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지원", 기업 "채용", 노조 "호응"
"기술은 낫다, 임금은 낮다" '베이비붐 세대' 활용 통해 '고령화·경제난' 대안 찾아
일본 도쿄에서 2시간쯤 자동차로 달리자 지바(千葉)현 가마가야시에 있는 부품공업㈜의 공장이 나타났다. 컨테이너 모양의 소박한 공장에서 직원 마에다(71)씨가 포클레인 창문 틀에 끼울 못을 기계에 갈아 날카롭게 다듬고 있었다. 백발에 얼굴엔 주름이 가득했지만 손 움직임은 날렵했다. 그는 4년 전까지 소규모 중장비 부품업체를 운영하다 경영난으로 문을 닫고 이 회사에 입사했다. "제가 힘은 약해도 기술은 젊은 직원보다 훨씬 나아요. 40년 동안 부품만 만들었어요. 눈 감고도 창문틀 하나는 뚝딱 만들 수 있어요."
마에다씨는 시급(時給) 900엔(약 1만2000원)을 받는다. 월 7만엔(약 90만원)의 연금에 더해 생활비로 쓴다고 했다. 그는 "이 나이 되도록 일을 할 수 있어 즐겁다"고 말했다.
이 회사 직원 90명 중 31명이 55세가 넘는다. 기요마쓰 기이치로(49) 인사부장은 "노인들은 파트 타임(시간제)으로 일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저렴한 임금으로 양질의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회사뿐 아니라 대부분 일본 기업들은 베이비붐 세대를 비롯한 고령자 재고용을 통해 기업 경쟁력을 높이려는 전략을 취하고 있었다.
- ▲ 일본 지바(千葉)현 가마가야시 부품공업㈜에서 일하는 마에다씨. 그는 71세의 고령이지만 휴식이 아닌 재취업을 선택했다. 그는 “비록 힘은 떨어질지 몰라도 기술 하나만큼은 젊은이들과 경쟁해서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자신했다./가마가야=박시영 기자
◆정부는 지원하고
한국에선 베이비붐 세대가 재취업 전쟁을 치르지만, 일본의 베이비붐 세대인 '단카이 세대'(1946~1949년생)의 재취업은 비교적 수월한 편이다. 정부·기업·노조가 모두 고령자 고용을 일본 경제 '생존의 키워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노동자 정년을 60세에서 65세로 연장했고, 고령자를 고용하는 기업에 1인당 월 5만~7만엔(65만~90만원)의 지원금과 다양한 세제 혜택도 주고 있다. 일본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지난해 8월 현재 일하는 60세 이상 고령자는 약 1100만명으로 전체 노동 인구의 17%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 노동 인구 중 60세 이상 비율 8.1%(2008년 서울 기준)의 두배가 넘는다.
일본 후생노동성 직업안정부 쓰지 다케시(51) 담당관은 "노인들은 애사심이 강하다"며 "고도성장을 이끈 세대의 노동력을 활용해야 국가와 기업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한국 정부는 이제야 정년 연장을 논의하겠다고 하고 있고, 고령자 고용 인센티브도 55세 이상 신규 고용시 1인당 6개월은 월 36만원, 다음 6개월은 월 18만원을 지원하는 정도다.
◆기업은 채용하고
일본 기업들은 정부 방침에 호응해 정년을 늘리거나, 은퇴자들을 적극 재고용하고 있다. 인건비가 적게 들면서도 기술이 뛰어난 베이비붐 세대를 고용해 고령화와 경제위기라는 이중고(二重苦)를 극복해 나가려 하는 것이다. 나가노(長野)현 오가와 마을.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산 중턱에 다다르자 '오가와노쇼'라는 간판의 허름한 2층짜리 공장이 눈에 들어왔다.
일본 전통 음식 오야키(팥을 넣어 만든 만두)를 비롯해 된장·고추장 등을 만들어 파는 이 회사의 직원 수는 90명. 공장을 들어서자 작업복 차림 백발의 노인들만 눈에 띄었다. 도야(70) 상무는 "직원의 절반이 넘는 51명이 60세 이상"이라며 "싼 임금에 양질의 상품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생산직 직원은 노인들만 뽑는다"고 말했다. 그는 "반죽기와 분해기 등을 갖추고 고령자들에게 친화적인 근무 환경을 조성했다"고 말했다.
경리 상담업무를 맡고 있는 고이케(72)씨는 60세 때 나가노 은행에서 정년퇴직한 뒤 2년 전 이곳에 입사했다. 일을 시작하면서 무기력증이 없어지고 한 달 15만엔(약 200만원)의 '용돈'도 버는 등 "인생의 활력을 되찾았다"고 했다.
대기업도 예외는 아니다. 도쿄의 51인 이상 기업의 96%가 정년을 늘리거나 고령자를 재채용하며 고령 인력을 활용하고 있다.
반면 국내 기업들은 약 60%가 근속 연수에 따라 임금이 오르는 연공서열형(型) 임금 체계를 갖고 있어 정년 연장은 그대로 기업 인건비 부담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한상의는 2007년 보고서에서 "무작정 정년만 올릴 경우 오히려 임금 부담으로 고령 근로자들의 조기 퇴직을 촉진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노조는 호응하고
일본에서 고령자 고용이 가능한 것은 고령자들이 은퇴 전보다 40~45% 덜 받는 임금 삭감을 감수하기 때문이다. 일본 기업들 노조는 정년연장을 수용하는 대신 임금삭감을 받아들이면서 고용 안정에 주력하고 있는 반면 국내 노동계에서는 임금피크제를 전제로 한 정년연장에 소극적이다. 임금 삭감에 민감한 데다 사측과의 '타협'으로 비치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2007년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경기도의 한 제조업체 노조관계자는 "임금삭감 없는 정년연장을 요구하는 노조원들이 많아 10~20% 임금 삭감안을 전제로 한 임금피크제 도입도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일본 후생노동성 쓰지 담당관은 "2017년까지 일본 전체 기업의 절반 이상이 65세까지 정년을 늘리고, 70세까지 늘리는 기업을 20%로 끌어올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단카이(團塊·덩어리) 세대
2차 대전 직후인 1946~1949년에 태어난 일본의 베이비붐 세대. 일본 인구의 약 5%(680만명)를 차지하는 거대 인구집단으로, 진학·취업·결혼·주택 문제 등에 있어서 치열한 경쟁을 겪었다. 반면 풍부한 노동력을 제공해 일본의 고도성장을 이끈 주역으로도 활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