을 초과하지 않도록 저울로 꼼꼼하게 체크한다. 네팔에서는 짐을 셰르파들이 원정대와 같이 저울질하기 때문에 융통성을 부릴 수 있지만, 이곳에서는 무게가 조금만 넘어도 물건을 빼야 할 정도로 엄격하다. 메루산을 오르면서 보게 되는 작은 분화구는 1877년 마지막으로 화산활동을 했으며 주변 지역의 산세는 무척 가파르다.

첫날 = 모멜라게이트에서 입산신고를 한 후 레인저와 함께 등반을 시작한다. 너른 초원지대를 가로질러 가면서 가끔씩 한 무리의 버팔로를 관찰할 수 있다. 원시림을 뚫고 4시간 정도 오르면 아루샤국립공원과 멀리 킬리만자로와 마웬지산의 웅장한 모습이 펼쳐진다. 미리아캄바산장(2,500m)은 시설이 깨끗하고 식당 앞에는 전망 좋은 데크까지 마련돼 있다.

밤에는 날카로운 뿔을 가진 멧돼지가 산장 바로 앞까지 출현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이튿날 = 가파른 산길을 5시간 정도 올라야 새들산장(3,500m)에 도착한다. 등반을 시작하면서 수령이 수천 년은 됨직한 거목이 빽빽하게 서있는 밀림지대를 지나게 된다. 밀림 사이로 비치는 햇볕은 묘한 콘트라스트를 연출하며 강한 인상을 심어준다.

3시간 정도 걸으면 눈앞으로 메루산의 가파른 정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새들산장도 미리아캄바산장 못지않게 화장실이 깨끗하며 킬리만자로의 조망이 뛰어나다. 킬리만자로와 마찬가지로 등정을 위해 점심식사 후 잠을 자두는 것이 좋다. 고소적응이 안 된 사람은 이곳에서 하루를 더 머무르며 리틀메루(3,820m)를 다녀온다.

3일째 = 자정에 새들산장을 출발한다. 코뿔소가 죽었다는 라이노포인트(3,800m)까지는 1시간 거리. 이곳부터 정상까지는 한쪽이 절벽인 등반로인데, 밤길인 만큼 조심해야 한다. 특히 정상 근처는 경사가 가파르고 정상에서 분화구 아래까지는 2,000m의 절벽이 뻗어 있어 특별히 조심을 요한다.

그래서 가이드들은 킬리만자로보다 메루산이 더 등반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새들산장에서 정상까지는 왕복 10시간 정도 소요되며 모멜라게이트까지는 쉬지 않고 걸어도 총 14시간 걸린다. 체력이 달리는 사람은 미리아캄바산장까지 올라오는 4륜구동 응급차를 이용하면 1시간 정도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차로 내려오는 길에는 넓은 초원지대에서 버팔로를 볼 수 있다. 모멜라게이트에서는 아루샤로 나오는 길에 버스를 타고 기린 등을 볼 수 있는 무료 사파리도 가능하다.

_아루샤와 모시


모멜라게이트 근처에서 만난 신비한 나무. 사륜구동차가 지나고 있다.▶
킬리만자로 등반은 아루샤에서 시작하지만 모시에서 끝맺는다. 아루샤에서 모시까지는 버스로 2시간 거리. 예전에는 킬리만자로 등반을 모시에서 시작했지만 그 위치를 이제는 아루샤에 넘겨줬다.

아루샤 중심가에는 뉴아루샤·키보팔래스·더쉬트·임팔라 등 고급 호텔이 있다. 이들 호텔의 숙박요금은 2인1실에 150~200달러로 꽤 비싼 편이다. 경비를 줄일 생각이라면 게스트하우스(20달러 전후, 조식 포함)를 이용하면 된다.

아루샤의 식당으로는 ‘임팔라호텔 2층(스테이크 풀코스 약 15달러)’ ‘페페이탈리아 레스토랑(이탈리아 요리 20달러 전후)’이 있다. 이밖에 일본식당에서는 쇠고기덮밥과 참치회(약 10달러)도 즐길 수 있다. 시내 곳곳에 환전소가 있는데, 환전 금액(50~100달러, 5~20달러, 5달러 이하 등 세 종류)에 따라 환율이 각각 다르다.

대략 50달러를 바꿀 경우 1달러에 1,290~1,320실링 정도 받는다. 탄자니아 실링과 한화 환율은 같은 것으로 보면 된다. 탄자니아에서 생산하는 커피인 Africafe(100g에 3,600실링), 원두커피(6,500실링), 남아공 와인(2만 실링 전후), 흑단으로 만든 조각품(20~30달러), 쇠뿔로 만든 목걸이(1,000~2,000실링) 정도가 선물하기에 적당하다.

킬리만자로 등반을 마치면 대부분 아루샤로 돌아가는데, 여유가 있다면 하루 정도 모시에서 묵어도 좋을 듯싶다. 모시는 아루샤보다 규모가 작고 쾌적한 도시다. 원두커피를 생산하는 곳인 만큼 품질이 뛰어난 원두커피를 아루샤보다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모시에서는 숙소로 YMCA를 꼽을 수 있다.

물론 럭셔리 호텔도 있지만 싼 가격에 수영장을 갖추고 있고, 수영장 너머로 킬리만자로의 웅장한 모습을 즐길 수 있어 실속파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식당으로는 스테이크하우스를 추천할 만하다. 푸짐한 양에 우리 입에 맞고 가격도 8,000실링으로 저렴하다. YMCA에서 걸어서 20여 분 거리에 있다. 올 때는 택시를 불러 타면 된다. 택시요금은 4,000~5,000실링.

_항공


한국에서 케냐까지는 인천~두바이~나이로비를 운항하는 에미레이트항공, 인천~도쿄~도하~나이로비를 잇는 카타르항공이 있고, 대한항공과 케냐항공이 공동으로 운항하는 인천~방콕~나이로비 노선이 있다.

방콕을 경유하는 노선이 가장 저렴하지만 귀국할 때 방콕에서 10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최대 단점이다. 방콕 신공항에서 시내까지 다녀오려면 멀기도 하거니와 교통체증이 심하고 출국세를 다시 내야 하는 만큼 공항 내에서 발마사지(10~20달러)나 데이룸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항공기를 갈아탈 때 처음 이용하는 공항에서 물건을 산다면 기내에 들고 타야 한다. 나이로비공항에서는 남아공 와인을 저렴하게 판매한다. 술 같은 액체는 공항 면세점에서 비닐봉지를 가열해 밀봉해 준다. 그런데 이를 꼼꼼하게 확인하지 않으면 위험물로 간주해 갈아타는 공항에서 모두 압류당하는 낭패를 당할 수 있다. 이는 어느 공항이나 마찬가지다.
글 김세준 기자 [sjkim@joongang.co.kr] 사진 김세준·이기평

여행은 개개인에게 남다른 감회를 갖게 만든다. 기억에 남는 여행지를 꼽으라면 저마다 역사나 자연, 문화나 유적 등을 내세운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라도 누구를 만났는지 또는 누구와 함께했는지에 따라 가슴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추억으로 각인된다.

그래서 여행은 누군가를 만나는 삶의 연장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번 탄자니아에서 만난 세 명의 한인도 필자에게는 훗날 추억 속에 남을 만한 인물로 손색이 없을 듯싶다.

▶▶▶이미자(77·국적 미국)·의사
그에게서 ‘아름다운 노년’을 한껏 느꼈다. 어머님 세대의 나이임에도 꼿꼿한 모습에 부러움이 앞선다. 1956년, 20대 초반의 젊은 아가씨는 혈혈단신 태평양을 건넜다.

필라델피아에서 의대를 졸업한 후 1999년까지 의사로 재직했다. 그리고 노후를 어떻게 보낼까 궁리하다 남편과 함께 탄자니아를 찾아 의술을 베푼 지 어언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마차메게이트 아랫마을에 있는 마차메병원은 1905년 독일 선교사가 자그마한 집 한 채로 시작했다. 지금은 루터른교회에서 운영하는 120병상의 병원으로 거듭 났다. 마사이족이 문명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지만 아직 인력이나 의약품 등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 박사는 “의사는 다섯 명으로 환자가 너무 많아 일손이 부족했는데, 그나마 유럽에서 인턴들이 무료 봉사를 하러 오기에 숨을 돌릴 수 있게 됐다”며 “하루 입원비가 일반실은 500실링, 2인실은 1,500실링임에도 돈이 없어 못 오는 환자를 볼 때면 너무 가엾어”라고 말한다.

이들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 최근 취사장을 만들었고, 몇 년 전에는 미국의 독지가로부터 1억 원의 기부금을 받아 독일에서 세탁기를 들여와 궂은 날만 시트 등을 세탁하고 있다. “병원을 찾는 환자의 60%는 분만하러 오는 마사이족 여성”이라는 이 박사는 “간호학교에서 매년 배출되는 40명의 간호조무사가 마사이족의 희망”이라고 강조한다.

빈손으로 찾아 가기 멋쩍어 한국에서 가져간 라면을 드렸더니 너무 좋아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보며 ‘아름다운 노년의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박선기(55)·재판관
국내에서는 보기 드물게 유엔 특별법원인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ICTR)의 재판관으로 재직하는 법조인이다. 박 재판관이 ICTR와 인연을 맺은 것은 6년 전.

2000년 국방부 법무관리관(소장)으로 예편해 변호사활동을 하던 중 외교통상부에서 ICTR 재판관을 공모한다는 소식을 듣고 신청했다. 2003년 7월 유엔총회를 통해 최종 선출됐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당시 청와대외교안보수석)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박 재판관은 “각국의 주권은 인정하지만 국가·부족·인종·종교에 따른 대량학살은 가차 없이 제재한다는 것이 국제사회의 일관된 흐름”이라며 “최근에는 여성에 대한 성적 학대를 비롯해 증오심을 선동하는 언론의 행동도 대량학살로 인정하는 경향으로 바뀌고 있어 르완다사건 피고인에는 악질 언론인도 포함된다”고 설명한다.

현재 심리하는 피고인은 당시 군참모총장·도지사·신부·경찰총장 등이다. 군 재직 중 유엔 세미나와 전쟁법 프로그램에 관심을 갖고 참여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됐다며 처음에는 언어장벽으로 심리적 고생이 컸다고 한다. 3년 임기로 왔으나 심리가 종결되지 않아 매년 임기가 연장되고 있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때 묻지 않은 주민들의 순수함이 탄자니아를 제2의 고향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강조한다.

ICTR는 탄자니아 아루샤에 있다. 18명의 재판관(아시아·유럽·미주 각 4인, 아프리카 6인)을 비롯해 120여 개국 900여 명의 직원이 근무한다. 재판관은 3명이 1개 재판부를 구성하며, 3개월 재판하고 한 달은 판결문 작성과 다음 재판을 준비하다 보니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사형제는 없고 2심제로 운영된다.

재판관들은 유엔 사무차장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 그에 준하는 경호도 따른다. 박 재판관은 “법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아시아를 대표해 국제적 사건을 다루고, 그 판결이 국제 형사법의 근간이 된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가지며, 아프리카에 대한 편견을 없앤 것이 큰 행복”이라고 강조했다.

르완다분쟁은 1994년 대통령의 비행기가 추락해 숨지자 투치족의 소행으로 간주한 후투족이 100일 동안 약 80만 명의 투치 소수민족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이에 국제사회는 반인륜적 사건에 대한 제재 필요를 공감하고 특별법원을 구성했으며 내년에 종결할 계획이다.

“이제는 나라의 의미가 없어졌어요. 언어에 능통하고 경쟁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마지막 1%에 온 힘을 쏟는다면 우리 젊은이들도 국제사회에서 충분히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에게서 우리의 국력을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다.
글 김세준 기자 [sjkim@joongang.co.kr] 사진 김세준·이기평

▶▶▶박은파(52)·여행사 사장
‘10년 만의 귀향’
탄자니아 아루샤에서 나누리여행사를 운영하는 박 사장은 9월23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국민생활체육협의회가 실시하는 세계한민족축전에 탄자니아 대표로 고국을 찾기 때문이다.

그동안 고국을 찾을 기회는 있었으나 두 딸의 교육을 위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박 사장. 한국이 너무 많이 변했다는데 혹시 촌뜨기나 되지는 않을지 걱정부터 앞선다.

큰딸의 이름은 ‘한나’. ‘마마 한나’라면 아루샤 현지인도 웬만하면 알 정도로 유명인사가 됐다. 1996년 선교활동을 하러 들어온 언니를 방문하러 왔다가 탄자니아의 자연에 반해 눌러앉게 됐다. 당시 큰딸은 열한 살, 둘째딸은 여섯 살. 한국에서 외환위기가 터지자 그 여파로 아루샤국제학교에 다니던 두 딸을 모시의 현지학교로 전학시킬 수밖에 없었다.

국내에서는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살았던 박 사장이었지만 가슴이 쓰라렸다. 두 딸의 교육을 위해 이를 악물고 돈을 벌 수밖에 없었다. 사회경험이 없었기에 처음 시작한 것은 여행 가이드. “2001~2002년에는 매달 300명 정도의 한국 관광객이 몰려왔어요. 그때는 수입도 짭짤했지요.

우여곡절 끝에 여행사를 운영하게 됐고, 애들도 다시 국제학교로 불러올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한다. 여성의 몸으로 여행사를 운영하려면 현지인에게 엄격해야 하고 금전적인 부분에는 일절 손을 못 대게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현실은 ‘믿었던 사람도 돈 앞에서는 나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고 말한다.

그래도 아이들이 올곧게 커서 지금은 뉴욕에서 의대와 법대에 다닌다. 벌어 놓은 돈은 없지만 자식농사는 잘 지었다는 자부심 하나만은 대단하다. “8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를 이제야 찾아 뵙게 돼 가슴이 아프다”는 박 사장에게서 한국 아줌마들의 강인한 생활력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