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십자 화순 백신공장 르포
전남 화순 녹십자 백신공장. 유리창 너머로 우주인 복장의 연구원이 층층이 쌓여 있는 하얀 달걀을 조심스레 기계장치 안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알코올로 '샤워(세척)'한 달걀은 매끈한 빛을 내고 있었다. 마치 탐스러운 과일 같았다. 이 달걀에서 바이러스를 배양하는 과정을 거치면, 작년 세계를 휩쓴 '신종플루'를 예방하는 백신이 만들어진다.
녹십자의 신종플루 백신 제조 능력은 작년 국내외에 인정을 받아 신종플루 백신 부문에서만 지난해 4분기와 올 1분기를 합쳐 약 23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여기에 30일에는 결핵백신(BCG) 공장이 추가로 문을 연다. 본격적인 '백신 공략'이 시작되는 셈이다.
◆신종플루는 녹십자의 기술력을 검증한 무대
백신 제조 과정 자체는 단순하지만, 불순물 관리가 매우 어렵다. 백신 제조 과정은 2단계다. 먼저 달걀에 신종플루, 계절독감 바이러스 등을 증식시킨다. 그리고 이 바이러스의 독성을 약화시켜 인체에 투여할 수 있는 백신으로 만든다. 과정은 간단하지만, 바이러스가 자라는 달걀의 순도(純度)를 지키는 공정이 쉽지 않다. 만약 달걀에 해당 바이러스가 아닌 다른 불순물이 수 나노그램(1나노그램은 10억분의 1그램)이라도 더 들어가면, 오히려 백신을 맞고 새로운 병을 얻을 수 있다.
녹십자의 달걀은 순도와 양산 효율 모두 세계적인 수준이다. 통상적으로 외국 제약사의 불순물이 1인 접종당 5나노그램 수준이지만, 녹십자의 불순물은 2나노그램 수준이다. 달걀 하나에서 생산할 수 있는 백신 접종량도 외국 평균 수준보다 20% 정도 더 많아 생산성도 높다.
- ▲ 전남 화순의 녹십자 백신 공장에서 연구원이 백신 개발에 필요한 샘플을 살펴보고 있다. / 녹십자 제공
특히 녹십자는 지난해 11월 신종플루 백신을 4개월 만에 개발해내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이는 매출 수십조원을 자랑하는 다국적 기업 노바티스, GSK의 신종플루 백신 출시 시기와 근접한 시점이었다. 실제로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 2월에 녹십자를 신종플루 예방에 기여한 회사로 선정하기도 했다. 지난해부터 녹십자는 해외 수출과 신종플루 백신 매출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작년 4분기와 올 1분기 연속으로 국내 제약사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수십조원 백신 시장 뛰어드는 제약업계의 거인들
최근 백신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작년 기준으로 전 세계 백신 시장은 240억달러(약 26조원) 규모에 달한다. 2013년이면 팽창을 거듭해 시장 규모가 364억달러(약 40조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세계 백신 시장에는 전운(戰雲)이 감돌고 있다. 매출이 수십조원에 이르는 다국적 제약업체들이 속속 백신 시장에 뛰어들거나 입지를 강화하고 있는 것.
존슨앤존슨(J&J)은 작년 9월 네덜란드 백신업체 크루셀의 지분 18%를 4억4100만달러에 인수했다. 애보트 역시 작년 9월 벨기에 종합화학업체 솔베이의 제약 및 백신사업 부문을 약 66억달러에 인수해 강화했다. 작년 10월 세계 제약업 1위인 화이자 역시 와이어스를 인수하면서 백신 사업에 뛰어들었다.
백신시장 수위권 업체들의 성적도 호조를 보이고 있다. 작년 세계 백신 시장에서 다국적 제약사인 GSK는 백신으로만 55억달러(약 6조원)의 매출을 올렸다. 프랑스 기업 사노피-파스퇴르 역시 47억달러(약 5조1000억원) 매출을 올렸다.
국내업계가 뚫기 쉽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녹십자는 이런 상황을 "위기이자 기회"라고 말했다. 그만큼 경쟁자들이 강력하지만, 반대로 시장이 커져 일정 점유율만 뚫어내도 막대한 매출을 올릴 수 있다는 것. 녹십자 관계자는 "5%의 시장 점유율만 달성해도 2조원의 매출을 올릴 수 있다"며 "2015년 1조 5000억원, 2018년 2조 5000억원의 매출을 올릴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기술 개발 어렵지만 팔기는 더 어려워
녹십자가 글로벌 시장을 뚫어낼 관건으로 보는 제품은 '세포배양 방식'의 백신이다. 세포배양 방식은 백신에 필요한 바이러스를 계란 대신 포유류 동물의 세포에서 배양하는 방식이다. 세포배양 방식은 계란 사용 방식보다 백신 개발 기간이 6개월에서 3개월 정도 줄어드는 게 장점이다. 백신 개발기간을 줄이면 다른 업체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
실제로 작년 신종플루 당시,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바이러스 질환이 출몰하자 제약업계는 이를 예방하는 백신을 한 달 먼저 출시할 수 있느냐를 놓고 회사의 사활을 건 경쟁을 벌였다. 반도체 회사가 한 발만 앞서 경쟁 회사보다 집적도가 높은 제품을 출시하면 막대한 수익을 벌어들이는 것과 비슷하다. 녹십자 이병건 사장은 "동종 업계에서 가장 빠른 2014년에 세포배양 방식의 백신 개발을 완료하겠다"며 "개발이 완료되면 경쟁사보다 20%의 가격 경쟁력을 갖출 것"이라고 말했다.
수두 백신도 녹십자가 기술적 강점을 자신하는 분야다. 수두 백신의 원료가 되는 바이러스는 세계에서 두 종류밖에 없는데 그중 하나가 녹십자 소유이다. 특히 경쟁 바이러스와 비교하면 녹십자의 바이러스는 수율이 높아 백신의 원가 경쟁력이 좋다는 평가다.
물론 기술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꾸준하게 해외 임상과 마케팅을 통해 '세계 표준'으로 인정을 받는 노력이 필요하다. 녹십자는 1993년도에 세계에서 두 번째로 수두 백신을 개발했지만 3조원 수두 백신 세계 시장에서 불과 100억원대의 매출만 올리고 있다. 녹십자 한준희 이사는 "국제 사회에서 우리의 임상 능력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결과"라며 "최근 남미 지역에 수두 백신을 수출하는 등 해외에서 점차 백신 제품에 대한 신뢰를 높이고 있다"고 말했다.
→백신(vaccine)
신종플루, 계절독감은 바이러스가 신체에 침입해 발병하며 때로는 생명을 앗아가기도 한다. 신체는 독성이 약한 바이러스를 접하면 질병을 이길 수 있는 항체를 만드는 면역기능이 있다. 이렇게 신체의 항체를 만들어 질병을 예방해 주는 물질을 백신이라 한다.
→임상 시험(임상 1상, 2상, 3상, 4상)
임상시험은 의약품이 출시되기 전에 안전성과 약효 등을 평가하는 과정이다. 임상시험은 1상부터 4상까지 단계별로 진행된다. 1부터 4까지 단계가 높아질수록 실제 시장에 출시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임상 1상은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안전성 평가. 임상 2상은 유효성과 안전성을 동시에 관찰하는 과정이다. 임상 3상에서는 수천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시험을 진행한다. 임상 4상은 약이 시판된 후 실제 약을 사용하는 일반 환자들을 대상으로 장기간의 효능과 안전성을 평가하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