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부들의 신상명세서는 천차만별. 진짜 광부에서 명동에서 주먹깨나 쓰는 건달, 대학졸업자, 퇴직 고등학교 교사, 실패한 사업가, 예비역 중령, 국회의원 비서관 하다가 영감님이 다음 선거에서 낙선하니 광부로 둔갑 서독으로 날아온 친구도 있었다(『독일로 간 사람들』, 눈빛, 2003).” 산업화의 태동기였던 그때 우리 사회는 높은 인구증가율과 실업률, 그리고 외화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국경을 넘는 노동이민은 이를 해소하기 위한 탈출구였다. 2800명의 지원자 중 367명의 선발자 명단은 신문 사회면에 고시 합격자처럼 이름이 올랐다.
“정각 6시에 목욕탕에 붙은 탈의실에서 작업복을 입고 한 됫박짜리 플라스틱 물통 두 개에 물을 가득 넣은 다음, 승강기를 타고 지하 1200m까지 내려가면, 동쪽으로 걸어서 다시 1㎞, 다시 이곳에서 작업복을 벗어놓고 팬티 바람으로 일할 준비를 완전히 갖춥니다. 옆구리에 찬 안전등과 가스방지필터를 점검해야 하고, 작업용 가죽장갑을 낀 손에는 두 개의 물통과 망치를 들고 무릎에는 무릎 덮개를 씌워 묶어가지고는 15도 경사 길을 다시 아래로 500m쯤 내려가야만 바로 막장에 들어서게 되는데, 이미 온몸은 땀에 젖어버렸고 팬티에서는 땀이 뚝뚝 떨어집니다.”
이 땅에 비해 당시 상대적으로 나은 노동 조건과 임금을 받았지만, 이들은 차별받는 사회적 소수자였다. “2365번! 그것은 내 고유번호다. 앞으로 광산 측은 물론 광산국·병원·동회·경찰서·세무서 등 어디에서나 굴라이광업소 2365번 하면 바로 나를 가리킨다(『서독의 한국인』, 제3출판사, 1971).” 광부 장재영의 기억 속 자신은 번호로 관리되는 노동력이었지 인간이 아니었다. 전후 경제부흥으로 극심한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던 독일은 간호 인력도 원했다.
파송(派送)이 중단된 70년대 말까지 7936명의 광부와 1만32명의 간호사들이 피땀 흘려 벌어 송금한 외화는 조국 산업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주노동자를 받아들이는 나라로 역전된 오늘. “독일은 노동력을 원했지만, 노동력이 아니라 인간들이 왔다”고 한 독일 소설가의 독백마냥, 경제성장의 숨은 주역이었던 이들의 애환의 역사는 우리를 소스라쳐 깨어있게 정문일침(頂門一鍼)으로 작동한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 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