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 재고’로 불리는 바다 위의 석유는 유조선과 해상 석유 생산시설의 저장고에 실려 있다. 문제는 유조선 쪽이다. 투기세력이 끼어든 물량이 많아서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1억3800만 배럴로 추산된다.
투기세력들은 일단 원유·석유제품 값이 떨어졌을 때 왕창 사들여서 빌린 배에 실은 뒤 공해(公海)로 내보낸다. 그리고 몇 달 뒤 값이 뛰면 팔아 차익을 챙긴다. 주로 석유 선물시장을 이용한다. 현물보다 선물이 비쌀 때 시장에서 현물을 사는 동시에 선물을 팔아두면 큰 위험 없이 돈을 벌 수 있다.
이 같은 ‘유조선 떼기’는 지난해 특히 기승을 부렸다. 석유 전문지 ‘오일마켓인텔리전스’에 따르면 세계의 해상 재고는 2008년 11월 1억 배럴 정도였지만 1년 뒤인 지난해 11월엔 2억1300만 배럴로 급증했다. 같은 기간에 유조선 물량이 2500만 배럴에서 1억5400만 배럴로 6배가 된 영향이 컸다.
이런 방식이 가능했던 것은 세계 경기 침체로 배 임대료와 금리가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해운 전문조사기관 ‘클락슨’에 따르면 유조선 운임지수(WS지수)는 2008년 7월 228.2에서 지난해 5월 28.55로 8분의 1 토막이 됐다. 게다가 각국 정부가 저금리 기조를 유지했다. 돈을 빌려 석유를 사도 차익이 생겼다는 뜻이다. 투기세력은 유럽쪽 수요가 많아 나중에 되팔기 좋은 경유를 많이 샀다.
지난해 쌓인 해상 재고는 올 들어 상당 부분 시장에 쏟아졌다. 한 국내 정유사 관계자는 “석유제품의 경우 1000만~3000만 배럴은 풀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지난달 세계적인 한파로 난방유 수요가 급증한 영향이 컸다. 이렇게 물량이 빠진 공간이 당장 다시 채워지지는 않는 분위기다. 동양종금증권 황규원 연구위원은 “석유 현물·선물의 가격 차가 확 좁혀진 데다 유조선 운임이 껑충 뛰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가 지난달 중순 에너지 투기 거래 제한 조치를 발표한 영향도 있었다.
실수요가 아닌 에너지 투기가 끼어들면 시장 가격에 혼란을 줄 수밖에 없다. 한국도 국제 시세에 따라 석유제품 가격이 결정돼 간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익명을 요구한 정유사 관계자는 “당장은 지난해 같은 대규모 투기는 없겠지만 세계 경기 회복이 더뎌 석유류 값과 유조선 운임이 떨어질 경우 비슷한 일이 되풀이되지 말란 법은 없다”고 말했다.
김선하 기자
김선하 기자 [odinelec@joong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