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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발주한 한국의 울진 1·2호기를 놓고선 미국의 웨스팅하우스와 프랑스의 프라마톰이 붙었다. 처음에는 게임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 전까지 한국이 가동 또는 건설 중이던 원자로 7기 가운데 중수로인 월성 1호기를 제외한 6기가 웨스팅하우스의 작품이었고, 당시 전두환 정권은 대미 관계 강화에 주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종 승자는 프라마톰이었다. 웨스팅하우스가 방심하고 있던 사이 ‘출혈’에 가까울 만큼 싼값을 제시하며 적극적으로 한국을 공략했던 것이다. 한국 정부로선 특정 업체(웨스팅하우스)로의 기술 종속 우려를 씻어낸다는 명분도 있었다. 당시 프라마톰은 웨스팅하우스로부터 이전받은 경수로 원천기술을 바탕으로 기술 자립을 이뤄내고 처음 해외 수출길에 나서던 참이었으니 지금의 한국전력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실은 박정희 정부도 프랑스의 원자력 기술 도입을 추진한 적이 있었다. 다만 대상이 원자로가 아니라 핵연료 재처리 시설이었던 점이 달랐다. 박 정권은 2년여 교섭 끝에 75년 프랑스 국영 핵연료공사와 재처리시설 도입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이는 막판에 미국의 견제로 좌절되고 말았다. 74년 5월 인도 핵실험 이후 미국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다른 나라의 핵개발 계획 감시에 나섰는데 그 첫 케이스로 한국이 걸려든 것이다. 만약 이 계획이 실행에 옮겨졌더라면 한국은 일찌감치 재처리 능력을 확보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주 경쟁에서 드러났듯 3세대 원자로 개발에 성공한 한국과 프랑스, 일본이 원전 르네상스 시대에 치열한 삼파전을 펼치고 있다.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프랑스로부터 기술을 도입하던 한국이 프랑스를 너끈히 제칠 정도로 성장했으니 격세지감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하기야 원자력의 세계에서 20년이란 영겁의 세월이나 마찬가지다. 수백만 분의 1초 만에 일어나는 핵분열 연쇄반응의 속도를 제어하는 게 원자력발전의 핵심이니 말이다.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