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민족사의 재발견

弱者가 선택한 전쟁-'羅唐戰爭史 硏究'를 읽으면서

화이트보스 2009. 11. 2. 10:45

弱者가 선택한 전쟁-'羅唐戰爭史 硏究'를 읽으면서
著者는 <자신을 숨기면서 기상의 변화를 기다리는 능력은 신라인들의 本性이었다>고 평하였다.
趙甲濟   
 週末에 '羅唐戰爭史 硏究'(아세아문화사, 2006년, 2만3천원)란 책을 읽었다. '弱者가 선택한 전쟁'이란 부제가 인상적이었다. 弱者는 전쟁을 강요당하는 경우가 많지 스스로 전쟁을 결심하기 어렵다. 그런데 新羅 지도부(文武王-金庾信 등)는 당시 세계최강대국이던 唐을 기습하는 전쟁을 선택하였다. 著者인 徐榮敎(충남대 인문과학 연구소 연구원)씨는 <국제정세의 판을 읽고 唐과 전쟁을 결정했던 신라지배층의 결단력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고 썼다.
 
 唐과 연합하여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 唐이 신라마저 屬國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온갖 모욕을 참아냈던 것은 新羅지배층이었다. 著者는 <자신을 숨기면서 기상의 변화를 기다리는 능력은 신라인들의 本性이었다>고 평하였다.
 
 新羅에 의한 三國통일 과정은 唐의 입장에서 보면 한반도 평정 과정이었다. 唐은 신라와 손을 잡고 백제, 고구려를 멸한 후 그 新羅마저 屬國化하려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新羅는 서기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직후부터 唐의 이 戰略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나 참을 수밖에 없었다.
 
 당은 663년에 신라영토에 계림주대도독부를 설치하고 문무왕을 도독으로 임명하였다. 신라를 당의 한 州로 본 것이다. 백제는 멸망하였으나 그 땅의 지배권을 唐이 행사하고 있었다. 664년 唐은 4년 전에 끌고 갔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데리고 와서 舊백제땅을 관할하는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였다. 그 이듬해 唐은 문무왕에게 부여융과 같은 자격으로 형제의 盟約을 하도록 강요하였다. 문무왕은 이를 받아들였다.
 
 서기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었을 때 항복한 부여융은 뒤에 문무왕이 되는 金法敏 앞에 끌려나왔다. 三國史記 태종무열왕條는 드라마틱한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法敏은 융을 말 앞에 꿇리고 그 낯에 침을 뱉으며 꾸짖기를, "지난 날 너의 아비가 내 누이를 원통하게 죽이고 옥중에 묻어 나로 하여금 20년간 마음 아프고 머리를 앓게 하였으니, 오늘의 네 목숨은 나의 손에 있다"하니, 융은 땅에 엎드려 아무 말이 없었다>
 
 당의 강요에 의하여 문무왕은 자신이 침을 뱉었던 그 부여융과 형제가 되어 사이 좋게 지내기로 약속하였던 것이다. 당은 신라와 舊백제를 같은 점령지로 간주한 셈이다. '羅唐戰爭史 硏究'에서 서영교씨는 <하지만 신라는 당에 책을 잡히지 않고 여기에 철저히 순응하였으며, 唐의 어떠한 모욕에도 인내하고 시간을 기다렸다>고 썼다.
 
 <하지만 바람의 방향을 응시하던 신라인들은 폭풍이 西域 상공에 떠 있고, 토번이 그 폭풍의 눈이 되리라는 것을 직감하였다. 당에 순종적이었던 신라는 670년 3월 단숨에 태도를 돌변하였다. 당의 힘이 한반도에 미치지 못할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비로소 사정 없이 덤벼들었던 것이다. 가장 힘 있고 노련한 세계제국 唐조차도 기만할 수 있는 신라의 인내의 탁월함은 무서울 정도이다>
 
 670년 지금의 티벳에서 일어난 토번은 唐이 장악하고 있던 실크로드를 급습하였다. 唐은 大軍을 그쪽으로 보내야 했다. 신라는 이 틈을 타서 전쟁을 일으켰다.
 
 저자 徐榮敎씨는 세계제국 唐과 전쟁을 치르고 살아남아 독립국가를 유지하였던 신라의 능력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랜 시련을 통하여 민족의 유전자로 양성된 결과라고 분석하였다.
 
 신라는 초기엔 고구려의 보호를 받아 간섭을 많이 받았다. 그 후 신라는 백제와 손을 잡고 고구려의 南進 정책에 對抗하였다. 118년의 羅濟동맹 후 신라 진흥왕은 백제 聖王과 연합, 고구려를 쳐서 漢江 상류지역을 차지하였다. 그 2년 뒤 신라는 태도를 표변하여 동맹국이던 백제가 점령하였던 한강 下流지역까지 먹어버렸다. 聖王은 화가 나서 신라를 치려 하였으나 역습을 받아 戰死하였다.
 
 <결정적 순간에는 동맹국을 배반하고 등에 칼로 변신하는 것이 신라였다. 경주분지의 조그만 城邑국가였던 신라가 이윽고 7세기 중반에 唐을 끌어들여 麗濟 兩國을 멸망시키고 한반도의 주인이 되었다. 이러한 괄목상대한 발전은 신라가 결정적인 순간에 얼마나 자기 변신을 대담하고 완전하게 해왔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對唐決戰으로 알려진 羅唐전쟁은 韓民族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쟁이다.
 
 1. 이 전쟁은 신라지배층이 선택한 전쟁이다. 임진왜란이나 한국전쟁처럼 강요된 전쟁이 아니었다. 전쟁을 결심하고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民族은 생존할 자격을 갖게 된다.
 
 2. 이 전쟁은 민족의 운명을 놓고 세계최대 强國을 상대로 싸운 정면승부였다.
 
 3. 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신라는 國力을 총동원하였다. 군사력뿐 아니라 외교력, 정치력, 의지력, 그리고 하늘의 힘까지 빌리려고 하였다.
 
 4. 이 전쟁에서 신라는 백제, 고구려 遺民들을 신라軍에 편입시켜 唐을 상대로 같이 싸웠다. 여기서 同族의식이 생기기 시작한다.
 
 5. 신라지배층은 진행중인 토번과 唐의 전쟁에 완급을 맞추어 전쟁의 强度를 조정하여갔다. 놀라운 自主性과 국제감각, 그리고 현실주의의 종합이었다.
 
 6. 신라가 이 전쟁에 승리한 덕분으로 우리는 지금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으로 살고 있다.
 
 7. 신라의 삼국통일은 韓民族을 만들어내는 씨를 뿌렸다. 신라가 보여준 決鬪정신은 한민족의 無意識에 남아 있고, 위기 때마다 나타난다.
 
 
 弱者의 입장인데도 자존심과 自主性을 지키기 위하여 세계최대강국을 상대로 전쟁을 걸었던 신라의 후손들은 지금 역사상 가장 잘 막고 잘 살면서도 동맹국을 돕기 위하여 아프가니스탄에 1개 연대도 보낼 수 없는 흐리멍텅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1300년 전의 신라보다 물질적으로 발전한 대한민국이지만 정신력 부문에선 훨씬 퇴보하였다. 깽판세력에게 끌려다니는 李明博 정부와 唐제국과 승부한 文武王을 비교하면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우리의 유전자 속에는 분명히 이런 신라정신이 남아 있을 것이다. 문제는 국가 지도층이 이 힘을 自覺하고 과감히 동원하느냐이다. 한국정부가 중국정부에 대하여 "당신들이 만약 한반도 통일을 방해한다면 우리는 신라의 對唐결전 자세를 취하겠다"고 하면 알아들을 것이다. 신라의 당돌함을 깊이 체험하였던 漢族은 그 뒤 한반도의 歷代 왕조와는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 신라통일 이후 漢族이 만든 중국 왕조는 한번도 한반도를 공격한 적이 없다. 신라의 對唐결전은 漢民族에게 韓民族에 대한 존경심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다가오는 통일기에 신라의 對唐결전 의지를 한국의 對中결전 의지로 전환하여 준비한다면 전쟁 없이도 자유통일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671년 문무왕은 唐將 薛仁貴가 신라의 對唐결전 태세 대하여 문책하는 글을 보내오자 이에 답장을 쓴다. 삼국사기에 실린 答薛仁貴書는 천하의 名文이다. 유학자 强首가 썼다는 설이 있다.
 
  문무왕은 신라가 백제 멸망 뒤 이곳에 주둔한 漢兵과 고구려 원정 唐軍에 대한 군량미 수송의 2중 임무를 어떻게 수행하였는가를 절실하게 적고 있다.
 
 
  <6월에 先王(태종무열왕)이 돌아가서 장례가 겨우 끝나고 상복을 벗지 못하여 부름에 응하지 못하였는데, (황제의) 勅旨에 신라로 하여금 평양에 軍糧을 공급하라고 하였소. 이때 웅진에서 사람이 와서 府城의 위급함을 알리니, 劉德敏총관은 저와 더불어 상의하여 말하기를, "만약 먼저 평양에 군량을 보낸다면 곧 웅진의 길이 끊어질 염려가 있고, 웅진의 길이 끊어지면 머물러 지키는 漢兵이 敵의 수중에 들어갈 것입니다"라고 하였소.
 
  12월에 이르러 웅진의 군량이 다하였으나 만약 웅진으로 군량을 운송한다면 칙지를 어길까 두려웠고, 만약 평양으로 향하게 운송한다면 웅진의 양식이 떨어질까 염려되었으므로, 老弱者를 보내어 웅진으로 운송하고 강건한 精兵은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으나 웅진에 군량을 보낼 때 路上에서 눈을 만나 人馬가 다 죽어 100에 하나도 돌아오지 못하였소.
 
  劉총관은 김유신과 함께 군량을 운송하는데 당시에 달을 이어 비가 내리고 風雪로 극히 추워 사람과 말이 얼어죽으니 가지고 가던 軍糧을 능히 전달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평양의 大軍이 또 돌아가려하므로 신라의 兵馬도 양식이 다하여 역시 회군하던 중에, 병사들은 굶주리고 추워 수족이 얼어터지고 路上에서 죽는 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소. 이 군사가 집에 도착하고 한 달도 못되어 웅진 府城에서 곡식 종사를 자주 요청하므로 前後에 보낸 것이 수만 가마였소.
 
  南으로 웅진에 보내고 北으로 평양에 바쳐 조그마한 신라가 양쪽으로 이바지함에, 人力이 극히 피곤하고 牛馬가 거의 다 죽었으며, 농사의 시기를 잃어서 곡식이 익지 못하고, 곳간에 저장된 양곡은 다 수송되었으니 신라 백성은 풀뿌리도 부족하였으나, 웅진의 漢兵은 오히려 여유가 있었소. 머물러 지키는 漢兵은 집을 떠나온 지 오래이므로 의복히 해져 온전한 것이 없었으니 신라는 백성들에게 권하여 철에 맞는 옷을 보내었소. 導護 劉仁願이 멀리 와서 지키자니 四面이 모두 적이라 항상 백제의 침위가 있었으므로 신라의 구원을 받았으며, 1만 명의 漢兵이 4년을 신라에게 衣食하였으니, 仁願 이하 병사 이상이 가죽과 뼈는 비록 漢나라 땅에서 태어났으나 피와 살은 신라의 育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唐軍의 皮骨은 당나라 것이지만 당신들의 血肉은 신라 것이오"라고 부르짖듯이 말한 文武王의 이 절규야말로 신라가 온갖 고통과 수모를 견디면서 삼국통일의 大業을 위해 희생했던 심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문장이 答薛仁貴書의 한 絶頂이다.
 
  신라가 백제지역 주둔 唐軍과 고구려 원정 唐軍에게 동시에 군량미를 공급하기 위하여 노약자까지 동원하여야 했던 상황에 대한 묘사는 르포 기사를 읽는 것처럼 생생하다. 이런 고통을 지배층과 백성들이 장기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신라 사회의 내부 단결이 잘 유지되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唐은 신라 지배층 내부의 분열을 기다렸으나 일어나지 않았다. 신라가 對唐 결전을 통해서 삼국통일을 완수할 수 있었던 데는 내부 단합과 이에 근거한 동원체제의 유지가 결정적 요인이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피신중이던 仁祖가 淸太宗에게 보낸 굴욕적인 편지와 文武王의 당당한 답장을 비교하면 新羅의 自主정신과 조선의 事大主義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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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13일 이종은 강화를 애걸하는 국서를 보냈다.
 
 
 
 
  근자에 저희 작은 나라의 재신(宰臣)이 글을 받들고 군문(軍門)에 가서 품청(稟請)하고 돌아와 말하기를, 황제께서 장차 다음 명령이 있을 것이라고 하여, 저희 작은 나라의 군신은 목을 늘이고 발꿈치를 돋우어 날마다 폐하의 말씀을 기다렸습니다마는 이제 이미 열흘이 넘도록 잘잘못의 말씀이 없으시므로 힘이 빠지고 정성이 핍박하여 다시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직 황제께서는 통찰하시기 바랍니다.
 
  저희 작은 나라가 전에 대국의 은혜를 입어 외람되게 형제의 의를 하늘과 땅에 밝혔으니, 비록 국토에는 구분이 있으나 정의(情意)에는 간격이 없어 스스로 자손만대에 끝없는 복이 되리라 했는데 어찌 맹약할 때 마신 쟁반의 피가 미처 마르기도 전에 의심과 틈이 생겨서 위급한 화에 떨어져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줄을 짐작했겠습니까?
 
  그러나 그 유례를 찾아보면 모든 것이 다 저의 천성이 유약하여 잘못을 저지르고, 모든 신하가 어리석어 잘 살피지 못하여 오늘의 일이 있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 책망할 뿐 다시 무슨 말이 있겠습니까? 다만 형의 아우에게 대한 생각으로 잘못이 있음을 보면 노하여 꾸짖는 것이 물론 마땅합니다. 그러나 책망이 너무 엄하면 도리어 형제의 의리에 틈이 생길 것이니, 어찌 하늘이 괴이하게 여기실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희 작은 나라는 궁벽한 바다 한 구석에 있어, 오직 시서(詩書)를 일삼고 전쟁을 익히지 않았습니다. 약자가 강자에 복종하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이 떳떳한 이치인데, 어찌 감히 대국과 더불어 서로 겨루려 하겠습니까?
 
  다만 저희는 대대로 명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원래 군신의 명분이 정해져 있습니다. 일찍이 임진년의 난에 저희 작은 나라의 존망이 아침저녁에 달려 있을 때, 신종황제(神宗皇帝)께서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백성을 물불 속에서 구해 주셨으므로 저희 작은 나라의 백성은 아직까지 마음속 깊이 새겨 지니고 있어, 차라리 대국에 죄를 지을지언정 차마 명나라를 배반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그 은혜가 두터워서 사람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켰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 아닙니다. 진실로 능히 그 백성의 목숨을 구할 수 있고 그 종묘사직의 위급을 구할 수 있는 자라면, 군사를 내어 어려움을 구원하는 것과 군사를 철퇴하여 생존을 도모하게 해주는 것과는 그 일이 비록 다르지마는 그 은혜는 결국 같습니다.
 
  지난해 저희 작은 나라가 어리석고 착각해서 일 처리를 잘못하여 여러 번 대국의 간곡한 가르치심을 입었습니다마는, 오히려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대국의 군사가 오게 하여 군신과 부자가 오래 외로운 성에 있어 군색하기가 또한 심합니다.
 
  진실로 이때 있어서 대국이 마음을 돌이키시어 저희가 잘못을 버리고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허락하셔서 종묘사직을 보존하고 오래 오래 대국을 받들게 하신다면, 저희 작은 나라의 군신들은 감격하여 장차 마음에 깊이 새겨 받들어 자손 영원한 세월에 이르도록 잊지 않을 것이요, 천하가 이를 들으면 또한 대국의 위엄과 신망에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이는 대국이 한꺼번에 큰 은혜를 동토(凍土)에 맺고, 넓은 명예를 만국에 베푸시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오직 한때의 생각을 시원하게 하시고자 끝내 병력으로써 형제의 은혜를 상하고, 스스로 새로워지려는 길을 막아 여러 나라의 소망을 끊으신다면 그것은 또한 대국으로서도 장구한 계책이 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황제의 고명(高明)하심으로 어찌 이러한 점을 생각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가을이 되면 만물이 죽고 봄이 오면 소생하는 것이 천지의 도리요, 약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망하는 자를 구원하는 것이 패왕(覇王)의 사업입니다. 이제 황제께서는 영무(英武)한 방략으로 모든 나라를 무마 안정시키신 다음, 새로이 대호(大號)를 세우시고 관온인성(寬溫仁聖) 넉 자를 내세우셨습니다. 이는 장차 천지의 도리를 본받으시어 패왕의 사업을 회복하려 하심이니, 저희 작은 나라와 같이 전의 허물을 고치고 넓으신 비호를 받고자 하는 자는 버림받지 않을 줄 믿고, 이에 구구한 말씀을 드려 명령을 내리시기를 청합니다.
 
 
 
 
  1월 16일 청군은 초항(招降 항복하라)이라고 쓴 깃발을 망월봉(望月峯 : 남한산성 동쪽에 있음) 아래에 세워 놓았다.
 
 
 
 
  1월 17일 청 태종이 항복을 요구하는 국서를 보냈다. 청 태종은 명과 조선의 그릇된 화이관(華夷觀)을 통렬히 질책하고 있다.
 
 
 
 
  대청국 관온인성황제는 조선 국왕에게 조서를 내려 깨우치게 한다.
 
  보내온 글에 ‘책망이 너무 엄하면 도리어 형제의 의리에 틈이 생길 것이니 어찌 하늘이 괴이하게 여기시는 바가 되지 않겠느냐’ 했는데 짐이 정묘년의 맹약을 중히 여겨 일찍이 너희 나라가 맹약을 깨트린 일을 여러 번 타일렀으나 너희는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탄에 빠져있는 백성을 구원하지 않고 먼저 맹약을 배반했다.
 
  너희 변방 신하에게 준 글을 짐의 사신 융알아대(英俄兒大 : 용골대)가 얻어, 비로소 너희 나라가 전쟁할 생각임을 확실히 알고, 짐은 곧 춘신사(春信使)․추신사(秋信使)와 여러 상인들에게 ‘너희 나라가 이처럼 무례하니 장차 너희 나라를 칠 것이다. 돌아가거든 너희 왕 이하 서민에게까지 말하라’고 일렀다.
 
  이렇게 분명히 타일러 보냈으니 짐은 속임수로 군사를 일으킨 것이 아니다. 또한 글을 갖추어 너희가 맹약을 깨트리고 말썽을 일으킨 일을 하늘에 고한 뒤에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 짐은 네가 맹약을 배반했으므로 스스로 천벌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실로 맹약을 배반했기 때문에 재앙이 내린 것인데, 너는 어찌하여 도리어 아주 깨끗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처럼 하늘 천(天)자 한 자를 억지로 끌어다 붙이느냐?
 
  너는 또 말하기를 ‘소방이 궁벽한 바다 한 구석에 있어 오직 시서(詩書)를 일삼고 전쟁을 익히지 않았다’ 했으나 지난번 기미년(己未年)에 너는 까닭 없이 우리를 침노하여, 짐은 너희 나라가 틀림없이 병사(兵事)를 익히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이제 또 말썽을 일으켰으니 너희 군사가 더욱 정예해진 것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병사를 익히지 않았다고 고집하는 것이냐? 그러나 너는 원래 군사를 좋아하는 자이니, 아직도 그만둘 생각이 없으면 이제부터 다시 훈련을 더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너는 또 말하기를 ‘임진년의 난에 나라가 존망이 아침저녁에 달려있을 때 신종황제(神宗皇帝)가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백성을 물불 속에서 구해 주었다.’고 했는데 천하는 크고 또한 천하에는 나라가 많다. 너희를 구해 준 것은 명나라 하나뿐인데 어떻게 천하 모든 나라의 군사가 다 왔다는 것이냐? 명나라와 너희 나라는 허탄하고 망령됨이 한이 없어 끝내 그만두지 못하는구나. 이제 고단하게 산성을 지켜 명이 아침저녁에 걸려 있는데도 오히려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이 따위 헛소리만 하여 무슨 이익이 있다는 것이냐?
 
  너희는 또 말하기를 ‘오직 한때의 생각을 시원하게 하고자 끝내 병력으로써 형제의 은혜를 상하고 스스로 새로워지려는 길을 막아버려 여러 나라의 소망을 끊어 버린다면 그것은 또한 대국으로서도 장구한 계책이 되지 못할까 두렵다. 황제의 고명(高明)함으로 어찌 이러한 점을 생각하지 않으랴.’고 했는데, 그렇다! 네가 형제의 우의를 깨트리고, 전쟁을 모책하여 군사를 조련하고, 성을 수축하고 길을 닦고 수레를 만들고 군기를 마련하여 오직 짐이 명나라 치는 것을 기다려 그 틈을 타서 몰래 군사를 내어 우리나라를 해치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나라에 은혜를 베푼 것이 있다고 할 수 있느냐? 무릇 이러한 것을 너희는 스스로 모든 사람의 신망을 끊지 않는 것이라 하고, 스스로 고명하다 하고, 스스로 장구한 계책이란 말이냐?
 
  또 말하기를, ‘황제는 영무(英武)한 방략으로 모든 나라를 무마 안정시켜 새로이 대호(大號)를 세우고 관온인성(寬溫仁聖) 넉 자를 내세웠다. 이는 장차 천지의 도리를 본받아 패왕이 사업을 회복하려 함이라.’고 했지마는, 짐의 안팎 여러 왕과 대신들이 진작부터 이 존호를 짐에게 올린 것이다.
 
  그러나 짐은 패왕의 사업을 회복하려 하지 않는다. 까닭 없이 군사를 일으켜 너희 나라를 멸망시키려 하고, 너희 백성을 해치려 한 것이 아니다. 군사를 일으킨 까닭은 정히 잘잘못을 펴고 밝히고자 함이다.
 
  천지의 도리는 선행을 하는 자에게는 복이 오고, 악행을 하는 자에게는 재앙이 오므로 지극히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다. 짐은 천지의 도리를 몸소 행하여 마음을 기울여 따르고 순종하는 자는 후히 보양(保養)하고, 형세를 따라 항복하는 자는 편안하고 무사하게 해 주지마는, 명령을 거역하는 자는 하늘을 받들어 치고, 무리를 모아 악한 짓을 하거나 칼을 잡아 어지럽히는 자는 목을 베며, 완고한 백성으로 순종하지 않는 자는 가두고, 성질이 억세어 굴하지 않는 자는 깨닫도록 하며, 교활하고 속이는 자는 끝까지 나무란다.
 
  이제 네가 짐과 적이 되었으므로 군사를 일으켜 여기에 왔다. 만약 너희 나라가 죄다 짐의 판도(版圖)에 들어온다면, 짐이 어찌 길러 보호하여 赤子와 같이 사랑하지 않겠느냐? 또한 너희는 하는 말과 행동이 전연 서로 같지 않다. 內外․前後에 오고간 문서로서 우리 군사가 얻은 것 중에는 왕왕 우리 군사를 노적(奴賊)이라 불렀는데, 이것은 너희 군신이 평소에 우리 군사를 도둑(賊)으로 불렀기 때문에 말을 하는 동안에 무심코 그렇게 나온 말일 것이다.
 
  몸을 숨기고 몰래 가지는 것을 도둑이라고 한다고 들었는데, 내가 과연 도둑이면 너는 어찌하여 잡지 않고 내버려 두어 불문(不問)에 붙이느냐? 너희가 비방하고 욕하는 짓은 이른바 속은 羊이고 겉만 호랑이 껍질이란 속담이 너를 두고 한 말이다.
 
  우리나라 풍속에 ‘사람은 행동은 민첩한 것이 귀하고 말은 겸손한 것이 귀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늘 행하여 책잡히지 않고, 말하여 부끄럽지 않고자 경계한다. 그런데 너희 나라는 속이고 교활하고 간사하고 헛수작하기가 날로 깊이 스며들어, 조금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이와 같은 망령된 말을 거리낄 줄 모르고 함부로 하는구나!
 
  이제 네가 살고자 하느냐? 마땅히 서둘러 나와서 양편 군사가 한 번 싸워 보자. 하늘이 스스로 어떤 처분을 내리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