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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53/평화협정 맺으면 1년도 못 가서 망한다는 예언 적중 |
조갑제 |
1975년 1월, 朴正熙 대통령은 金泳三의 신민당을 중심으로 하여 언론계·종교계·학생들이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벌이고 있는 유신헌법 개정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 해 전 4월의 학생시위에 대해서 긴급조치로 대응한 이후 8·15 陸英修 여사 피살사건 직후에 한두 달 정도 조용했을 뿐 反유신 운동은 하나의 흐름을 확실히 형성하고 있었다. 투쟁노선으로 선명해진 야당과 언론자유수호운동을 벌이던 신문이 여론을 주도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긴급조치를 남발하는 방식으로는 문제 해결이 안 된다는 판단을 한 사람이 金鍾泌 총리였다. 당시 金 총리는 라이벌이던 李厚洛 정보부장이 물러난 이후 申稙秀 후임부장과 잘 지내면서 오랜만에 실세 총리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을 때였다. 金 총리는 마음에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유신체제를 옹호하는 연설이나 발언을 많이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비판도 많이 받았다. 金 총리는 대통령을 찾아갔다. “드골 대통령이 했듯이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하여 정면돌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국민투표에 지면 물러나겠다고 하시지요.” “임자가 너무 약해서 흔들리니까 이 사람 저 사람이 모두 덤비는 거야.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 어디 써먹겠어.” “이것이 이기는 길입니다. 제가 무슨 다른 뜻이 있어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알아. 그럼 연구해 보자구.” “그리고 이제는 저를 좀 놓아 주십시오. 건강이 도저히 말을 듣지 않습니다.” 金鍾泌 총리는 그때 持病(지병)인 허리 디스크가 도져 있었다. “말은 들었어. 허지만 별것 아니라고 그러더군. 싫어서 그런 게지.” “아닙니다. 외부에 알려질까 봐 무리를 하고 있는 것이지 사실은 절단이 난 것 같습니다.” “알았어. 나가 봐.” 그 며칠 후 朴 대통령은 金 총리를 불렀다. “임자, 생각해 보았어?” “무엇을 말입니까?” “국민투표 하자고 말하지 않았어?” “아, 네 그것 말씀입니까.” “하지. 해 봐서 지지가 나오지 않으면 내가 물러나지. 나가면 될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해서 1975년 1월 15일 오전 10시부터 네 시간 동안 朴 대통령이 주재하는 시국대책회의가 청와대 서도실에서 열렸다. 참석자는 朴 대통령과 총리, 申稙秀 정보부장 이외에 朴璟遠 내무장관, 金正濂 비서실장, 金淇春 정보부 5국장, 金永光 정보부 판단기획국장, 鄭相千 정무2수석, 柳赫仁 정무1수석, 金聖鎭 공보수석비서관이었다. 이 회의에서는 국민투표 실시에 따른 상황점검을 했다. 정보부는 국민투표에서 이길 자신이 있다는 판단을 내놓았다. 1월 22일 오전 임시 국무회의가 청와대 대접견실에서 열려 국민투표실시 안건을 의결했다. 오전 10시 朴 대통령은 청와대 새마을 상황실에서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따라서 나는 이번 국민투표를 비단 현행 헌법에 대한 贊反(찬반)투표일 뿐 아니라, 나, 대통령에 대한 신임투표로 간주하고자 합니다. 국민 여러분, 나 개인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위해 이미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쳤습니다. 만일, 우리 국민 여러분이 유신체제의 역사적 당위성을 인정하지 않고 현행 헌법의 철폐를 원한다면 나는 그것을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으로 간주하고 즉각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입니다.” 이날 朴 대통령은 투표에 관계하는 비서관들을 불러 점심 식사를 함께 했다. “오늘 공고한 국민투표에서 이길 것이라는 자신은 있는데, 결과는 끝나 봐야 알지. 나는 결심했네. 근소한 차이로 이기게 되면 下野할 작정이야. 우리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국민의 절대적 지지가 없으면 맥 빠져 일을 하지 못해요. 일부 사람들은 부결되기를 바라겠지만, 나는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총유권자의 60% 이상 찬성표가 안 나오면 내 스스로 청와대를 떠날 작정이니, 反체제 사람들 만나면 너무 초조해하지 말라고 이야기해 줘요.” 신민당과 민주회복국민회의는 즉각적으로 국민투표 전면 거부 결의를 했다. 국민투표를 4일 앞둔 2월 8일 尹潽善 前 대통령과 金泳三 총재, 金大中 씨는 국민행동강령을 발표, 투표거부를 종용했다. 신문들은 언론자유수호 운동을 벌이고 있을 때여서 야당과 在野의 투표거부운동을 적극적으로 보도했다. 朴 정권下의 모든 행정기관은 국민투표에 동원되었다. 1975년 2월 12일 유신헌법에 대한 贊反을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朴 대통령은 비서진들을 불러 점심 식사를 함께 했다. “지금 심정은 지극히 담담하지만 국민투표가 어찌 되어가는지 궁금하구먼.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돼 가고 있어?” 관계 비서관이 보고했다. “지난번 선거 때보다 투표율이 높습니다.” “잘됐구먼. 외국에서는 투표율이 낮으면 야당에게 유리하다고 하지만, 우리 국민은 현명해서 가부간에 의사 표시를 다 하는 민족이야.” 2월 12일의 국민투표율은 79.8%, 유신헌법 지지율은 73%였다. 官權이 동원된 것은 사실이지만 금품 공세는 없었다. 야당이 투표거부운동을 벌이고 신문이 비판적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朴 대통령과 유신헌법 지지율은 높았다. 朴 정권은 형식상 유신헌법의 정통성을 확보한 셈이었다. 이때부터 朴 대통령은 공세로 전환한다. 월남사태의 악화가 朴 대통령을 돕게 된다. 1년간 계속된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은 이제 썰물期로 바뀐다. 1975년 3월 20일 본관 식당에서 朴 대통령은 비서진을 불러 점심 식사를 같이 했다. 이날 중부전선 철원 북방에서 북한이 판 제2땅굴을 또 발견했다는 공식 발표가 있었다. “철원에서 또 땅굴이 발견됐다면서? 아무리 공산주의라 해도 하는 식이 원시적이고 서툴러 같은 한민족으로서 국제적으로 망신스러운 생각이 들어. 남침을 하려거든 당당하게 할 것이지 그런 짓은 왜 해? 수천 년 전부터 해 온 땅굴작전에 아직도 미련이 남아서…. 외국인들이 이것을 보고 원시적인 싸움밖에 모르는 저능아라 할 것 같아. 나는 그들이 변칙적인 공격을 해 온다 해도 정규전으로 대응할 것이야. 정 그렇게 기습을 하고 싶으면 내게 와서 작전을 물어보면 한 수 가르쳐 줄 텐데, 허허허.” 1975년 2월 12일 국민투표에서 유신헌법 유지에 대한 찬성이 70%를 넘자 朴正熙 대통령은 그 여세를 몰아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입체적으로 취해 간다. 이때 월남의 패망 과정이 겹친다. 월남이 미군 철수 이후의 내부 분열로 망해 가는 과정이 언론을 통해서 매일 중계방송하듯이 소개되면서 야당·在野·학생·종교계에서 추진하던 유신헌법 개정운동은 動力(동력)을 잃고 만다. 2월 15일 朴 대통령은 긴급조치 1호 및 4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던 反정부 인사들을 석방했다. 4월에 들어가면 거의 모든 연설에서 朴 대통령은 유신조치를 합리화하는 사례로 월남사태를 들었다. 4월 10일 해군사관학교 졸업식 유시에서 朴 대통령은 “지금 월남에서는 男負女戴(남부여대)한 피란민의 행렬이 문자 그대로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다. 6·25 동란을 체험한 우리 국민들에게는 그 참상이 결코 對岸(대안)의 화재거나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북한은 1971년 선거를 보고 다음 선거 때는 극심한 분열과 혼란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그때 무력남침을 하려고 준비했을 것이다”면서 “유신체제를 갖추지 않았더라면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4월 12일 ‘예비군의 날’ 7주년 담화문에서 朴 대통령은 “우리는 지금 일대 국난에 처해 있다”고 규정했다. 4월 18일 金日成은 14년 만에 처음으로 中共(중공)을 공식 방문했다. 8일간에 걸친 방문이 시작되는 날 中共이 지원한 크메르 루즈 공산세력은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을 점령했다. 金日成은 毛澤東 주석과 周恩來를 만나게 된다. 환영 만찬에서 金日成은 “敵들이 전쟁을 도발하면 우리는 전쟁으로 응수할 것이고 敵을 섬멸할 것이다. 이 전쟁에서 사라지는 것은 휴전선이고 얻는 것은 조국통일이 될 것이다”고 호언했다. 金日成은 중공 지도부에 대하여 “남한 해방에 자신이 있다”면서 지원을 요청했다. 周恩來는 이 제의를 거부했다. 그는 직설적으로 金日成을 반박하지 않고 한반도의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金日成은 체면을 구기지 않기 위해서 그 뒤에는 남침 말을 꺼내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소련도 북한에 대해서 “우리는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만 지원할 것이다”고 통보하여 전쟁 기도를 事前(사전)에 봉쇄했다고 한다. 4월 28일 북한과 中共의 공동성명에 대해서 정부 대변인인 李源京 문공부 장관은 담화문을 통해서 “북괴와 中共이 한반도 赤化를 논의하고 공동투쟁을 다짐했다는 것을 주시하겠다”고 말했다. 4월 29일 朴正熙 대통령은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전국에 중계하는 가운데 ‘국가안보와 시국에 관한 특별 담화’를 발표했다. 사이공이 월맹군에 포위되고 탄손누트 공항이 포격을 받고 있으며 駐越 한국대사관이 문을 닫고 교민들이 철수선을 타고 귀환 중인 시점에서 나온 朴 대통령의 담화는 국민들에게 안보 위기감을 실감시켰다. 내용도 비장했다. “우리에게 어떤 약점이 생기거나 우리가 약하다고 그들이 보았을 때는 지금까지 체결한 협정이니 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휴지처럼 내동댕이치고 武力(무력)을 가지고 덤벼드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자들입니다. 兵力(병력)이나 장비가 우세했던 월남은 집안싸움만 하다가 패전을 당한 것입니다. 만약에 앞으로 북한 공산집단이 전쟁을 도발해 온다면, 우리가 사는 首都(수도) 서울은 절대로 철수를 해서는 안 됩니다. 全시민이 이 자리에 남아서 死守(사수)해야 합니다. 정부도 650만 시민 여러분들과 같이 死守를 할 것입니다. 전방은 우리 군인들이 일보도 양보하지 않고 국토를 死守할 것이고, 서울은 우리 시민들이 死守해야 할 것이고, 후방은 후방에 사는 국민들이 제각기 내 고장, 내 마을, 내 가정을 死守해야 합니다. 겁부터 집어먹고 나만 살겠다고 보따리를 싸 가지고 얌체 없는 행위를 하는 국민들이 있다면 이 전쟁에서 우리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 사람 자신도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중대한 시국을 에누리 없이 정확하게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과장할 필요도 과소평가할 필요도 없습니다. 60만 국군, 주한미군, 270만 향토예비군, 3,500만 국민들이 있는데 왜 우리가 나라를 지키지 못하겠는가, 지키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월남 패망은 朴 정권을 민주화 세력의 도전으로부터 구해 낼 뿐 아니라 그 뒤 4년간 정국을 안정시킨다. 월남 패망 과정을 추적해 본다. 朴 대통령의 예언: “1년도 어렵다” 1973년 1월 24일 키신저 안보보좌관은 백악관에서 월남 휴전협정을 보고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이 협정은 관련 당사자들의 권위와 자존심을 지켜 줄 것이고 인도지나의 상처를 치유함과 더불어 미국의 상처를 치유하게 될 것이다.” 키신저는 나중에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런 요지의 고백을 한다. “내가 이 말을 할 때, 나는 워터게이트 사건이 미국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희망을 망치게 될 것이고, 월맹이 평화협정을 새로운 攻勢(공세)로 가는 휴식기로 사용할 것이란 것을 몰랐다. 미국의 反문화·反戰운동가들은 우리가 자유민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1945년 이후의 외교정책을 부패한 사회의 오만이라고 몰아세웠다. 3代에 걸친 미국 정부가 막으려고 했던 인도지나 赤化는 이들에게는 바람직한 국가적 스트레스 해소였다. 문제는 이런 여론이 언론과 미국 의회를 흔들어 대어 월남에 대한 방위공약을 실천할 수 없게 했다는 점이다.” 1968년부터 미국과 월맹 사이에서 시작된 파리평화협상은 월남의 티우 정부를 회담 당사자 자격에서 제외했다. 미국과 월맹은 침략피해자의 운명을 당사자의 참여 없이 결정하게 된 것이다. 이는 처음부터 월맹의 함정에 빠진 회담이었다. 월맹은 4년간 줄기차게 월남 赤化에 대한 방해물의 제거를 시도했다. 그들이 미국에 제시한 뒤 양보하지 않은 조건은 ‘駐越미군의 철수, 미국의 괴뢰인 구엔 반 티우 대통령의 교체, 그런 뒤에 左右聯政(좌우연정)을 수립하여 베트콩과 협상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월남 정부에 대해 자살하라는 처방에 불과했다. 1973년 10월 월맹은 닉슨 대통령이 아홉 달 전에 제안한 휴전안을 거의 그대로 수용한다는 발표를 했다. 대통령 선거 직전이었다. 닉슨 행정부로서는 받지 않을 수 없는 逆제의였다. 그 내용은 ‘티우 월남 정부의 존속, 駐越미군의 철수, 휴전, 월맹군의 월남 침투 중지, 포로 교환, 정치협상 계속’이었다. 형식상으로는 월맹 측이 대폭 양보한 모습이었다. 미국의 여론은 닉슨이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키신저와 닉슨은 越盟의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더라도 군사적 강제수단을 유지하지 않으면 월맹이 협정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駐越미군은 철수를 개시하여 한때 50만 명에 달하던 병력이 3만 명으로 줄었고, 육상전투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닉슨의 안보보좌관 키신저는 미국이 월남 정부에 군사·경제원조를 계속하고, 월맹이 협정을 위반하여 월남을 침공할 때는 海空軍力(해·공군력)으로 응징할 경우 월남에서 군사적 균형은 유지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朴正熙 대통령의 판단은 달랐다. 1972년 10월 21일 駐韓 미국대사 하비브가 키신저와 만나고 와서 朴 대통령에게 협정안을 보고하자 그는 반론을 제기했다. 이미 월남으로 침투해 있던 월맹 정규군의 철수에 대한 규정이 없다는 점을 朴 대통령은 맨 먼저 문제 삼았다. 당시 약 14만 명의 월맹군이 월남에 들어와 베트콩으로 위장하여 싸우고 있었다. 미국과 세계의 많은 언론은 이들이 自生的(자생적)인 反독재 투쟁조직이라고 오보했다. 월남 침투 월맹군에 대해서는 잔류를 허용하고 駐越 미군은 철수시키고, 휴전협정에 대한 국제감시는 불가능한 이런 협정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朴 대통령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越南戰 참전국 元首(원수)로서 발언권을 행사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비슷한 처지의 한국 상황과 대비하여 보고 있었다. 朴 대통령은 이런 협정을 맺으면 티우 정부와 월남 국민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이고,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의 막대한 희생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며 월남 정부는 1년을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朴 대통령은 나흘 뒤엔 駐越 한국대사 柳陽洙 씨를 불러 歸任(귀임)하면 티우 대통령을 만나 자신의 걱정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티우 대통령도 미국의 키신저가 들고 온 협정안을 거부했다. 1972년 10월 22일 대통령궁에서 있었던 회담에서 티우 대통령은 키신저를 향해서 “귀하는 월남을 팔아넘길 작정인가”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키신저는 급했다. 11월 7일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에서 닉슨은 反戰평화운동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던 민주당 조지 맥거번을 꺾기 위해 월남 휴전협정을 맺고 싶어 했다. 이런 타이밍을 계산하여 월맹이 양보하는 척하면서 함정을 깐 휴전안을 제의했던 것이다. 柳陽洙 대사를 만난 티우 대통령은 키신저와 만나 나눈 대화를 전해 주었다. 티우는 월남 내에 침투한 월맹군을 철수시키지 않고 휴전하는 것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그는 또 1954년의 제네바협정의 再확인을 요구했다. 그래야 앞으로 월맹이 침략할 때 국제여론에 고발할 수 있다. 티우는 공산주의자들과 어떤 형태의 연립정부도 반대한다고 했다. 월맹 측은 중앙정부에서 마을단위까지 티우 정부와 베트콩 사이의 연립을 주장하였으니 이는 左右합작으로써 월남 정부를 허수아비로 만들려는 고전적인 술책이었다. 키신저는 월남 정부를 압박하여 字句(자구) 수정 정도만 한 뒤 10월 26일에 협정안을 발표하고 31일 파리에서 조인할 계획이었으나 티우의 거부로 霧散(무산)되었다. 키신저에게 티우는 거의 막말 수준의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는 공산당과 직접 대화하지 않고 귀하가 중계를 했는데 귀하는 누구 편인가. 왜 적에게 호의적이고 우방을 희생시키려 드는가. 왜 월남의 외국 군대는 60일 이내에 철수한다고 해 놓고 들어와 있는 월맹군에 대해서는 철수를 요구하지 않는가.” 小國이 자신을 도와준 大國의 요구를 거절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李承晩 대통령은 1953년 휴전협정 때 미국이 서둘러 협정을 맺고 한국에서 물러나려 한다고 판단하여 北進(북진)통일 선언과 反共포로 석방으로써 미국 정부를 압박하였다. 미국은 李承晩 정부를 달래기 위하여 韓美상호방위조약, 국군현대화 계획, 주한미군 유지 등을 약속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한반도 평화와 한국 번영의 울타리가 되었다. 티우 대통령은 그러나 닉슨을 상대로 그런 게임을 할 수 없었다. 그가 李承晩만큼 유능하지 못해서라기보다는 미국의 여론과 언론이 反戰, 反티우로 돌아서 있어 미국 안에서 지지세력을 동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닉슨은 티우에 대해서 월맹이 협정을 위반하여 침공하면 미국은 군사력을 동원하여 응징할 것이고 경제·군사적 원조를 계속할 것임을 문서로 보증하겠다고 설득했다. 그래도 티우가 동의하지 않자 1973년 1월 16일 닉슨은 티우 대통령에게 최후통첩을 보낸다. 그는 이 편지에서, 티우 정부가 휴전협정안에 동의하지 않으면 미국과 월맹이 조인을 강행할 것이며 자신은 “월남 정부가 평화를 방해하고 있다”고 美 국민들에게 설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1월 21일 티우는 결국 굴복한다. 그는 닉슨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 ‘미국이 사이공 정부를 월남의 정통정부로 인정한다는 것, 월맹은 월남에 병력을 잔류시킬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일방적으로 聲明(성명)해 줄 것’을 요청했고 미국은 이를 받아들였다. 휴전협정은 1월 23일 파리에서 가조인되었다. 이 협정은 이때부터 휴지 조각이 되었다. 휴전협정 이후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공산군에 떨어질 때까지 월남 내의 전투는 더 치열하게 계속되었다. 파리휴전협정은 월맹 협상전술의 완벽한 승리였다. 그들은 戰場(전장)에서 얻을 수 없었던 것을 협상 테이블에서 얻었다. 월맹은 미국 여론을 反戰, 反티우로 돌려놓기 위해서 전투를 하고 협상을 했다. 미국 여론이 한번 돌아가 버리니 월맹의 월남적화 전략을 결정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미국의 언론과 의회였다. 월맹이 월남을 赤化하기 위해서 반드시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닉슨 대통령이 티우에게 약속했던 군사적·경제적 원조 및 협정 위반 時의 군사적 응징조치 약속이었다. 국가원수의 이런 약속은 조약에 준하는 효력을 갖는데 美 의회가 월맹이 할 일을 대신해 준다. 1973년 6월 미국 의회는 美 군사력을 인도지나의 육상이나 상공에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닉슨 대통령의 발목을 묶어 버렸다. 월남에 대한 군사원조액도 의회에 의해 깎여 나갔다. 1974년 8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중도 사임한 닉슨을 이어 포드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에도 의회와 언론의 反戰행태는 계속되었다. 휴전협정을 어겨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자신을 가진 월맹은 월남 내의 공세를 강화하여 협정 이후 20개월 사이 2만 6,000명의 월남 군인이 戰死(전사)했다. 휴전협정 이후 1년 반 사이 월맹은 13만 명의 월맹 정규군을 월남으로 침투시키고 결전에 대비한 도로망 정비, 보급품 쌓아두기를 계속했다. 휴전협정이 금하고 있는 탱크, 장갑차, 로켓포, 장거리포, 對空砲(대공포)까지도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키신저는 회고록 《再生의 시기》에서 이렇게 요약했다. <월맹군의 침투와 협정 위반이 계속되는 동안 미국은 월남의 목을 죄고 자신의 응징능력을 마비시켜 갔다. 이 비극은 월맹정규군이 월남을 침공하는 사이 미국은 국론이 분열하여 이를 방관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미국 CIA는 1974년 5월 23일자 ‘국가정보평가서’에서 ‘월남군은 주도권을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의 해·공군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으면 월남군이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미국의 대규모 지원만이 공산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라고 예측했다. 월맹은 이런 사태를 지켜보면서 1975년의 작전을 준비해 갔다. 월맹 지휘부는 자신들이 월남에 대한 총공세를 시작할 경우 미국이 약속대로 월남을 돕기 위해 해·공군력을 동원할 것이냐의 여부를 놓고 고심했다. 이들은 미국이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월맹공산당 서기장 레 두안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월맹군 사령관 반 틴 둥의 회고록). “미국 행정부의 내부 갈등과 정당 사이의 분열이 깊어지고 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미국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다. 사이공 괴뢰정권에 대한 미국의 원조는 줄고 있으며 미국은 사이공 정권의 파멸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월맹은 1976년을 決戰(결전)의 해로 정하고 1975년 攻勢(공세)로써 미국의 의지를 시험하기로 했다. 反戰 여론에 춤추는 美 의회 1975년 월맹군은 푸옥롱省의 省都(성도)인 푸옥빈을 점령했다. 월남전 사상 省都가 공산군에게 점령되고도 탈환하지 못한 경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하노이의 월맹 지휘부는 미국이 이에 어떻게 대응하는가를 보고 다음 단계의 작전을 전개하기로 했다. 2년 전의 의회 결의로 인해 포드 행정부는 이런 중대한 협정 위반행위에 대해서도 군사력을 사용할 수 없었다. 답답한 키신저는 월맹 상공에 대한 정찰비행을 강화하고 필리핀 수빅만을 출항하여 인도양으로 향하게 되어 있는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號(호)를 월맹의 통킹만으로 접근시켜 월맹 측에 경고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월맹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중대한 협정 위반을 한 월맹은 오히려 미국 측이 휴전협정을 위반하여 정찰비행을 강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여기에 미국의 언론과 의회가 편승하여 포드 행정부에 대해 해명을 요구했다. 의회와 언론은 더 큰 협정위반자인 월맹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고 자신의 정부에 덤벼들었다. 미국 국방장관이 나서서 변명해야 할 판이었다. 미국 국방부는 의회로부터 국방예산 심의를 받아야 할 시점에 말썽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했다. 엔터프라이즈호가 수빅만을 출항하자마자 하노이는 또다시 미국이 침략의도를 드러내고 있다고 외쳤다. 美 국방성은 엔터프라이즈호의 통킹만 접근계획을 취소했다. 이런 사태를 지켜보던 하노이의 월맹 지휘부는 미국의 포드 대통령이 월남 방어 의지를 실천하기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했다. 총리 팜 반 동은 “우리가 미국에 뇌물을 주어서 개입하라고 해도 하지 않을 것이다”고 농담을 했다고 한다. 포드 대통령과 키신저 국무장관은 월남을 구해 보려고 했다. 그들은 탄약이 떨어져 가는 월남 정부에 대해서 3억 달러의 긴급지원을 하려고 美 의회에 승인을 요청했다. 공화당과 민주당은 움직이지 않았다. 포드 대통령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너무 부드럽게 대한다고 비난해 오던 反共의 보루 헨리 잭슨 상원의원도 “인도지나의 문제는 3억 달러의 무기구입비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거부했다. 티우 대통령은 이때 전략적 부대 배치 전환을 단행한다. 중부고원 지대를 지키던 정예 공수부대들을 해안의 다낭기지 부근으로 옮기도록 한 것이다. 방어력을 집중시키기 위해서 戰線(전선)을 축소하기 위한 전략적 후퇴였다. 이것이 월맹 지휘부에 나쁜 신호를 보냈다. 하노이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다음해로 예정했던 사이공 진격을 이 기회에 해치우기로 결단했다. 참모총장 반 틴 둥이 월남으로 내려와 월맹군 사령관을 맡았다. 이 침략행위를 덮기 위해서 월맹 정부는 전형적인 위장 평화공세에 나선다. 그들은 정치협상을 제안한 것이다. 그 내용은 ‘미국의 개입을 중단시키고 파리협정을 실천하기 위한 새 정부를 사이공에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키신저는 그제야 이 제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3년 전 그는 파리협상의 상대자인 레둑토가 표정도 바꾸지 않고 ‘티우 암살’을 제안했던 것을 기억했다고 한다. 정규군을 동원하여 월남을 침공함으로써 파리휴전협정을 휴지 조각으로 만든 월맹이 ‘휴전협정을 실천할 수 있도록 티우 정부를 교체하자’는 취지의 제안을 해도 미국의 언론은 ‘온건한 제안’이라고 환영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1975년 3월 6일자 사설에서 포드 대통령이 신청한 3억 달러의 긴급지원에 반대했을 뿐 아니라 이미 통과된 對월남 원조액의 삭감을 주장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구엔 반 티우 대통령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지 못하도록, 또 그가 타협하고 양보하지 않을 수 없도록 군사지원을 줄여야 한다> 미국의 敵이자 협정 위반자인 월맹에는 침묵하고 우방이자 피해자인 월남에 대해서는 잔인하게 대한 것이 당시 언론과 의회였다. 대중정치시스템에선 여론이 ‘反戰평화’로 돌아 버리니 언론과 의회도 휩쓸려 들고 행정부도 발이 묶여 버린 것이다. 월맹은 이때 미국 내의 언론과 反戰단체, 그리고 의회를 자신들의 편으로 조종하고 있었던 셈이다. 월맹은 월남 내에서는 월맹 정규군과 베트콩, 그리고 순진한 민주투사들을 조종하고 있었다. 티우와 포드 대통령은 이런 월맹 전략에 의해 여론과 언론과 의회에서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 월맹을 북한의 金正日 정권, 월남의 티우 정권을 한국의 보수세력, 그리고 당시 反戰무드에 조종당하던 미국의 언론과 의회를 지금 反美·親北 바람에 나부끼는 한국의 언론과 국회로 놓고 비교하면 여러 시나리오를 쓸 수 있을 것이다. 1975년 3월 월맹 정규군이 탱크와 대포를 앞세워 월남의 중앙고원을 공격하자 티우 월남 대통령은 측근인 트란 반 람을 워싱턴으로 보내 긴급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답이라도 하듯이 민주당 상원의원총회는 3월 12일 월남에 대한 어떤 추가지원도 반대한다는 결의를 했다. 실망한 티우 대통령은 중앙고원 방어부대와 공수부대를 후방으로 철수하여 다낭 근방에 포진하도록 지시했다. 이 철수 부대가 쓸 수 있는 도로는 루트 7B 하나뿐이었다. 도로의 정비상태가 매우 불량했다. 이 도로로 약 6만 명의 군인들과 약 40만 명의 민간인들이 쏟아져 들어와 거대한 人波(인파)의 강을 만들었다. 당시 월남군인 가족들은 부대 근방에서 숙식하고 있었다. 이 군인가족들도 군인들과 함께 이동해야 했다. 철수 소문이 퍼지자 많은 월남인들이 또 피란길에 올랐다. 소수민족들은 월남 정부가 자신들을 방치한다고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도로를 꽉 메운 인파 속에서 군인들은 약탈을 자행했다. 거대 인파에 대한 식량배급도 불가능해지고 軍紀(군기)가 무너지더니, 월남 전투기는 후퇴하는 부대를 월맹군으로 오인하고 폭격했다. 이 혼란상태에서 이동하던 군대는 거의 해산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부대가 증발해 버린 것이다. 중부고원 지대로 들어온 월맹군은 이 사태를 보고 사이공까지 진격하여 통일한다는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1975년 4월이 되면서 키신저 국무장관은 월남의 멸망을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졌다. 이제 미국의 목표는 월남의 보호가 아니라 월남內 약 6,000명의 미국인과 그동안 미국에 협조했던 월남인들을 안전하게 철수시키는 일이었다. 이 철수작업이 진행되는 중에는 티우 정부가 기능하고 있어야 했다. 티우 정권이 월남과 함께 침몰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미국 언론은 미국 정부가 티우를 포기하고 즉시 철수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美 CIA 국장 윌리엄 콜비는 미국이 티우를 퇴진시키는 대신 월맹 측으로부터 미국인들의 안전한 철수를 보장받도록 하자는 건의를 했다가 키신저로부터 거절당했다. 포드 대통령이 하루속히 월남을 포기하는 선언을 해야 한다는 압력이 의회와 언론, 그리고 자신의 백악관 참모들로부터 쏟아져 들어왔다. 포드는 이를 거부했다. 4월 10일 美 양원 합동회의 연설에서 그는 월남에 충분한 원조를 하지 못했고, 월맹의 협정 위반을 응징하지 못한 것은 미국이었다고 강조했다. 反戰여론의 포로가 된 美 의회와 언론으로부터 손발이 묶인 채 월남의 최후 몸부림을 지켜보아야 하는 포드 대통령의 고통에 찬 호소였으나 의회는 이를 묵살했다. 두 척의 LST, 출항하다 1965년부터 월남戰에 참전하여 한때 5만 병력을 투입했고 延(연) 30만 명의 파병 실적을 쌓았던 朴 정권으로서는 월남의 침몰이 對岸의 불이 아니었다. 한국 정부는 비교적 일찍부터 교민 철수작업을 준비했다. 朴 대통령부터가 월남사태에 대해서 비관적인 전망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975년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亞洲(아주)지역 공관장 회의가 자카르타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金榮寬 駐越 한국대사는 金東祚 외무장관에게 “이미 보고 드린 월남 공관원 및 교민 철수계획을 빨리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고 3월 15일부터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대사관이 파악한 교민 수는 처음에는 1,200명이었으나 실제로 전국에 흩어져 있던 교민 수는 불법체류자를 포함하여 이보다 훨씬 많았다. 북쪽의 월남군이 사이공을 향해 후퇴를 시작하면서 한국 교민들도 사이공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해군참모총장 출신인 金대사는 撤收船(철수선)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4월 9일 두 척의 해군 LST 수송선이 부산항을 떠났다. 두 배의 함장들은 사병들에게는 ‘남중국해상 훈련’을 하러 간다고 알렸다. 이 철수선이 월남을 향해 가고 있을 때에도 사이공에서는 월남이 망하리라고 보는 이들은 소수였다. 전쟁에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이 서울에 있던 사람들보다 대체로 사태를 낙관했다. 교민 철수선 파견을 결정한 것은 1975년 4월 3일 金正泰 외무부 차관 주재로 열린 관계부처 대책회의에서였다. 이 회의는 교민 철수에 관한 결정권을 駐越 한국대사에게 일임키로 하고 自費(자비) 퇴거가 불가능한 교민들을 위해서는 전세기를 투입하기로 하는 등의 방침(나중에 이 계획은 해군수송선 파견에 의해 취소됨)을 정해 4월 4일 국무회의에 보고했다. 키신저의 ‘악어의 눈물’ 다음날(4월 20일) 마틴 美 대사는 티우 대통령을 찾아가 “사임을 고려해 달라”고 말한다. 마틴은 “이 말은 개인 자격으로 하는 것이다”고 했지만 포드 대통령이 승인한 것이었다. 티우 대통령은 냉정하게 답했다. “내가 알아서 국가를 위해 최선의 행동을 취할 것이다.” 마틴은 자신에게도 너무나 치욕적인 이 惡役(악역)을 수행한 다음 워싱턴에 電文을 보냈는데 이런 말을 덧붙였다. <나는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워싱턴으로부터 온 요약문들을 다 읽었다. 샤워를 했다. 가장 강력한 비누로 내 몸을 세게 문질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4월 21일 티우 대통령은 사임했다. 성명에서 그는 미국의 배신을 공격했다. 미국의 언론, 특히 <워싱턴 포스트>와 <뉴욕 타임스>는 월남의 평화를 가로막던 장애물이 제거된 것처럼 티우의 사임을 환영했다. 두 신문은 미국에 대한 티우의 공격은 ‘신뢰를 잃고 울분에 차 있는 월남 정치인의 헛소리’라고 말했다. 키신저 국무장관은 “오랜만에 진보적인 신문이 정부를 옹호해 주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이런 후회를 했다고 회고록에 썼다. <티우는 미국의 행동을 미워할 만한 모든 근거를 갖고 있었다. 그는 내가 미국의 군사적 지원을 종료시킨 책임자라고 하여 나를 누구보다도 미워했으나 나는 그가 용기와 명예심을 가지고 조국을 위해 봉사한 애국자라고 생각한다. 反戰 운동가들이 그를 평화의 장애물이라고 비판했지만 이는 사실과 달랐다. 그와 그의 조국은 더 좋은 운명을 맞았어야 했다. 만약 미국 의회가 고립된 우리의 우방(월남)에게 원조를 중단할 것을 결의할지 모른다고 예측했었다면 나는 1972년의 마지막 협상 때 그를 그토록 몰아붙이지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를 했다> 티우 대통령과 朴正熙 대통령은, 월맹군의 월남內 잔류를 허용한 채 미군을 철수키로 한 휴전협정이 월남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미국 측에 경고했었다. 키신저는, 미국은 월맹이 중대한 협정위반을 한다면 해·공군력으로 응징하고 월남에 대한 경제·군사적 원조를 계속하겠다고 안심시켰다. 이 약속은 미국 대통령의 약속이었지만 미국의 약속으로 집행되지 못했다. 反戰여론과 언론의 영향을 받은 美 의회가 미국 대통령이 쓸 수 있는 손발을 묶어버렸기 때문이다. 키신저의 때늦은 후회는 그의 양심을 드러낸 것일 수는 있어도 진실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미국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월남은 포기되었다. 월남은 미국의 지원 없이도 자신을 지켜 낼 수 있는 힘을 만들지 못했다. 金正日이 反美·親北 세력을 이용하여 한국인을 反美로 돌려놓고 이를 지켜본 미국 여론과 언론이 反韓으로 돌아 韓美동맹이 와해된 뒤 월맹군이 했던 식으로 북한군이 전면 남침을 한다면, 바로 그때 盧武鉉 정권과 같은 좌파정권이 들어서 있다면 한국은 자신을 지켜 낼 수 있을까. 월남에서도 反美운동이 거셌지만, 적어도 盧 정권 같은 정권은 없었다. 티우 정권은 강력한 反共이었다. 그래도 무너졌다. 물론 당시 월남군보다 지금의 한국군은 월등히 강력하고 깨끗하다. 당시 월남엔 중산층이 거의 없었지만 한국엔 건전한 중산층이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점과 비슷한 점들을 잘 비교하면 월남의 패망으로부터 한국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암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대책회의에서 월남 근무경력이 있는 李熺性 국방부 기획국장(나중에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은 한 참석자가 “아직 월남군이 건재하고 있지 않느냐”고 위기론에 의문을 제기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월남군은 벽돌로 지은 집과 같습니다. 기초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벽돌이 하나 빠져 기초가 기울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집니다.” 駐越 한국대사관에서는 해군 LST를 기다리면서 우선 대사관 가족들과 상사주재원들을 여객기편으로 내보내고 교민들에 대한 철수 권유, 월남 정부와의 교섭에 나섰다. 언제 망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월남 정부는 ‘적법 출국수속’을 요구했다. 출국비자를 받으라는 뜻인데 수년간 불법체류한 사람들과 세금을 안 낸 사람들이 문제였다. 4월 22일 우리 해군 LST 두 척이 구호물자를 싣고 사이공 외항인 뉴포트에 도착했다. 駐越 한국대사관은 구호품 전달행사를 거창하게 거행했다. 월남 사람들의 협조를 받기 위함이었다. 23일 오전부터 구호물자 하역작업이 시작되었다. 대사관이 철수 교민들의 승선시기를 26일로 잡아 놓았기 때문에 하역 시간을 천천히 끌어야 했다. 4월 25일 상부에서 두 척의 LST를 지휘하고 있던 權尙虎 대령에게 指示電文(지시전문)이 내려왔다. ‘즉시 하역을 중지하고 교포를 탑승시킨 뒤 귀국하라’는 것이 요지였다. 본부에서 본 월남사태는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었으므로 한국 해군함정이 월맹군에 억류되는 사태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金榮寬 대사와 權尙虎 대령은 현지 지휘관의 판단으로써 이 전문을 무시하고 교민들을 다 태워 가기로 결심했다. 26일 본부에서 즉시 귀국명령이 또 내려왔다. “귀 분대가 사이공에 체류한 채 메콩강이 봉쇄될 때 이에 따른 문제의 중요성과 그 결과를 감안하면 한시라도 체류할 수 없는 실정임을 명심하여 軍 통수계통의 지시에 의거 행동하라.” 金榮寬 대사는 權 대령에게 “여기까지 온 이상 대사의 지휘를 받으라. 나를 대사로 생각하지 말고 해군참모총장으로 생각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朴 대통령도 국방부에 대해서 “현지 대사의 의견대로 하라”고 정리해 주었다. 일부 교민들은 대사관이 피말리는 철수작전을 하고 있는데도 철수선을 탔다가 도로 내리고, 일부러 뒤로 빠지는 등 한심한 행동을 보였다. 이 광경을 본 해군 장병들은 “위기 때 협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고 울화통이 치밀었다”고 한다. 26일 오후 6시 30분 두 해군함정은 뉴포트항을 출발했다. 한 섬으로 데려다줄 월남 난민을 포함하여 약 2,500명을 실었다. 한국 교민들 외에 교민들과 결혼한 월남 여자들도 많았다. LST 두 척은 메콩강을 따라 내려가 바다로 나가는 야간 항해를 시작했다. LST 815 함장 李允道 중령은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으나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메콩강 주변은 미군이 싹 쓸어버렸기 때문에 레이더도 별 쓸모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강줄기를 대충 보면서 항로를 잡아 나가야 했다. 갑판에 불을 전부 켜고 난민 텐트도 쳤다. 이 배에 대한 포격을 면해 보려는 것이었다. 보통 5~6시간 걸리는 메콩강 하류 항해에 아홉 시간이 걸렸다. 새벽에 파도가 치는 바다를 만나니 그렇게 기쁠 수 없었다.” 한국 해군함정이 교민들과 난민들을 싣고 떠난 다음날 27일 아침 뉴포트항은 월맹군의 포격을 받고 크게 부서졌다. 두 해군함정 편으로 교민들이 떠난 시점에서 사이공에는 한국 공관원 10여 명과 교민 164명이 남은 것으로 집계되었다. 駐越 한국대사관은 4월 중순부터 비상대책위원회를 가동했다. 참석자는 金 대사 외에 공사 李大鎔(준장), 무관 정순영(대령), 정치참사관 이규수, 공보관 김기원 씨였다. 이 회의는 李 공사를 철수대책본부장으로 임명했다. 어느 날 정순영 무관이 월남군 총사령부에 갔다 오더니 이런 보고를 했다. “신문에 보면 戰況(전황)이 시시각각으로 바뀌고 있는데 총사령부에 가 보니 전투서열(Order of Battle)이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월남군 총사령부의 현황판이 마비되었다는 의미, 즉 전쟁수행 의지를 버렸다는 뜻이었다. 李 공사는 티우 대통령과는 미국에서 군사교육을 받을 때부터 아는 사이여서 사이공에서 고급정보를 쉽게 수집했다. 그는 미국 CIA 사이공 지부장을 통해서도 많은 정보를 수집해 와서 알려 주었다. 4월 21일 저녁 金基源 공보관은 NHK 지국장으로부터 “키신저와 레둑토가 4월 30일에 미국이 완전히 손을 떼는 데 합의했다고 한다. 일본 대사관도 극히 일부만 남겨 놓고 철수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날 대책회의에서 金 공사는 이 정보를 보고한 뒤 “대사관의 직원을 더 줄이고 몸을 가볍게 한 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자”고 말했다. 李 공사는 “아직은 월남군이 건재하고 있으니 그럴 시기가 아니다”라고 반론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견해가 맞서 결론을 내리지 못한 金대사는 金 공보관에게 그 정보를 대사의 私信(사신) 형식으로 朴 대통령에게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아주국장 대리였던 孔魯明 前 외무장관도 “본부에서보다 현지 외교관들이 월남 정세를 낙관적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었다”고 말했다. 월남을 잘 알수록, 그 속에서 생활한 사람일수록 급작스런 붕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간밤에 두 해군함정으로 교민들을 태워보낸 다음날 4월 27일 날이 밝자 대사관 뜰로 한국인들이 몰려들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보따리를 싸 들고 와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새로운 사태가 전개된 것이다. 4월에 들어서 월남의 再起(재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키신저 美 국무장관은 4월 18일 그레험 마틴 駐越 미국대사에게 미국인들과 월남인들의 철수를 서둘러 4월 22일까지 미국 공관원 수를 1,250명까지 줄여 놓으라고 지시했다. 이 수는 미국 대사관 뜰에서 항공모함까지 헬리콥터로 실어 나를 수 있는 1일분의 수송인원이었다. 마틴 대사도 월남의 생존 가능성을 높게 보았다. 그는 월남군이 중부고원 지방을 내주고도 후방으로 물러나 저항선을 설정하여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월남 정부의 붕괴가 눈앞에 다가오자 마틴 대사는 사이공에 연립정부를 만들어 권력을 월맹 측에 이양하는 동안 많은 월남인들을 철수시킬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다. 키신저 장관은 그런 판단은 월맹의 무자비한 행태를 잘 모르는 순진한 착각이라고 일축한 뒤 철수작전을 서둘 것을 지시했다. 4월 14일 미국 상원 외교분과위원회 소속 의원 全員(전원)이 포드 대통령을 찾아왔다. 이런 일은 우드로 윌슨 대통령 시절 이후 처음이었다. 그들은 월남 사람들을 많이 구출해 주기 위하여 미국인들의 철수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포드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전했다. <아이다호 출신 프랭크 처치 의원은 “우리에게 충성했던 월남 사람들을 다 구출하려다가는 또 다른 큰 전쟁에 휘말려 들지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정중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다만 며칠이라도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결정은 내가 합니다. 그 결과에 따른 책임도 내가 집니다.”> 인도지나 반도의 공산화를 막는다는 거대한 명분으로 월남戰에 들어갔던 미국의 목표는 이제 미국인과 월남인의 철수를 위해 며칠간이나마 시간을 버는 것으로 줄어들었다. 월맹군이 주도권을 잡은 戰場(전장)의 결과가 이런 수모를 강대국에 강요했다. 키신저는 4월 19일 워싱턴 주재 소련대사 도브리닌을 통해서 포드 대통령의 구두 메시지를 문서로 정리하여 브레즈네프 서기장에게 전달한다. 요지는 미국인들과 親美 월남인들을 철수시키기 위해서는 휴전이 필요한데 중재를 좀 해달라는 것이었다. 포드는 필요하다면 티우 정권을 물러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메시지는 또 사이공에서 탈출구로 쓰고 있는 탄손누트 공항이나 여객기를 월맹이 포격하면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월맹에 대해서 영향력을 행사하여 미국이 명예롭게 철수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도 곁들였다. <現 상황이 우리 양국의 관계를 위기에 빠뜨리지 않는 방식으로, 또 미국인들이 다른 국제문제를 보는 시각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 방향으로 종결되기를 바란다> “지키지 못하는 날에는 다 죽어야 한다” 朴 대통령 면담일지에 따르면, 金東祚 외무장관은 4월 30일 오후 5시 31분부터 6시 25분까지 朴 대통령에게 월남 교민 철수상황을 보고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 金 장관은 金榮寬 대사를 비롯한 공관원들과 교민들이 무사히 철수했다고 보고한 듯하다. 이 자리에서는 이런 대화가 오고 갔다고 전한다. 朴 대통령: “金대사가 들어오거든 즉시 다른 곳에 대사로 내보내시오.” 金장관: “현재로서는 자리가 나지 않습니다.” 朴 대통령: “거 왜 있잖아요. 韓丙起(한병기·칠레 대사)를 불러들이고 그쪽으로 보내면 되지 않소.” 마침 그 하루 전에 朴 대통령은 일시 귀국한 사위 韓丙起 대사를 청와대로 불러 저녁식사를 함께 했었다. 다음날 李大鎔 공사가 駐越 일본대사관에서 金東祚 외무장관 앞으로 보낸 구출요청 電文이 朴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화가 난 대통령은 金 대사의 귀임인사를 받지 않았다. 金 대사는 도의적 책임을 지고 대사직을 사임했다. 朴 대통령은 李大鎔 공사 일행을 구출해 올 것을 정보부 등 관계기관에 강력히 지시한다. 미국대사관을 통한 철수작전을 현장에서 지휘한 것은 마틴 대사였고, 이를 워싱턴에서 감독한 것은 키신저 국무장관이었다. 1999년에 나온 그의 두 번째 회고록 《再生의 시기》(Years of Renewal)에는 마틴 대사가 마지막 헬기를 타고 대사관을 떠났고 그때가 4월 30일 새벽 4시 58분으로 되어 있다. 이때 워싱턴에 긴급보고가 들어왔다. 美 대사관 철수작전을 통제하던 美 해병 9상륙여단의 병력 129명이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헬기가 투입되었다. 이 해병대까지 대사관 옥상을 통해 철수한 두 시간 뒤에 월맹군이 사이공 시내에 들어왔다는 것이 키신저의 기록이다. 키신저는 이 회고록을 쓸 때까지도 수백 명의 한국인과 월남 사람들이 마지막 철수 헬기를 타지 못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케이블 TV 프로그램에서 잘생긴 대령이 “우리는 대사관 뜰에 400명의 베트남 친구들을 남겨 놓고 떠났다”고 증언하는 것을 보고서 키신저는 그 대령을 수소문했다. 그는 육군대학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키신저는 회고록에서 이런 요지로 설명했다. <나는 아직도 그 사태를 이해할 수 없다. 나는 19번째의 마지막 헬기에 마틴 대사가 탔다는 보고를 받았고 이것으로 철수가 완료된 줄 알았다. 누군가가 대사관 출입문을 열어 주어 다른 그룹의 사람들이 들어와 당초 철수 예정인원을 초과한 것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키신저는 회고록에서 월남 정부가 망한 뒤에 親共(친공) 세력과 베트콩이 사라져 버린 점을 강조했다. <민 대통령과 각료들은 전원 체포되고 사라졌다. 서방세계에서 월남민주연합정부의 중심이 되어야 할 세력으로 선전되었던 베트콩도 민 대통령과 함께 사라졌다. 통일 이후 월남지역에 대한 자치권은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월맹의 선전술에 속았든지, 자신들의 僞善(위선)에 스스로 넘어갔든지 세계 언론은 월남戰에 대해 큰 오보를 했다. 기자들은 베트콩이 월남에서 自生한 反독재 민주화 세력이란 선전을 믿었다. 이 베트콩이 월맹의 지휘를 받고 있었고, 나중에는 14만 명의 월맹군이 내려와 베트콩 부대를 장악했으며, 70% 이상의 병력이 월맹군인이었다는 점을 미국 언론은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1975년 4월 30일 월맹 탱크가 사이공의 월남 대통령 관저인 독립궁 철문을 부수고 들어가 월맹 깃발을 올리고 있을 때 朴正熙 대통령은 중앙청에서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월남이 무조건 항복하는 과정을 똑똑히 목격했을 줄 압니다. 그동안 월남에서 反정부 운동을 하던 인사들이 지금 피란길을 걸으면서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공산군은 처음에는 티우 대통령만 물러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하더니 후임인 홍 대통령도 물러나라고 했고, 그런 뒤 민 대통령이 들어서자 그와는 협상을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월남의 反정부 인사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면 지금 피란길을 걷고 있으면서 그들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있는지 어떤지 궁금합니다. 앞으로 공산치하에서 그 反정부 인사들이 지금까지 했던, 인권과 자유를 달라는 그 주장을 계속 할 수 있을지 주의깊게 지켜봅시다.” 이날 밤 朴正熙 대통령은 비장한 日記(일기)를 남겼다. <월남공화국이 공산군에게 무조건 항복. 참으로 비통함을 금할 수 없다. 한때 우리 젊은이들이 파병되어 월남 국민들의 자유수호를 위하여 8년간이나 싸워서 그들을 도왔다. 延 파병 수 30만 명. 이제 그 나라는 멸망하고 월남공화국이란 이름은 지도상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참으로 비통하기 짝이 없다. 자기 나라를 자기들의 힘으로 지키겠다는 결의와 힘이 없는 나라는 생존하지 못한다는 엄연하고도 냉혹한 현실과 진리를 우리는 보았다. 남이 도와주려니 하고 그것만을 믿고 나라 지키겠다는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가 망국의 비애를 겪는 역사의 교훈을 우리 눈으로 보았다. 조국과 민족과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여하한 희생도 불사하겠다는 결의와 힘을 배양하지 않으면 망국하고 난 연후에 아무리 후회해 보았자 후회막급일 것이다. 충무공의 말씀대로 ‘必死卽生 必生卽死(필사즉생 필생즉사)’다. 이 강산은 조상들이 과거 수천 년 동안 영고성쇠를 다 겪으면서 지켜 오며 이룩한 조상의 나라이다. 조국이다. 우리가 살다가 이 땅에 묻혀야 하고 길이길이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서 지켜 가도록 해야 할 소중한 땅이다. 영원히 영원히 이 세상이 끝나는 그날까지 지켜 가야 한다. 저 무지막지한 붉은 오랑캐들에게 더럽혀서는 결코 안 된다. 지키지 못하는 날에는 다 죽어야 한다. 죽음을 각오한다면 결코 못 지킬 리 없으리라> 5월 2일 국무회의에서도 朴 대통령은 안보 위기를 이야기했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거의 비슷한 과정을 밟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建國(건국) 초기에는 국민들의 사기가 왕성하고 건설에 대한 의욕이 높아 外敵(외적)의 위협이 있더라도 능히 이를 격퇴할 수 있으나 위협이 없어지면 국민이 방심하여 사치해지고 그 같은 사치가 만성화될 때 쇠잔의 길을 걸었습니다. 지금 우리 눈앞에는 위기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침략자의 뜻이 성취될 경우 우리 민족사의 反轉(반전)을 초래할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이를 극복해야겠습니다.” 4월 30일 월맹군 탱크가 사이공의 독립궁(대통령 관저) 철문을 밀어 버리고 진입함으로써 월남전이 종결되고 인도지나 반도의 赤化가 현실화되자 다음 차례는 한반도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국민들 머리 위로 깔렸다. 5월 13일 월남 교민들을 태운 두 척의 해군 LST가 부산항에 들어왔다. 이날 오후 朴 대통령은 계엄령에 준하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한다. 그는 이로써 일체의 反정부 운동에 종지부를 찍으려고 했다. 긴급조치 9호 시대가 열린 것이다. 9호가 금지한 행위는 유언비어 유포에서부터 유신헌법 부정 반대 선동 왜곡행위와 학생들의 정치적 집회 및 시위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反정부 활동이었다. 국회의원이 한 발언은 면책이 되지만 이를 보도하거나 전파한 행위는 처벌할 수 있게 했다. 이 조치를 위반한 자에 대해서는 영장 없이도 체포 구금할 수 있다고 했다. 朴 대통령은 선포에 즈음한 특별 담화에서 “북한 공산집단이 작금의 비극적인 印支 사태에 편승하여 남침이 가능하다고 오판할 우려가 증대되었다. 미증유의 난국에 처해서 국민 각자가 해야 할 일은, 불필요한 국력 낭비와 국론 분열, 그리고 국민총화를 저해하는 일체의 행위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다”고 말했다. 이 조치에 대한 야당의 반대는 보도조차 될 수 없었다. 여론도 조용했다. 朴 대통령은 월남사태로 야기된 안보 위기를 반대세력을 잠재우는 데 이용했다. 그 효과는 1979년 초까지 갔다. 약 4년간의 정치적 안정이 월남사태와 긴급조치 9호로 가능했다. 이 기간 朴 대통령은 중화학공업 및 방위산업 건설을 기반으로 하는 자주국방력 건설에 매진한다. 그는 또 건설회사들이 중동에 진출하여 이곳으로 몰린 오일머니를 가져와 국내 경제 건설에 사용하도록 독려한다. 中東 건설시장에 한국 기업이 조직적으로, 대규모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월남전선에서 벌어진 각종 공사와 용역을 소화해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인 최초의 집단적 해외진출이었던 월남전은 끝났으나 거기서 배태된 한국인의 조직력과 야성이 또 다른 활동무대를 만든 셈이었다. |
[ 2009-04-03, 14:05 ] |
출처 : 치우천황
글쓴이 : 찌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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