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생명공학연구원 최인표 박사가 줄기세포로 만든 NK세포가 든 용기를 보이고 있다. NK세포는 암세포를 가장 먼저 공격하는 면역세포다./대전=이영완 기자 ywlee@chosun.com
환자 가족의 혈액 채취해 암세포 공격 'NK세포' 배양
환자에게 투입하는 새 방식
세계 처음… 거부반응 없어
전쟁에서 최전방 부대는 적군과 가장 먼저 전투를 벌이면서, 후방 부대가 반격을 준비할 시간을 벌어준다. 인체에서는 '자연살해세포(NK세포, Natural Killer cell)'가 그런 역할을 한다. 하지만 암환자에선 이 세포가 크게 약해져 있어 암세포에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한다. 국내 연구진이 이 문제를 줄기세포로 해결하는 방법을 처음으로 개발했다. 이미 국내에서 혈액암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시험이 진행 중이다.◆인체의 최전방 부대 새로 만들어 투입
"여기 붉은색 액체가 줄기세포입니다. 이것을 NK세포로 자라게 해 암 환자에게 주입하는 것입니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최인표 박사는 투명한 용기에 들어 있는 액체를 들고 "인체의 최전방 부대를 복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면역세포에는 B세포와 T세포도 있지만, 이들은 암세포가 들어왔는지 확인하고 한참 뒤에나 항체 등을 분비해 암세포를 무력화시킨다. 말하자면 NK세포는 최전방 부대이고, B세포와 T세포는 후방부대인 셈이다. NK세포는 B·T세포의 공격을 유도하는 신호도 보낸다.
NK세포를 암 치료에 사용한 것은 1980년대 중반부터다. 미국 국립암연구소(NCI)가 암 환자에서 NK세포를 분리한 다음, 실험실에서 수를 늘려 다시 환자에 주입했다. 하지만 주입한 세포 중 10~20%만이 치료 효과를 보였다. 암 환자의 NK세포는 수나 힘이 정상인보다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2002년부터 시작된 2세대 치료법은 환자 대신 건강한 사람의 NK세포를 이용하는 것이지만 역시 문제가 있었다. 건강한 사람이라도 혈액에 NK세포가 많지 않아 치료에 쓸 만큼 충분한 양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실험실에서 증식도 잘 되지 않았다.
최 박사팀이 개발한 3세대 치료법은 건강한 사람의 혈액에서 원시세포인 줄기세포를 뽑아내 NK세포로 자라게 하는 것이다. 줄기세포는 조건이 맞으면 원하는 세포를 무한정 만든다. 줄기세포로 NK세포를 만든 것은 최 박사팀이 세계 최초다. 지난 9월까지 미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고 임상시험 중인 줄기세포 치료제는 탯줄혈액(제대혈)이나 골수, 지방세포 등에서 추출한 이른바 성체줄기세포에서 2228종, 수정란에서 얻은 배아줄기세포가 2건. 하지만 대부분 질병으로 손상된 세포를 정상세포로 대체하는 것이다.
최 박사팀은 환자 가족의 줄기세포를 이용해 면역거부반응도 크게 줄였다. 2세대 치료법은 전혀 모르는 사람의 NK세포를 이용하기 때문에, 말하자면 소수의 외국 군인들을 불러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최 박사팀의 3세대 치료법은 우리나라에 맞는 젊은 군인들을 새로 길러 대규모로 투입하는 셈이다.
또 말기 혈액암(백혈병) 환자는 가족으로부터 골수를 이식받은 경우가 많다. 따라서 골수를 제공한 가족의 줄기세포로 NK세포를 만들어 주입하면 면역거부반응을 대부분 회피할 수 있다. 연구진은 이미 동물실험에서 줄기세포로 만든 NK세포가 혈액암, 간암, 대장암 세포를 완전히 박멸한 결과를 얻었다.
NK세포를 만드는 과정은 크게 3단계로 나뉜다. 환자 가족에게 성장인자를 주사한다. 그러면 줄기세포가 골수에서 혈액으로 빠져나와 쉽게 뽑아낼 수 있다, 그전에는 직접 척추에 주사기를 꼽아 골수 혈액을 추출했다.
다음엔 줄기세포에만 달라붙는 물질을 주입한다. 이 물질에는 자석처럼 자성을 띠는 물질도 달라붙어 있다. 따라서 모래가 뿌려진 책받침 밑에 자석을 대고 움직이면 쇳가루가 따라오듯, 자기장을 걸어주면 줄기세포만 따로 뽑아낼 수 있다.
핵심 과정은 줄기세포를 NK세포로 자라게 하는 것이다. 연구진은 줄기세포가 NK세포로 자랄 때 시기별로 특이하게 작동하는 유전자를 찾아냈다. 이후 이 유전자의 스위치를 켤 수 있는 물질을 단계마다 주입해 NK세포를 만들었다. 국내외 특허 등록된 핵심 기술로 2005년 '셀(Cell)' 자매지인 '이뮤니티(Immunity)'에도 발표됐다.
◆세포 주입량 결정이 관건
최 박사는 서울아산병원 혈액종양과 이규형 교수팀과 말기 혈액암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진행 중이다. 최 박사는 "관건은 환자에 따라 적절한 NK세포 주입량을 결정하는 것"이라며 "혈액암에서 효과가 입증되면, 간암, 대장암, 뇌암으로 발전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
치료 효과를 더욱 높이기 위한 국제협력도 진행 중이다. 미국 워싱턴대는 또 다른 면역세포인 T세포를 암 치료에 이용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최 박사팀은 교육과학기술부의 글로벌연구실(GRL)로 선정돼 워싱턴대와의 공동연구를 진행 중이다. 말하자면 암 치료 전선에 최전방 부대와 후방부대를 동시에 투입하자는 것이다.
☞ NK세포(자연살해세포)
혈액에 있는 백혈구의 일종으로, 주로 골수에서 만들어져 암세포를 직접 파괴한다. 백혈구 면역세포 중 NK세포의 비율은 5~10%이며, 정상인의 경우 NK세포 수는 약 50억~1000억 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가면역질환 등 각종 난치성 질병과 다른 면역세포의 기능조절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