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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2012년 강성대국은 어떤 의미?

화이트보스 2009. 12. 27. 19:05

북한의 2012년 강성대국은 어떤 의미?

입력 : 2009.12.24 16:57 / 수정 : 2009.12.27 10:50

2009년 말 '100일 전투'를 독려하는 북한의 선전 포스터

월간조선 신년특집② 격변의 2012년, 앞으로 2년
체제위기 벼랑에 선 북한의 2012년

북한은 지난 2007년 11월30일 평양에서 ‘전국지식인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노동당 중앙위원회 최태복 비서는 “2012년은 김일성 동지의 탄생 100돌이 되는 뜻깊은 해로서, 2012년까지는 강성대국의 문을 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북한은 2012년 강성대국을 공개적으로 반복해서 강조해 왔다. 남성욱 국가안보전략연구소장은 월간조선 신년호(2010)를 통해 북한이 내세우는 ‘2012년 강성대국’의 의미를 살펴봤다.
북한 통치에서 숫자는 중요한 상징 도구다. 심지어 숫자를 보면 북한이 보인다고 할 정도다. 4월15일, 2월16일은 지도자의 탄생일로서 인민들은 이날을 생일로 신고할 수 없다. 이러한 북한에서 최근 2012라는 새로운 숫자가 부각되고 있다.

북한은 2008년 신년 공동사설에서 “2012년에는 기어이 강성대국의 대문을 활짝 열어 놓으려는 것이 우리 당의 결심이고 의지”라고 했다.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2008년 2월14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12년을 ‘강성대국’ 달성의 해로 정하는 “결단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다른 기사에서는 김정일이 “2008년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기 위한 새로운 공격전이 시작된다”는 발언을 했다고 전했다.

북한은 왜 2012년을 강조할까? 남 소장은 2007년말 당시 북한의 상황에서 그 답을 구했다. 북한이 2002년 실시한 경제관리개선조치 이후 이어진 일련의 경제개혁이 실패했고, 1994년 제네바 합의 이후 북·미 간의 이견으로 미국이 공급하던 중유 50만?도 중단됐다. 한국이 건설중이던 경수로 공사도 중지됐고, 2006년 1차 핵실험 이후 국제사회의 제재는 강화되어 갔다. 6자회담 역시 북한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2009년 4월 북한의 로켓 발사에 대해 북한은 '150일 전투의 신호총성'이라고 선전했다.
사정이 이러하자 북한은 새로운 슬로건으로 인민들을 다독거리고 체제유지의 명분이 절실했다. 결국 2012년 카드는 현재를 통제하고 인민들을 지도부의 방침에 순응하고 복종케 하는 ‘전가의 보도’라는 것이 남 소장의 분석이다.

그렇다면 2012년까지 정확하게 2년이 남은 지금, ‘2012년 강성대국’은 실현 가능할까? 북한은 2009년 노동력 동원에 기초한 150일 전투와 100일 전투를 공격적으로 전개했다. 그러나 자본과 기술이 없는 단순 노력동원 방식의 접근은 한계가 있다. 여러 명이 동원되더라도 포크레인을 이용한 1명의 기술자를 따라잡기 힘들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 중동국가들의 소액투자나 중국에서 준(準)원조성 지원을 하지만, 경제난을 획기적으로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다.

반면 북한은 2012년 강성대국에서 플루토늄 핵무기 개발을 완성하고 농축우라늄 방식의 핵무기 개발도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은 2009년 9월4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폐연료봉 재처리로 추출된 플루토늄이 무기화되고 있다. 또한 우라늄 농축실험이 성공적으로 결속(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고 밝힌 바 있다. 또 2009년 4월5일 장거리로켓 발사 이후 “인공지구위성 광명성 2호의 발사와 축포의 불야성으로 전체 인민의 사기와 기세를 하늘을 찌를 듯” 높인 후 “마침내 150일 전투의 신호 총성”을 울린 것이라 대대적으로 선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국제사회의 긴장을 초래하고, 북한을 더욱 고립시킬 수 있다.

남 소장은 결국 북한 자체의 선택이 중요하다며 결론을 내렸다. 김정일이 비핵화 없이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으면서 빈곤 속에 강성대국을 지향할 것인지, 비핵화에 국제사회의 경제적 지원을 수령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 어떠한 2012년이 될지는 전적으로 평양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