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百濟) 관련
사료로 없애버린 백제강역과 우리역사 현실을 다시 살펴 보니 기가 찰 일이다!!!
백제는 한반도 서남부에 위치했던 작은 나라로 배워 왔고 인식하고 있다.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내용을 보면 “백제가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하게 된 것은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의 일 이었다. 이때 백제는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마한의 남은 영역을
정복하여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렀으며 북으로는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공격 하였다. 동시에, 낙동강 유역의 가야 여러 나라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그리하여 백제는 오늘의 경기, 충청, 전라도와 낙동강 중류 지역, 강원, 황해도의 일부를 포함하는 넓은 영토를 확보 하였다. 또 , 백제는 수군을 증강시켜 중국의 요서
지방으로 진출 하였고, 이어서 산동 지방과 일본의 규수 지방에까지 진출 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였다.“
이상이 우리나라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백제가 전성기 한때 수군을 증강시켜 중국의 요서, 산동지방까지 진출 하는 등 활발한 대외활동을 벌렸지만 백제의 영토는 한 발짝도 한반도 밖으로 벗어난 적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 사료를 자세히 살펴보면 백제의 영토 범위가 한반도에 국한 되지 않고 중국대륙 동북, 동남지방에 걸쳐 넓은 영토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근거가 여러 군데서 확인 된다.
1. 이해에 위로(魏虜)가 또 기병(騎兵) 수십만 명을 발동시켜 백제를 공격하여 그 국경 안으로 들어갔다. 백제왕 모대(牟大: 동성왕<東城王: 무령왕의 아버지>)가
장수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贊首流), 해례곤(解禮昆), 목간나(木干那)를
파견하여 군사를 인솔하고 위나라 군대를 습격해 크게 격파 하였다.
오늘의 하북성 북경근처 유하(濡河: 현재는 난하) 부근이다.
남제서 권58 열전 제39 동남이 백제 전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서기494~498)
2. 자치통감(資治通鑑) 권 136 제기2 세조 무 황제 상지 상 영명6년 서기488년 조에 “위나라가 군대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지만 백제에게 패배 하였다.
3. 남제문기(南濟文紀) 상명제표(上明帝表)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모대(백제왕: 동성왕)가 봉함을 받은 해에 위로가 기병 수십만 명을 발동시켜 백제를 공격했는데 모대장수 사법명 등을 보내 위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크게 패배 시켰다.”
이때, 북위는 남제와 함께 중원을 반분하여 지배하던 강대국이었다. 당시 백제는 글안, 고구려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중국의 동북지방을 지배한 강대국 이었다는 사실이 북위와의 전승기사에서 여실히 증명된다고 할 것이다.
4. “백제는 처음에 마한(馬韓) 54국 중의 하나였다. 진(晉 ) 이후에 여러 나라를 병합하고 마한의 옛 영토를 확보 하였다.” 라고 중국의 여러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흠정만주원류고( 欽定滿洲源流考) 강역 조에 “마한은 북쪽으로 낙랑(樂浪)과 인접해 있었다.” 관할은 진평 복주 영해에 있었다.(여기는 오늘의 요서 지방을 말한다.)
5. 자치통감 권97 진서19 에 부여(夫餘)가 녹산(鹿山)에 있다가 백제의 침략을 받아 부락이 쇠산(衰散)하여 서쪽으로 연나라 가까이 옮겨갔다. 고 기록되어있다.(발해의 부여부 이다.)
봉사행정록(奉使行程錄) 안설(按說)에 기록하기를 “개원(開原)은 바로 한(漢)나라 때 夫餘의 영역인데 백제의 구국(舊國)이다. 오늘날 요녕성 북쪽에 개원시가 있고 거기서 북으로 더 올라가면 부여시가 있었다. 지금은 송원(松原)으로 명칭이 변경 되었다.
6. 구당서와 신당서의 기록에는 “백제는 원래 5部 37郡 200城 76만호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씨조선(李氏朝鮮) 초기에 한반도의 인구가 약 100만(약10만호) 명이 넘을 정도였으니 백제의 위치가 어디어디였는지는 저절로 알 수 가있는 것이다.백제의 5도독부 가운데 하나인
동명도독부는 요동의 개원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7. 송서 동이전과 남제서 동남이전 에 의해서 백제에서 시행했던 왕후제도(王侯制度)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다. 우현왕(右賢王), 좌현왕(左賢王), 면중왕(面中王), 도한왕(都漢王), 팔중후(八中候), 아착왕(阿錯王), 매로왕(邁盧王), 불사후(弗斯候), 매라왕(邁羅王), 벽중왕(辟中王), 불중후(弗中侯), 면중후(面中侯)와 같이 8왕과 4후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백제에서 임명한 왕과 제후(王과 諸侯)들의 명칭인데 동양의 전통사회에서 왕과 후(王侯)를 거느린다는 것은 황제국의 천자(皇帝國의 天子)만이 가능한 일인데다 이는 고구려나 신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백제의 경우에만 발견되는 특수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흠정만주원류고 권3 부족3 백제 조에는 “백제는 국내에 여러 왕과 후를 세워 훈의(勳懿)에 보답하였으며 송. 제 시대로부터 이미 그러 하였다. 그렇다면 이는 국토는 넓고 백성은 많았다는 증거이다.”
또 남제서 에는 백제에서 임명한 태수(太守)들 중에 광양태수(廣陽太守). 광능태수(廣陵太守). 성양태수(城陽太守) 등이 있는데 광양. 광능. 성양 이란 지명은 당시 한반도에는 없고 중국에 있던 지명 들이다. 이것은 남북조 시대 때 백제의 영토범위가 오늘의 중국 동북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동남방의 하북성. 강소성. 산동성까지
확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8. 최치원이 당나라로 가서 부성태수(富城太守: 서기866년)로 있을 때 태사시중에게 올린 글에서 “백제가 전성기에는 강한 군대가 백만이나 되어서 남으로는 오월(吳越)을 침략하고 북으로는 幽, 燕, 濟, 魯의 지역을 뒤흔들어서 중국의 큰 두통거리가 되었다. (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獶幽燕劑魯 爲中國巨蠹) 라고 하였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최치원 전)
여기서 오, 월은 오늘의 강소성, 절강성을 가리키는 것이고 유(幽)는 요동성, 연(燕)은 하북성, 제, 노(劑, 魯)는 산동성을 가리킨 것이다.
이병도는 이 기록이 최치원의 과장된 주장이라고 하여 사실로 인정하지 않았다. 삼국사기에 엄연히 기록되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잘못된 논리만 주장하며 무시하였다.
그러나 태사시랑은 당시 당나라 국정을 책임진 오늘의 총리에 해당하는 막강한 권력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를 향하여 최치원이 근거 없는 허튼 소리를 남발했을 리 만무하다.
최치원이 唐의 太師侍中에게 이런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과장이 아니라 바로 이런 중국의 강소성. 산동성. 하북성 등지에 백제가 태수를 임명한 기록이 중국의 역사 사료를 통해 뒷받침되기 때문에 가능 했다고 본다.
백제가 고구려도 시행하지 못한 왕후제도를 시행하고 중국 동북. 동남방의 광활한 지역에 태수를 임명 했다는 중국 사료의 기록은 백제의 영토 범위가 드넓은 대륙에 뻗쳐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또 하나의 단서가 된다고 하겠다.
9. 수서(隋書) 권 81 열전 제46 동이 백제전(百濟傳)에는 수나라의 六軍이 요하(遼河)를 건너오자 백제의
임금 장(璋: 무왕<武王 13년>)이 또한 국경에 나와 대오를 정돈하며 전쟁에 임할 태세를 갖추었는데 말로는 隋軍을 돕는다고 하면서 실제는(고구려와 내통하여) 양다리를 걸쳤다.“(六軍渡遼 璋亦嚴兵於境 聲言助軍 實持兩端)”는 내용이 나온다.
이때 만일 백제가 한반도 남쪽에 있었다면 隋軍이 요하를 건너오자 백제군이 이들을 도와 싸울 준비를 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후한 말(220년경)에 요동은 公孫氏 손에 들어갔고 남북조 시대 특히 진(晉: 265~420)) 시대에 이르러서는 요동은 고구려에, 요서는 백제의 손에 넘어 갔으며 그러한 형국은 상당기간 계속 되었다.
10. 송서(宋書 )97 열전 제57 동이 백제조(百濟條)에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에서 동쪽으로 千여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런데 뒤에 고구려는 요동을 침략해 소유하고, 백제는 요서를 침략해 소유하였다. (百濟國 本與高驪 俱在遼東之東千餘里, 基後高驪略有遼東, 百濟所治, 謂之晉平郡 晉平縣) 이 기록의 내용은 백제가 요서를 지배했다는 사실을 중국의 정사가 인정한 것이며, 특히 백제의 소치(所治)는 소도(所都)를 말한 것으로 백제의 수도가 진평군 진평현에 있었음을 가리킨 것이다.
이 고을은 문헌통고(文獻通考)에서 진평을 “당(唐)나라 때 유성(柳城)과 북평(北平)의 사이에 있던 지역(唐柳城北平之間)” 이라고 밝혔다. 요하 서쪽에 유성군이 있고 난하(灤河) 동쪽에 북평군이 있었다. 즉 오늘의 요하와 난하의 사이에 진평군이 있었던 것이다.
흠정만주원류고 에서는 이 일대가 “지금의 금주(錦州). 영원(寧遠). 광녕(廣寧) 일대이다.“라고 보다 구체적으로 청나라 당시의 지명을 열거해서 말했다.<欽定滿洲源流考> 권3 部族3 百濟條 “馬端臨謂 晉平在唐柳城北平之間 實今錦州寧遠廣寧之境)
여기에 대해서 한반도 서남쪽에 있었던 백제가 요서를 지배할 능력도 또 그럴 필요성도 없었다며 깎아 내리기 시작한 것이 일제의 식민사학자 들이었다. 오늘 우리 역사학계가 백제의 요서지배를 지배가 아닌 진출로 격하시키며 이를 대외 활동 차원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일제 식민 사관의 잔재라 할 것이다.
11. 삼국사기를 위시한 국내 사료에는 백제의 발상지가
하남 위례성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주서(周書)>. <북사(北史)>. < 수서(隋書)> 등의 중국 사료에는 모두 “백제가 대방(帶方)에서 처음 나라를 세웠다.”라고 기술되어 있으며, 하남 위례성은 아예 그 지명조차 등장하지 않는다.(백제의 발상지를 두고 한국과 중국의 사료가 이처럼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온조가 하남위례성에 세운 백제는 중국에 알려 지지 않아서 누락 된데 연유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중국 측 사료에 백제의 발상지로 등장하는 대방에 대해서 두계 이병도(斗溪 李丙燾)는 그 위치를 한반도의 황해도 일대로 비정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대방군(帶方郡)의 영역도 나의 고구(考究)한 바로는 지금의 황해도 일대에 불과 하였던 것이다.”
헌제 건안(獻帝 建安 : 196~220: 후한시대) 중에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을
분할하여 ‘대방군’을 새로 설치하였는데, 후한시대 요동태수 양평사람 공손도의 아들이다.
공손도가 죽자 그 아들 공손강이 그 자리를 그대로 이어받아 양평후(襄平侯)에 봉해 졌으며 공손강이 죽은 뒤에는 그 아들 공손연(公孫淵)이 다시 요동태수에 임명 되었고 스스로 연왕(燕王) 이라 칭하였다.
공손도 . 공손강. 공손연은 후한 말 양평 즉 오늘의
요양(遼陽) 출신으로 조자손(祖子孫) 3대에 걸쳐 요동의 패권을 장악하고 권력을 행사하던 인물 들이다.
후한 말 혼란기에 중국 세력이 압록강을 건너와 한반도에 지배권을 넣는 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백제의 발상지가 대방이다.“라는 <주서>. <북사>. <수서>의 기록과 ”대방은 요동에 있었다.“라는 통전(당나라 때의 역사책)의 기록은 초기 백제가 동북 대륙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단서가 되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12.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은 아방 강역고(我邦 疆域考)에서 “대방이 모두 네 개가 있다.”고 하면서 풍덕개성(豊德開城). 요동(遼東). 나주회진(羅州會津). 남원부(南原府) 등을 꼽았다. 나주. 남원. 풍덕개성 등 한반도 내에 있던 대방은 후기에 대방이란 이름만 빌어다 쓴 것이며, 그것이 최초의 대방은 아니라고 본다.
수서 지리지에 “요서군 유성현에 대방산이 있다“라고 하였다. 예로부터 지명의
기원을 따져보면 산명(山名)이나 강명(江名)에서 유래한 경우가 많았다. 대방군도 그곳에 있던 대방산 으로 말미암아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나주. 남원. 풍덕개성 일대에서는 대방과 직접 관련된 어떤 지명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리고 전 중국을 통 틀어서도 다른 지역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대방산 이란 명칭이 보이지 않는다.
수서 권4 양제기 하에서는 수양제가 고구려를 치기위해 군대를 출동 시키면서 군대를 좌군과 우군으로 나누어 진군하여 평양에서 총 집결 하라는 명령을 하달한 내용이 나온다.
우군의 제8군은 숙신도(肅愼道)로, 제9군은 갈석도(碣石道로, 제10군은 동구도(東口道)로, 제 11군은 대방도(帶方道)로, 제 12군은 양평도(襄平道)로 진군의 코스를 잡도록 하고 있다.
여기 말하는 숙신. 갈석. 양평 등은 모두 오늘의 중국 요녕성. 흑룡강성. 하북성 등 동북 지방에 있던 지명 들이다. 각 군대 별로 미리 경유지를 정한 것은 군을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게 하기 위함인데, 만약 한반도 서쪽 황해도에 ‘대방군’이 있었다고 가정 한다면 대방을 경유하여 평양에 집결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 하다.
13. 수서 권 81열전 제 46 동이 백제전에 백제에 대성 팔족(大姓 八族)이 있는데 사씨(沙). 연씨(燕). 협씨(劦). 해씨(解). 진씨(眞). 국씨(國). 목씨(木). 묘씨(苗). 이다.
“백제가 위군의 공격을 받았을 때 백제의 모대왕이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등을 보내 격파 했다.“ 고 남제서의 기록에 있다.
그러나 8대 성씨가 백제의 대표성씨 인데 한반도에는 그들의 성씨를 찾아보기 어렵다.
옥해(玉海) 권154 헌방물조에 “동명(東明)의 후손으로 대방(帶方) 고지(故地)에 팔성이 있었다(東明之後 帶方故地 有八姓)”라는 기록이 나온다.
“고금성씨 서변증(故今姓氏書辨證)에는 백제에 난(難)씨가 이었다는 기록도 이렇게 보인다.”難은 성원에 말하기를 “백제인의 성 이라 한다.” 오늘날 한국에는 난 씨가 없는데 중국에는 ‘난’씨가 많이 있다. 또한 8대 성 중에 ‘진’씨가 상곡에서 명망이 높다. 상곡은 하북성 동쪽에 있다. 또 ‘사‘씨 문중에 발해의 사승찬이 과거에 급제 하였고, 근세에는 오흥에 ’사‘씨가 많다. 오흥은 절강성에 소속된 현으로, 백제의8대성은 동명의 후예들로 요동 대방지역에 살다가 백제가 멸망한 후 중국에 동화된 사실을 암시해 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도 백제가 당나라 병사 13만과 신라 병사 5만에 의하여 의자왕이 항복하였다. 웅진이 함락 하였을 때 처음에 흑치상지가 도망하여 흩어진 무리들을 모으니, 열흘 사이에 따르는 자가 3만 여명 이었다. 소정방이 이들을 공격하니 상지가 이들과 싸워서 승리하고, 다시 200여 성을 빼앗으니 정방이 이길 수 없었다.(初 黑齒常之 嘯聚亡散 旬日間 歸附者三萬餘人. 定方遺兵 攻之. 常之拒敗之 復取二百餘城 定方不能克.)
분명한 것은 백제가 패망할 때의 인구에 대한 추증이 가능한 76만호였고 200여성(城)은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는 없는 것이니, 한반도 조선 초기에 인구가 10만호를 넘지 않았다는 것을 참고 한다면, 중국의 요동성과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등의 지역에 백제가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여 국사교과서에 정확하게 기록하여 놓아야 한다.
삼국사기에 신라는 소호금천씨의 후예이고, 고구려는 고신씨의 후예이며,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이 기자의 땅에서 건국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삼국사기 백제본기)
구려의 최고 통치자인 구려천자 치우의 능이 산동성 동평군에 있고, 김유신의 조상인 소호금천씨 능이 또한 산동성 곡부에 있다.
백제 의자왕 묘, 부여융 묘비, 흑치상지 묘비는 산동성 서쪽인 침현. 항성. 동명의 서쪽인 서 북망산에 있다.
minjock@hanafos.com *필자/한민족문화연구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