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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인사실험’ 폐기되나

화이트보스 2009. 12. 9. 13:51

노무현의 ‘인사실험’ 폐기되나 [중앙일보]

2009.12.08 19:54 입력 / 2009.12.09 01:29 수정

남의 눈처럼 무서운 게 없다. 내 눈보다 엄정하기 때문이다. 그게 하나도 아니고 둘·셋, 여럿이 되면 더 그렇다. 중인환시리(衆人環視裡)란 말도 그래서 생겼다. 주로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뻔뻔하게)…’란 의미로 쓰인다. 같은 죄라도 중인환시리에 지은 죄는 더 파렴치한 것으로 본다. 다면평가는 이런 원리를 인사·평가에 갖다 쓴 것이다. 상사만 부하를 평가하는 하향식 대신 수평(동료)·상향(상사) 평가를 곁들여 종합한다.

원조 논란이 있지만 1940대 영국의 정보국에서 처음 썼다는 게 다수설이다. 동양에선 증자(曾子)를 원조로 꼽기도 한다. 『대학』에는 ‘열 눈이 보고 열 손이 가리키니 엄하고 공평하다(十目所視 十手所指 其嚴平)’는 구절이 나온다. 한두 사람은 몰라도 온 세상의 이목은 속일 수 없다는 얘기다. “한 사람을 오래, 여러 사람을 잠깐은 되지만, 여러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는 링컨의 말과 통한다.

국내 원조는 이런 말들을 꿰고 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그는 2000년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 인사에 활용했다. 연공서열과 권위주의를 태생적으로 싫어한 그의 스타일에 딱 맞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당시 그는 심한 인사 청탁에 시달렸다고 한다. 들어주기는 싫고 안 들어주자니 껄끄러운 경우가 꽤 됐단다. 그래서 아예 청탁이 불가능한 쪽으로 인사의 틀을 바꿨다는 것이다. 결과는 대만족. 대통령이 된 그는 아예 다면평가 전도사가 됐다. 당선인 시절인 2003년 1월 “다면평가를 공직 인사의 뼈대로 삼겠다”며 “인사 청탁하다 걸리면 패가망신할 것”이라고 했다. 당장 청와대부터 실시했다. 이듬해엔 중앙행정부처 47곳 중 40곳 넘게로 확산했다. 상명하복의 대명사인 국방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는 “연공서열이나 청탁·연줄 인사가 크게 줄었다”고 자랑했다.

잘나가던 다면평가는 그러나 공무원 노동조합에 발목을 잡혔다. 노조는 이를 전략 무기처럼 이용했다. 당시 공무원 사회에선 “노조에 비협조적인 사람은 다면평가 때 조직을 동원해 손을 본다더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주기적인 노조 사무실 방문, 노조 활동비 지원, 노조 간부에 잘 보이기 따위 등이 승진·보직을 위한 공무원의 필수과목이 됐다. D시청 직원은 “체질적으로 잘 뭉치지 않는 공무원들이 노조활동에 일사불란하게 참여한 것은 다면평가제의 위력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면평가의 단점 중 하나가 ‘왕따시키기’인데 이를 노조가 십분 활용한 셈이다. 그러자 공무원 노조의 힘을 빼려면 다면평가를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공과 논란도 불붙었다. 논란은 노무현 정권을 넘어 올해 말까지 이어졌다.

급기야 지난 주말 행정안전부는 올해 다면평가를 유보해 달라고 지방자치단체에 요청했다. “승진을 앞둔 부서장에게 부하직원의 불법 노조활동을 눈감아주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게 이유다. 엊그제는 청와대도 올해부터 다면평가를 안 한다고 밝혔다. 청와대 관계자는 “부하가 상사를 평가하는 데다 인기투표로 흐르기 쉽다”며 “개선책을 찾는 중”이라고 말했다. 전면 손질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애꿎게 도마 위에 올랐지만 다면평가는 죄가 없다. 있다면 제도의 단점을 악용한 노조나 정부에 있다. 특히 ‘평가 따로 인사 따로’엔 제 아무리 공정평가라도 당할 길이 없다. 지난 정권 때는 ‘다면평가 위에 정실인사 있다’는 말이 유행했다. 대권 창출에 공을 세운 측근이 평가를 무시하고 인사권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이 정권도 그 점에선 자유롭지 못하다. 장관이 적임자라며 추천하면 아직도 “그 사람, 대선 땐 뭐했지”부터 묻기 일쑤란다.

손을 보더라도 아예 없애기보다 잘 고쳐 쓰는 게 낫다. 방법 중 하나가 하향식 다면평가다. 동료·상사 평가는 없애고 부하만 평가하되 직속 상사뿐 아니라 업무에 관련된 여러 부서장이 함께 평가하는 식이다. 두산그룹이 몇 년 전부터 쓰고 있는데 나름 효과가 괜찮다는 평이다.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