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엔 비둘기, 강자엔 호랑이 전한 무제 때 원고생, 직언일철 명성 … 정운찬 총리 내정자 본보기 삼을 만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
정운찬 국무총리 내정자의 ‘세종시 계획 수정 불가피’ 발언을 놓고 야당은 “권력의 단맛을 보려는 욕심에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얄팍한 행태”라고 주장하며 자진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또 다른 야당은 인사청문회를 벼르고 있다. ‘곡학아세’는 ‘사기(史記)’ 권121 유림열전(儒林列傳) 제61을 펼치면 나오는데, 옳지 못한 학문을 하여 세속의 인기에 영합하려는 자세라고 꼬집는다. 그런데 ‘곡학’도 언뜻 보면 정도(正道)와 같아 마치 도척(盜蹠)이 공자(孔子)의 말을 흉내 냄과 같다. 도척은 춘추시대의 대도적으로 수천명의 도적을 거느리고 천하를 발호(跋扈)하며 인명을 살생하고 재물을 탈취한 무뢰한인데도 유유히 부귀공명을 누리다가 제 명(命)에 죽었다. 사마천(司馬遷)도 바로 이러한 사실에 경악해 개탄한 것이다. 그가 대규모 강도짓을 계획하고 실천에 옮길 때마다 먼저 ‘용(勇)’을 뇌까리고 마지막에는 ‘의(義)’를 소리쳤다고 하니, 공자와 맹자가 가르친 ‘용’과 ‘의’가 본다면 통곡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중상모략 극복 ‘삼공 반열’에 올라 전한(前漢) 무제(武帝·기원전 154∼87, 재위 141∼87)는 제위에 오르자 천하에 숨은 훌륭한 인재를 널리 구했다. 먼저 ‘시경(詩經)’의 전문가로 알려진 원고생(轅固生)을 선황(先皇) 경제(景帝·재위 기원전 157∼141)에 이어 다시 불러 박사로 삼았는데, 그는 산둥(山東) 태생으로 당년 구순의 노령이었으나 황제가 부른 것에 감격해서 “절대로 젊은이에게 지지 않겠노라”고 백발을 휘날리며 조정에 들어왔다. 워낙 꼿꼿하고 대쪽 같아서 바른말을 참는 법이 없으며, 한 번 옳다고 주장하면 물러서는 법이 없는 이 ‘직언일철거사(直言一徹居士)’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종래 학계와 정계에서 판을 치던 엉터리 학자와 기회주의, 적당주의 선비들은 지레 불안하고 비위가 언짢아 어떻게 해서든 황제의 마음을 돌이켜놓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중상을 했다. “원고생은 이미 ‘구십객’으로 노망이 들었으니 차라리 시골구석에 그대로 박혀서 여생이나 곱게 보내도록 내버려둠이 가합니다.” 그러나 황제는 주위의 치열한 모략을 들은 척 만 척하고 이 늙은 선비를 곁으로 불렀다. 이때 원고생과 함께 부름을 받고 올라온 이는 역시 산둥 사람인 공손홍(公孫弘)이라는 젊은 학자였다. 패기 넘치는 소장 학자로서 중앙의 엉터리 학자들보다 양심과 실력이 있는 청년이었으나 그도 원고생에 대해서는 별로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세대차이도 있으려니와 천하에 자자한 늙은이의 성격이 달갑게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선입견이 있었던 관계로 반갑지 않은 눈초리를 보였으나 원고생은 아무런 반응도 없더니 하루는 공손홍과 단둘이 만난 자리에서 “지금 학문의 도는 문란해지고 속설(俗說)이 판을 치고 있소. 만약 이대로 방치해둔다면 유서 있는 학문의 전통이 드디어 가짜 등쌀에 그 자세를 잃게 될지 모르겠소. 당신은 나이도 젊거니와 듣자하니 매우 학문을 아끼고 사랑하는 선비라 합디다. 그러니 부디 바른 학문을 공부해서 그 옳은 뿌리를 세상에 널리 꽂아주어야겠소. 결단코 자기가 믿는 학설을 굽힌다거나(曲學) 세상 속물들에게 아부하는(阿世) 일이 없도록…”이라고 했다. 이에 공손홍도 원고생의 선비다운 고결한 인격, 풍부한 지식, 탁월한 학설에 감복하고 크게 부끄러움을 깨달아 서슴지 않고 그 자리에 엎드려 무례를 빈 후 원고생의 제자가 됐다.
|
'민족사의 재발견 > 민족사의 재발견'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0년 전 ‘양김 시대’는 미완의 혁명 (0) | 2009.12.01 |
---|---|
“한국의 방두(房杜)는 없는고?” (0) | 2009.12.01 |
神의 실수에 누가 돌 던지랴 (0) | 2009.12.01 |
보름달아, 이산의 아픔을 아느냐 (0) | 2009.12.01 |
‘21세기 환향녀’를 만드는 어리석음 (0) | 2009.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