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의 운명을 결정한 현장-靑海省을 가다 (1)
鄭淳台 작가st-jung@hotmail.com
<<사진-靑海湖>>
靑海를 답사해야 했던 까닭
중국 靑海省(청해성)의 북동부에 위치한 靑海湖(청해호)의 넓이는 제주도의 2.5배이다. 靑海湖의 남쪽을 흐르다가 모래 땅으로 스며들어 사라지는 大非川(대비천)은 羅․唐(나·당)전쟁의 승패, 즉 그후 韓國史의 운명을 결정한 현장이다. 서기 670년 7월, 唐의 장수 薛仁貴(설인귀)가 거느린 10만 대군이 바로 靑海의 大非川에서 論欽陵(논흠릉)이 거느린 吐藩(토번․ 티베트)軍에게 전멸당했다. 보급부대 등 지원부대 전사자와 포로를 합치면 唐의 인명피해는 50만 명에 달했다.
대비천 전투에서 승세를 탄 吐藩軍(토번군)은 祁連山脈(기련산맥)을 넘어 河西走廊(하서주랑), 즉 실크로드(비단길)로 이어지는 통로를 점령했다. 이로써 토번은 당시 세계의 主교통로(main-trunk)를 지배하게 되었다.
청해호 남쪽 대비천 전투에 투입되기 바로 직전, 薛仁貴는 韓半島(한반도) 전역을 관할하는 安東都護府(안동도호부)의 都護(도호)였다. 安東都護는 新羅(신라)까지 먹으려 했던 唐의 東方정책을 지휘하던 사령관 겸 총독이었다. 설인귀의 청해지역 투입 때 韓半島 전선에 포진하고 있던 병력 중 상당수가 청해 지역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新羅 지도부가 이런 유리한 정세변동을 간과할 리 없었다. 당시 신라는 長安에 관리․ 宿衛(숙위)학생․ 留學僧(유학승) 등을 파견해 놓고 있어 唐軍(당군)의 움직임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670년 3~4월, 新羅의 사찬 薛烏儒(설오유)가 高句麗(고구려) 부흥군의 태대형 高延武(고연무)와 함께 정병 2만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皆敦壤(개돈양:요녕성 鳳凰城 방면)에서 唐의 용병인 靺鞨軍(말갈군)을 대파했다. 설인귀 軍의 靑海 배치 1개월 전이며, 대비천 전투 4개월 전의 일이다. 안동도호부 병력의 靑海 이동을 간파한 신라의 對唐(대당) 선제공격이었다.
이로부터 羅-唐 전쟁과 토번-唐 전쟁이 동시에 전개되었다. 唐朝(당조)는 薛仁貴․ 李謹行(이근행․ 말갈 출신)·劉仁軌(유인궤)·契苾何力(설필하력·돌궐系 突騎施 출신) 등의 한반도에 투입된 장수들을 戰況(전황)에 따라 靑海에 이동․ 배치했다. 어떠한 强國(강국)도 2正面 전쟁은 무리다. 신라와 토번의 협공을 받은 唐은 두 戰域(전역)에서 모두 패전, 마침내 世界帝國(세계제국)의 지위에서 추락하게 된다.
唐-토번 전쟁은 669년 9월 토번이 天山南路(천산남로)를 급습함으로써 개시되었다. 天山南路는 실크로드 중 唐이 관할하던 타림 분지(지금의 新疆 위구르自治區 남부 사막지대) 주위의 오아시스 北道와 南道이다. 세계제국 唐에게 실크로드는 死活的(사활적) 교통로였다.
664년 이후 唐의 실질적인 통치자는 則天武后(측천무후)였다. 그녀의 남편 高宗 李治(이치)는 간질병을 앓아 政事(정사)를 감당할 수 없었다. 統帥權(통수권)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측천무후는 韓半島 전선에 투입된 薛仁貴를 1만5000리 떨어진 靑海 지역으로 급히 이동시켰다. 그가 청해 전선에 도착한 것은 670년 4월의 일이었다. 물론 무리한 병력 이동이었다. 설인귀는 비록 대비천에서 참패했지만, 645년 唐 태종의 고구려 침략 때 병졸로 자원 참전한 이래 거듭 戰功(전공)을 세워 大將軍(대장군)의 반열에 올랐던 立志傳的(입지전적) 인물이다. ·
신라와 토번은 일찍이 군사동맹을 맺은 바 없었지만, 그 어떤 동맹국보다 효과적으로 東西에서 唐을 挾攻(협공)했다. 토번의 擡頭(대두)라는 국제정세의 판을 정확히 읽고 對唐 선제공격을 감행한 신라 지도부의 결단력과 불굴의 의지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결단과 의지가 없었다면 韓民族도 중국의 지배하에 들어간 50여 소수민족 중 하나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 중국과 陸接(육접)한 민족들은 거의 대부분 국민국가 건설에 실패했고, 그 예외적 존재라면 韓國과 베트남 정도이다. 對唐 전쟁에서 신라의 승리는 自尊(자존)의 韓民族史 형성으로 직결되는 힘찬 발걸음이었다.
百濟 출신 靑海방면군 사령관 黑齒常之(흑치상지)가 쌓은 西寧 일대의 烽燧臺(봉수대)
<<사진-청해호 주변 지도>>
지난 4월9일 아침, 필자 일행 5명이 탑승한 CA여객기는 北京공항을 이륙한 지 2시간30분 만에 西寧(서녕) 공항에 착륙했다. 해발 2600m의 盆地(분지)에 형성된 西寧市는 현재 청해省의 省都(성도)로만 기억될 곳이 아니다. 西寧에는 현재 조선족 거주자가 없지만, 西寧을 중국 서부의 關防(관방)도시로 맨 처음 건설한 인물은 百濟(백제) 출신의 무장 黑齒常之(흑치상지)이다. 청해 방면군 사령관이었던 흑치상지의 파란만장한 행적에 대해서는 뒤에서 詳論(상론)할 것이다. 그후 평화시의 서녕은 중국과 티베트의 茶․ 馬(차·마) 교역시장으로 발전했다.
黃河(황하)의 지류인 湟水(황수)
청해성 박물관
시내인구 200만 명인 西寧은 黃河(황하)의 지류인 湟水(황수)를 따라 가로로 길게 형성되어 있다. 하늘도 누렇고, 사방을 꽉 둘러싼 산도 누렇고, 강물도 누렇다. 서녕驛(역) 등 중심가와 청해성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날씨는 춥고, 황사를 날리는 바람도 거세다. 여성들은 대부분 투명한 분홍색 혹은 흰색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멋쟁이 아가씨는 선글라스에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맨 얼굴의 어린 소년·소녀들의 뺨은 강렬한 햇볕을 받아 사과처럼 빨갛게 익어 있다.
서녕은 티베트족(藏族)․ 위구르족(回族)․ 몽골족․ 滿洲族(만주족)․ 土族(토족) 등 35개 소수민족이 漢族과 함께 사는 인종의 전시장이다. 이것은 이 땅의 주인이 그만큼 많이 바뀌었다는 증거이다. 티베트족은 골격이 크고 다리가 길며 耳目口鼻(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위구르인은 가톨릭 성직자처럼 머리에 하얀 빵모자를 쓰고 있다. 만주족은 淸代에 이곳에 주둔한 八旗兵(팔기병)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티베트族 식당 종업원과 필자
점심 후 서녕시의 屬縣(속현:지방관이 파견된 郡이나 현에 속한 낮은 급의 지방 행정 단위)인 湟中(황중)의 티베트 불교 게루派의 본산인 塔爾寺(탑이사:타얼스)로 출발했다. 황중에 이르는 길 옆 산봉우리에는 烽燧臺(봉수대)가 잔존해 있다. 기록에 따르면 백제 출신 흑치상지는 이곳에 70여개의 봉수대를 건설했다.
<<사진-唐代의 봉수대>>
30만 평 분지에 펼쳐진 塔爾寺는 티베트 불교 최고의 學僧(학승)이었던 쫑가파(宗咯巴)가 태어난 곳이다. 쫑가파는 티베트 불교 게루파(格魯派)의 창시자다. 게루파 승려는 노란색 모자를 쓰기 때문에 黃帽派(황모파)라고 불린다. 현재, 인도에서 티베트 망명정부를 이끌고 있는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紅帽派(홍모파)이다.
쫑가파는 明나라 永樂帝(영락제)가 北京에 스승으로 초청했지만, 정중하게 거절했다. 두 번째의 간곡한 초청이 오자 그는 제자 샤카예쉬를 明廷(명정)에 자기 대신 파견했다. 지금은 中國 정권이 티베트를 강점하고 있지만, 적어도 明代까지 티베트와 中國의 정권 사이엔 아무런 종속관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滿洲族(만주족)의 정복왕조 시기인 淸代(청대)에도 성직자로서의 달라이 라마와 大후원자로서의 淸 황제가 서로 돕는 관계, 즉 檀越(단월) 관계가 유지되었다.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열강의 관심이 온통 한반도에 집중되었을 때 中共軍은 首都 라싸에 병력을 투입, 티베트를 西藏自治區(서장자치구)로 만들어버렸다. 1959년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印度(인도)로 망명한 14代 달라이 라마는 인도 北部 다람살라에 망명정부를 세우고, 이후 50여년 동안 티베트인의 自治(자치)를 요구해 오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內治만 티베트인이 맡고, 외교․ 국방은 중국 정부에게 위임하겠다는 온건노선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다람살라의 거리에서는 티베트인 청년들이 달라이 라마의 온건노선을 반대하며 티베트의 완전 독립을 부르짖는 켐페인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사진-티베트 불교 최고의 學僧 쫑가파가 태어난 타얼寺>>
현재, 티베트인이 주장하는 티베트의 범위는 티베트․ 靑海省의 전부와 甘肅省(감숙성)․四川省(사천성)․雲南省(운남성) 일부이다. 필자는 2008년 여름에 인도의 西北端(서북단) 레 지역의 불교 유적을 답사한 후 해발 5000m가 넘는 험한 고개 세 개를 지프를 타고 넘어 다람살라에 있는 티베트 망명정부 청사(남걀寺院)에서 제14대 달라이 라마를 3일간에 걸쳐 약 2시간 동안 회견했다(月刊朝鮮 2008년 9월호 보도). 회견에서 그는 “우리의 소원은 티베트에서 불교를 공부할 수 있는 自由(자유)”라고 강조했다.
14代 달라이 라마의 고향도 사천성과 접경지역인 靑海省의 南東部(남동부) 암도이다. 암도 인근지역인 玉樹(옥수)에서 4월14일 아침 진도 7.1의 大지진이 발생하여 수천 명의 주민이 죽고 수십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우리 일행이 청해성을 떠나 기련산맥을 넘어 감숙성으로 북상한 지 사흘 후의 일이었다. 청해성은 한반도의 3.5배의 면적, 省都 서녕과 지진의 현장인 옥수는 821km의 거리다. 14代 달라이 라마는 지진이 난 고향 玉樹지역을 방문하려 했지만, 중국 정부에 의해 거절당했다고 한다.
1만5000리 떨어진 임진강 戰線과 靑海 전선
湟中縣(황중현)은 말갈족 출신 장수 李謹行(이근행)이 토번군을 방어하던 현장이다. 이근행은 그 직전에 唐軍의 한반도 臨津江(임진강) 전선의 총사령관이었다. 말갈병 20만 명을 이끌던 이근행은 675년 10월29일 臨津江 지류 한탄강변의 買肖城(매소성: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대전리의 대전리산성) 전투에서 신라군에 패배, 戰馬(전마) 3만380필을 버린 채 황급하게 퇴각했다. 이근행의 패인은 임진강 河口로 접근하던 唐의 보급함대가 坡州 交河(파주 교하) 부근에서 신라 해군에 저지되는 등 兵站(병참)의 실패로 보인다.
<<지도-임진강 전선과 청해 전선 1만5000리>>
매소성에서 퇴각한 이근행 軍은 곧바로 귀국해 임진강 전선에서 1만5000리 거리의 靑海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근행은 청해 전선에서 토번군에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 후 불과 1년 만에 병사했다. 이근행이 죽은 후 唐의 中書令(중서령) 겸 河源道대총관 李敬玄(이경현)이 이곳을 지켰다. 그러나 679년, 이경현 휘하 唐軍 18만 명은 토번의 명장 論欽陵(논흠릉) 軍과 전투를 벌이다 전멸했다.
<<사진-한탄강변의 매소성. 675년 9월, 이근행이 지휘한 당군 20만 명을 격파해 戰馬 3만380필을 획득한 매소성 전투의 현장(연천군 청산면 대전리). 현재 우리 국군의 진지가 축조되어 있다>>
재상급인 이경헌은 자신을 청해 지구에 투입한 측천무후의 인사에 불만을 품은 나머지 처음부터 전투에 소극적이었다. 그는 휘하의 좌위대장군 劉審禮(유심례)에게 부대의 지휘를 맡겼는데, 유심례는 졸전 끝에 토번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경현의 패전도 언제 唐軍이 再侵(재침)할지 몰라 군비증강에 박차를 가하던 신라에게 시간적 여유를 주었다.
청해 전선의 당군은 戰意(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 패군을 수습하여 후퇴하려고 했지만, 퇴로가 막혀 위기에 빠졌던 것이다. 주변의 높은 산 위에 진을 쳤던 토번군은 습지대의 진흙 속을 헤매고 있던 唐軍을 빤히 내려다보고 압박했다. 이때 백제 출신 흑치상지가 결사대 500명을 이끌고 토번군 진영을 야습해 교란한 뒤 퇴로를 뚫음으로써 일약 武名(무명)을 떨쳤다.
이때 측천무후는 흑치상지에게 金 500량 비단 500필을 하사하고, 河源道經略副使(하원도경략부사)로 발탁했다. 흑치상지는 680년에도 정예 기병 3000기를 이끌고 또 토번 진영에 야습을 걸어 토번병 2000명을 죽이고 말과 양 수만 필을 노획했다. 이런 전공으로 흑치상지는 이경현을 대신하여 河源道경략대사로 승진했다. 그때 그의 나이 49세였다. 河源道란 黃河의 源流(원류)가 소재한 곳, 즉 지금의 靑海省이다. 청해성은 황하뿐만 아니라 長江과 메콩강의 발원지이다.
흑치상지 軍은 현재의 서녕市 일대에 鎭守(진수)했던 만큼 군량의 확보에 의한 戰線의 안정이 시급했다. 그는 湟水(황수) 강변에 5000頃(경)의 토지를 개간하여 100만여 斛(곡=石)의 곡물을 수확했다. 1頃(100畝)은 100步 平方이며, 1斛(곡)은 10斗이다. 또 그는 서녕 일대에 烽燧臺 70여개소를 축소하여 토번군의 기습에 대비했다. 필자 일행이 서녕시부터 황중현 塔爾寺(탑이사)로 가면서 목격한 唐代의 봉수대들은 흑치상지가 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흑치상지가 河源道경략대사를 맡았던 약 6년간 토번은 감히 唐의 서쪽 변경을 침략하지 못했다. 그는 李勣(이적)의 손자인 李慶業(이경업)이 반란을 일으켜 南京을 점거하자 江南道 행군총관이 되어 진압전에 참전했다. 이경업은 唐朝를 찬탈하려는 측천무후의 움직임에 반발하여 거병했지만, 전략 不在로 패망했다. 그는 唐의 수도 長安과 副都(부도) 낙양을 直攻(직공)하지 않았다.
<<사진-1929년 洛陽의 북망산에서 발굴된 흑치상지의 묘비명>>
684년 흑치상지는 左무위대장군 겸 檢校左羽林軍(검교좌우림군)으로서 황제 경호부대인 北衙禁衛(북아금위) 전체를 통솔했다. 696년 再興 돌궐이 변경을 침입해오자 그는 靑海 전선을 떠나 燕然道(연연도:외몽골)의 대총관이 되었다. 그는 黃花堆(황하퇴:현재의 山西省 山陽縣)에서 돌궐의 쿠토르크(骨础祿)軍을 격파, 燕國公(연국공)이라는 작위와 식읍 3000호를 받았다. 이런 그도 결국 피의 숙청을 당하고 마는데, 그 과정은 뒤에서 설명할 것이다.
|
韓國史의 운명을 결정한 현장-靑海省을 가다(2)/“大非川이란 오지에 가자는 고객은 이제껏 선생들 외엔 없었습니다." |
|
鄭淳台 작가st-jung@hotmail.com
티베트의 英雄(영웅) 송첸 칸포
4월10일 아침 8시, 대형 지프를 타고 西寧(서녕)의 호텔을 출발해 청해호와 대비천 답사에 나섰다. 日月山(최고봉 4617m)의 고개에 이르렀다. 일월고개에는 日月亭이 있다. 641년 唐의 文成公主(문성공주)가 吐藩(토번)의 송첸 칸포에 시집가다가 쉬어가던 곳이라 한다. 칸포는 토번 君主(군주)에 대한 호칭이다. 당시, 唐과 토번의 국경선은 日月고개였다.
<<◀ 사진-토번의 君主 송첸 칸포>>
일월고개 옆 唐藩古道(당번고도)에는 文成公主의 石像(석상)이 세워져 있다. 문성공주는 唐-토번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이다. 唐三彩(당삼채:중국 唐代에 발달한 도자기로 녹색과 백색 그리고 갈색의 삼채 유약을 사용한 것) 등을 보면 唐代엔 살찐 글래머를 미인으로 쳤는데, 석상의 모습도 바로 그러하다. 문성공주가 송첸 칸포에게 시집을 간 배경은 이렇다.
<<사진-日月山에서 방목하는 양떼>>
640년 티베트의 英雄(영웅) 송첸 칸포는 唐 태종에게 공주를 달라고 요청했다. 唐 태종은 처음엔 거부했다. 이에 송첸 칸포는 당시 청해호 남안에 위치한 土谷渾(토욕혼)의 왕에게 唐의 공주를 시집보낸 前例(전례)까지 들먹이며 唐에 재차 압력을 가했다. 唐태종으로서도 송첸 칸포의 요구를 끝내 무시할 수 없었다. 고구려 정복을 기도하고 있었던 만큼 토번의 환심을 사 西邊(서변)의 안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진-茶馬古道의 日月고개에 세워진 문성공주의 석상>>
문성공주를 시집보낸 바로 그 해인 641년, 唐태종은 고구려에 職方郎中(직방낭중) 陳大德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고구려 관리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뿌리며 고구려의 지형과 軍備(군비) 등을 정탐케 했다. 職方은 兵部 산하 정보기관이고, 郎中은 그 책임자이다.
唐으로서 641년은 매우 의미 있는 한 해였다. 당시 서북방의 遊牧(유목)강국 薛延打(설연타)가 唐의 장수 李勣(이적)에게 격파당했기 때문이다.
문성공주는 唐 태종의 4촌인 李道宗(이도종)의 딸이다. 李道宗은 그로부터 4년 후인 645년 唐 태종의 고구려 원정에 참가한 인물이다. 安始城(안시성) 공격 때 城 앞에다 공격용 土山을 쌓은 敵將(적장)이 바로 그다. 그러나 힘들여 축조한 土山(토산)이 갑자기 무너져 성벽에 와닿자 고구려군이 재빨리 土山을 점령해 唐軍을 공격하는 바람에 唐 태종은 되려 패전하여 찬 바람과 궂은 비 속에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문성공주의 출가로 唐-토번 우호관계가 시작된 지 3년 후인 644년, 송첸 칸포는 티베트 高原 서부에 웅거한 라이벌 羊同(양동)을 병합하여 티베트 高原 전체를 통일했다. 송첸 칸포는 자신의 여동생을 羊同의 王 리그미에게 시집보내 간첩으로 활용했다. 여동생을 통해 羊同 왕의 지방순시 일정과 動線(동선)을 탐지한 송첸 칸포는 매복 작전으로 羊同 王 리그미를 격살했다. 토번․ 唐의 화해로 得을 본 것은 송첸 칸포였다.
靑海湖 안에 설치된 중국의 魚雷發射(어뢰발사) 실험기지
日月고개를 넘어 109번 국도에 접어들어 조금 西進(서진)하면 짙푸른 청해호가 보인다. 湖面(호면)은 해발 3106m, 면적 4456평방킬로미터, 평균 수심은 25m이다. 서녕으로부터 300km 서쪽에 위치해 있다. 청해성 共和縣(공화현)에 속한다.
<<사진-靑海湖 표석 앞에서 가이드 劉양과 기념촬영>>
우선, 청해호반의 마을 江西溝(강서구)에서 점심부터 해결했다. 특별히 黃魚(황어)찜 한 접시를 따로 주문했다. 청해호의 黃魚는 소문이 자자한 물고기이다. 毛澤東의 大躍進運動(대약진운동)의 실패와 文化大革命(문화대혁명) 때 좌파 紅衛兵(홍위병)의 난동 때문에 굶주린 청해 주민들이 황어로 연명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 씨가 마를 정도로 휘귀 어종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15cm 크기의 황어 세 마리를 올린 요리 한 접시의 값으로 300위안(韓貨 5만1000원 상당)을 따로 받았지만, 맛은 민물고기인 붕어찜과 비슷했다.
<<사진-청해의 황어 요리>>
靑海湖는 중국 최대의 鹽水湖(염수호)이다. 含鹽量(함염량)이 약 50억 톤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방파제로 나가 사납게 飛散(비산)하는 파도와 마주섰다. 영하의 기온과 거센 바람 때문에 遊船(유선)들은 호변에 묶여 있었다. 바다 같은 호수 위로 물새가 떼를 지어 난다. 청해호의 물맛을 보았더니 보통 바닷물만큼은 짜지 않은 소금물이었다.
<<사진-바다 같은 청해호>>
방파제 앞 500m 湖上(호상)에 中國魚雷發射實驗基地(중국어뢰발사실험기지)의 구조물이 보인다. 마침 우리 해군 천안함의 격침 이후 북한 해군이 보유한 어뢰의 도입처가 심각하게 거론되는 상황에서 청해호의 어뢰기지는 우리에게 주목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북한에 현금을 퍼줘 金正日 好戰(호전)집단이 제3국으로부터 어뢰를 도입하게 조장했던 한국 좌파정권의 利敵(이적)행위는 두고두고 통탄할 일이다.
<<사진-청해호의 중국어뢰발사실험기지>>
청해호의 남서단 黑馬河鎭(흑마하진)에서 남진하여 109번 국도를 100여 리를 달려 해발고도 3817m인 襐皮山(상피산) 고개를 넘었다.
<<사진- 고도 3817m인 상피산 고갯길>>
흑마하에서 지방도로를 따라 50리쯤 북상하면 吐谷渾(토욕혼)의 수도였던 伏俟城(복사성) 폐허가 있지만, 이날 중에 大非川 전투현장을 찾아야 하는 일정이었던 만큼 시간이 촉박해 복사성 답사는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상피산 고개를 넘어 大水僑鄕(대수교향)라는 마을에서 좌회전하여 좁은 지방도로를 따라 東進(동진)했다. 한동안 취락은 물론 인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길 옆으로 전신주가 길게 가설된 초원길을 따라 100여 리쯤 달렸다. 전봇대가 이어져 있는 만큼 그 너머 어딘가에 마을이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중국인에겐 치욕의 현장인 大非川은 이제는 沙珠玉河(사주옥하)란 아름다운 이름으로 바뀌어 있다. 대비천 지역은 靑海南山(청해남산)이란 산맥에 의해 청해호 지역과 隔絶(격절)되어 있는 초원지대이다. 상피산 등에서 흘러내리는 눈 녹은 물이 흘러와 이곳 초원을 적신다고 하지만, 금년 들어 3개월 이상 계속된 가뭄으로 강바닥은 바싹 말라 있었다. 목이 따가웠다. 황사를 한 바가지쯤 마셨던 듯했다.
切吉(절길)이란 마을에 들렀다. 그곳 20리쯤 북쪽에서 沙珠玉河, 즉 大非川의 제법 세찬 물줄기를 발견했다.
<<사진-大非川의 물길>>
대비천 일대는 수십만 병력이 전투를 벌일 만한 넓은 초원지대였지만, 이제는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다. 필자 일행은 지도상으로 沙珠玉河가 마을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浪嫏(낭랑)을 찾아 나섰다.
중국의 奧地(오지)에는 도로안내판이 없다. 중국인 현지 가이드인 미스 劉(유)는 낭랑에서 千卜彔寺(천복록사)를 거쳐 共和(공화)의 縣소재지에 이르는 지름길이 있다고 자신만만했다. 지도상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 지름길을 찾지 못하고 길을 헤매다 강 바닥이 바짝 말라버린 사주옥하의 下流(하류)에 이르렀다. 이름 모를 삼거리에서 길을 잘못 들었다. 우리 일행은 낭랑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했지만, 끝내 낭랑에 이르지 못했다. 필자가 낭랑에 대해 집착했던 것은 用水 확보에 유리한 그곳이 설인귀의 本陣(본진)이 설치되었던 곳이 아닌가 하고 억측했기 때문이다.
<<사진-말라버린 사주옥하>>
좁은 길을 통해 塘格木(당격목)이라는 마을을 지나 操什達(조십달) 마을에 이르러 티베트 서부지역과 西寧(서녕)을 연결하는 213번 국도를 만났다. 여기서 共和縣(공화현)까지가 51km. 이미 해가 기울어 낭랑을 찾아 되돌아갈 시간은 없었다.
필자는 가이드 미스 劉에게 “낭랑도 찾지 못하고 200여리나 길을 헤맸다”고 은근슬쩍 찔러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大非川(대비천)이란 오지에 가자는 고객은 선생들 이외엔 이제껏 아무도 없었다”면서 “그래서 大非川 일대에서 길을 좀 헤맸긴 했지만, 우리가 헤맨 靑海南山 남쪽 草原과 모래땅 일대가 바로 대비천 전투현장이 아니냐”고 당당하게 받았다. 사실, 우리는 그녀의 말처럼 대비천 전투의 현장을 본의 아니게 구석구석 둘러본 셈이었다.
213번 국도의 共和-湟源(황원) 구간은 도로 보수공사 중이었다. 이 때문에 우리 일행을 태운 지프는 대체도로인 일월산의 험한 고갯길을 굽이굽이를 오르고 내려야 했다. 西寧의 숙소로 돌아온 시각은 날이 바뀌어 새벽 0시30분이었다.(계속)
)/唐나라가 羅唐협약을 깨뜨리자 신라는 드디어 전쟁을 결심.
|
金春秋와 唐 태종의 비밀 협정!
鄭淳台 작가st-jung@hotmail.com
隋·唐(수·당)은 선비족 王朝
그러면 이제는 羅·唐전쟁에 이르기 전의 국제정세를 짚어볼 차례이다. 617년, 太原留守(태원유수) 李淵(이연)이 거병하여 長安을 점령했다. 이때 隋(수)의 煬帝(양제)는 수도 長安을 비우고 江都(강도:지금의 강소성 揚州)로 南行, 酒色(주색)에 골몰하고 있었다. 611년 이후 3년간 세 번이나 감행된 고구려 遠征(원정)의 실패로 인한 경제 파탄으로 전국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煬帝는 통치에 자신감을 잃었던 것이다.
618년, 양제는 친위대장 于文化及(우문화급)에게 江都의 行宮(행궁)에서 살해당했다. 이에 長安을 점거하고 있던 李淵은 그가 옹립한 허수아비 황제(隋 양제의 손자 恭帝)를 죽이고, 唐(당) 왕조를 창업했다. 그가 唐의 高祖(고조)이다. 唐 고조 李淵과 隋 양제 楊廣(양광)은 이종사촌간이다. 隋 양제의 어머니는 선비족의 명문 獨孤信(독고신)의 제4녀, 唐고조의 어머니는 獨孤信의 제9녀로서 親자매간이다.
중국의 史書에서는 隋와 唐을 漢族왕조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지만, 역사왜곡이다. 선비족왕조 北周(북주)를 찬탈해 隋를 창업한 文帝 楊堅(양견)의 아버지 楊忠(양충)은 원래 선비족의 3字 復姓(복성)인 普六茹(보륙려)씨였다. 唐 왕조의 李씨도 선비족 왕조 西魏(서위)의 8柱國 가문 중 하나로서 陰山山脈(음산산맥)의 요충지를 방어하던 武川鎭(무천진) 군벌이며, 그들의 본래 성은 선비족 復姓(복성)인 大野(대야)씨였다.
<<사진-수·당 皇家의 子宮인 武川鎭 거리>>
선비족은 원래 흉노의 모돈 선우에게 멸망당한 東胡(동호)의 후예이다. 흉노가 前漢 말에 南흉노·北흉노로 분열하여 세력을 잃자 선비족은 남·북 흉노 사이를 파고들어 그 세력권이 동쪽에서는 만주의 흥안령산맥, 서쪽으로는 지금의 감숙성·청해성에 이르게 되었다. 그 일파인 拓跋(척발)씨의 선비족이 華北(화북)에 기마민족정복국가인 北魏(북위)를 세웠다.
南흉노는 前漢 말에 장성 안으로 이주해 後漢 및 삼국시대의 魏 그리고 西晉(서진) 시대에 용병이 되었다. 4세기에 전개된 五胡十六國 (오호십육국) 시대에는 五胡의 하나로서 前趙· 後趙· 北涼· 夏 등의 나라를 건설했다.
한편 몽골 高原에 남아 있던 北흉노는 後漢(후한) 및 後發(후발)의 유목민족인 丁零(정령), 그리고 北魏를 건국했던 선비족의 공격을 받아 멀리 서방으로 이동했다. 이 北흉노가 4세기에 로마세계를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고,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진시킨 훈族이라는 것은 거의 정설화되어 있다.
선비족 왕조인 唐도 창업 초에는 통일왕조가 아니었다. 洛陽(낙양)에는 王世充(왕세충), 河北에는 竇建德(두건덕) 등 여러 군벌이 난립해 천하를 다투고 있었다. 唐이 群雄(군웅)들을 평정하고 통일정권을 이룩한 것은 건국 8년 후인 624년의 일이었다.
626년, 高祖(고조)의 차남 李世民(이세민)이 쿠데타를 일으켜 형(황태자 建成)과 동생(齊王 元吉)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것이 소위 玄武門(현무간)의 變(변)이다. 이세민은 황태자와 제왕 元吉(원길)의 가족도 모두 몰살하여 후환을 끊었다. 다만 元吉의 아내만은 살려 측실로 두었다. 고조 李淵은 上皇(상황)으로 물러앉고, 이세민이 즉위했다. 그가 唐의 태종이다.
당시 아시아 대륙의 패권국은 오르도스 북방에 웅거한 東돌궐이었다. 李淵이 太原(태원)에서 거병할 때 東돌궐로부터 기병 3000기의 지원을 받았다. 이후 唐은 돌궐에 자주 조공을 바쳤다. 태종 李世民이 즉위한 626년에 돌궐의 頡利可汗(힐리가한)은 10만 기를 거느리고 長安 70리 밖인 渭水(위수) 다리까지 쳐내려 왔다. 太宗이 감행한 宮庭(궁정) 쿠데타의 죄를 물은 것이다. 可汗(가한: 카간)은 돌궐제국 君主(군주)의 칭호이다.
중국의 史書에서는 太宗이 渭水 남안으로 달려가 힐리가한을 꾸짖어 철병시킨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것 또한 역사왜곡이다. 이때 唐 태종은 長安의 府庫(부고)를 모조리 털어 힐리가한에 헌상함으로써 멸망의 위기를 모면했다고 보아야 한다. 흉노처럼 純粹(순수) 유목민족인 돌궐은 半유목․ 半농경 민족인 선비족․ 오환족․ 만주족과는 달리 농경지대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돌궐의 최대 관심사는 약탈이었던 것이다.
唐태종이 고구려 정벌에 집착했던 까닭
唐 태종은 東돌궐에 대한 복수의 칼을 갈았다. 630년, 당의 명장 李靖(이정)이 내분중인 東돌궐의 王庭(왕정)을 공격, 힐리가한을 생포했다. 唐朝는 홍로경(주변국과의 외교를 담당하는 관서의 장관)을 돌궐에 파견하여 힐리가한을 안심시킨 다음에, 급습을 가했던 것이다. 이때 돌궐족 10여만 명이 중국 內地(내지)로 옮겨져 변경 수비를 떠맡게 되었다.
<<그림-唐代의 기병>>
634년, 唐은 기세를 타고 청해호 남안의 吐谷渾(토욕혼)을 복속시켰다. 641년 唐 태종이 문성공주를 토번의 송첸 칸포에게 보낸 일은 앞에서 거론했다. 이것은 동방정책 추진을 위한 그의 사전 포석이었다. 한편 토번은 이같은 정세를 이용하여 티베트 高原을 완전히 통일했다.
645년 唐 태종은 드디어 遼河(요하)를 건너 고구려에 대한 침략을 감행했다. 그러나 安市城(안시성) 공방전에서 참패하여 철퇴했다. 唐 태종이 고구려 공략에 집착한 것은 같은 선비족 왕조인 隋(수)를 대신한 唐의 대내외적 위신과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형제의 피를 손에 묻히고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뭔가를 보여주어야겠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엇던 것이다.
648년, 고구려․ 백제의 挾擊(협격)을 받아오던 신라의 재상 金春秋(김춘추:후일의 太宗武烈王)가 唐 태종 李世民과 만나 비밀 협정을 맺었다. 비밀협정의 골자는 고구려․ 백제를 공파한 후 신라가 백제의 故土(고토) 전부와 대동강 以南 고구려 故土를, 唐은 대동강 이북을 차지한다는 약속이었다. 이후 東아시아 세계는 羅-唐의 東西동맹과 고구려-백제-倭(왜)로 연결되는 南北동맹의 대결 양상으로 압축되었다. 이 해 북방의 강자 薛延陀(설연타)의 왕 阿波設(아파설)이 唐에 항복했다.
唐 태종과 티베트 통일의 영웅인 송첸 칸포는 649년 잇달아 사망했다. 토번에서는 송첸 칸포의 아들이 칸포를 승계했다. 唐에서는 李治(이치)가 후계했다. 그가 高宗이다.
고종 李治는 아버지 태종의 才人(재인)인 武씨를 정2품 후궁인 昭儀(소의)로 맞이해 총애했다. 才人은 唐 황제가 거느리는 121인의 后妃(후비) 중 하나이다. 태종이 죽은 후 武재인은 머리를 깎고 感業寺(감업사)의 여승이 되어 있었으나 고종에 의해 다시 입궁했던 것이다. 고종이 자기 아비의 여자를 자기 여자로 만든 것은, 生母(생모)를 제외한 아비의 처첩을 모두 물려받는 騎馬民族(기마민족)의 婚風(혼풍)과 별로 다를 바 없다.
657년, 唐將(당장) 蘇定方(소정방)은 중앙아시아의 타시켄트까지 추격하여 西돌궐의 沙鉢羅(사발라) 카간을 생포했다. 그 후 소정방은 靑海 지구에서 주둔하다가 660년 1월 長安에서 신정하례식을 겸한 논공행상에 참여한 후 3월 山東반도의 끝 成山角(성산각)에서 黃海(황해) 직선항로를 통해 南陽灣(남양만) 앞 덕물도에 상륙했다. 당군은 금강 河口로 진입, 수륙 양면으로 백제의 사비성으로 진격했다.
<<사진-成山角>>
한편 金庾信(김유신)이 거느린 신라군은 炭峴(탄현:대전 동남부 식장산)을 넘어 황산벌에서 계백이 거느린 백제군을 격파하고 사비성으로 진군했다. 羅唐연합군은 7월19일 백제 의자왕의 항복을 받았다.
백제 멸망 후 唐은 648년 나당 협약을 위반, 熊津都督府(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백제의 고토를 직할 식민지로 삼았다. 661~662년 蘇定方이 거느린 당군은 평양성을 포위했지만, 고구려군의 반격을 받아 패전했다. 唐이 한반도 전선에 몰입해 있던 662년 論欽陵(논흠릉) 휘하의 토번군이 唐의 속국이 된 토욕혼을 공격했다.
663년 8월, 白村江 전투에서 나-당 연합군은 백제-왜 연합군을 격멸했다. 왜국은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3차에 걸쳐 3만2000명의 병력을 한반도에 파견했었다. 백촌강 패전 후 백제 귀족들은 대거 왜국으로 망명했다.
666년, 고구려의 독재자 淵蓋蘇文(연개소문)이 병사했다. 그의 장남 男生(남생)이 막리지의 지위를 계승했지만, 지방 순시를 나간 사이에 동생 男建(남건)과 男産(남산)이 형의 지위를 빼앗았다. 男生은 압록강 북안의 國內城(국내성)을 점거하고 그의 아들 獻誠(헌성)을 적국 唐에 보내 항복했다. 667년, 唐이 對고구려 전쟁에 열중하는 사이 토번은 토욕혼을 완전 병합했다.
668년, 나당 연합군은 평양성을 攻破(공파)했다. 唐은 고구려의 故土에 安東都護府(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唐의 직할 식민지로 편입했다. 이것은 金春秋와 李世民(唐태종) 사이에 합의된 648년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폭거였다. 고구려 멸망 때까지는 백제의 故土를 직할 식민지로 삼은 唐의 배신행위에도 은인자중하던 신라는 드디어 對唐(대당)전쟁을 결심했다.
신라는 나당연합군의 평양 攻破(공파)가 예상되던 668년 8월에 이미 왜국에 공식 사절단을 파견하여 對唐 開戰(개전)에 대비한 주변 외교를 전개했다. 白村江 전투에서 참패한 왜국은 나당연합군이 침공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여 방어하기 좋고 도주하기도 좋은 琵琶湖(비파호) 연안, 지금의 오쓰(大津)로 천도해 놓고 있었다. 신라의 주변외교로 왜국은 신라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하고, 文武王과 김유신에게 선박 1척씩의 예물을 증정했다. 그해 11월, 왜국은 답례사절을 신라에 파견했다. 이로써 657년 이래 10여년 동안 단절되었던 신라-왜국 간의 국교가 회복되었다.
669년 4월, 토번의 평화사절이 長安에 도착하여 唐 고종과 측천무후를 만나 모종의 협상을 진행시켰다. 토번이 唐의 속국이었던 토욕혼을 병합한 데 대한 唐의 공격을 무마하기 위한 평화공세였다.
이해 5월, 唐은 2만8000여 호의 고구려 유민을 자국 영토로 강제 이주시켰다. 9월, 토번이 실크로드를 공격하자, 安東都護 설인귀가 병력을 이끌고 靑海로 이동하고 있었다. 신라는 물론 이런 정보를 얻었을 것이다.
신라는 백제 故土에 대한 공세를 전개하는 한편 金欽純(김흠순:金庾信의 동생)과 金良圖(김양도)를 唐 조정에 파견하여 백제 고토를 잠식해 온 신라의 입장을 설명했던 듯하다. 唐은 신라 사신 2인을 감금했는데, 다음 해 1월, 김흠순은 석방되었으나, 김양도는 옥사했다.(계속) |
新羅, 기벌포 해전서 大勝 후에도 국방력 증강 | |
|
|
韓國史의 운명을 결정한 현장-靑海省을 가다(4)/“唐軍(당군)은 서부전선에서 토번군에 고전, 신라를 침략할 여유가 없었다” |
|
新羅, 기벌포 해전서 大勝 후에도 국방력 증강
鄭淳台 작가st-jung@hotmail.com
신라의 先制공격
670년 4월, 고구려의 大兄(대형14관등 중 제7위) 劒牟岑(검모잠)이 水臨城(수림성:황해도 평산)을 근거지로 삼아 부흥군을 일으켰다. 같은 달 4일, 신라에 망명 중이던 고구려의 太大兄(태대형:14관등 가운데 둘째 등급) 高延武(고연무)가 신라의 사찬 설오유와 함께 각각 1만 명씩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요녕성의 鳳凰城(봉황성) 지역으로 진출, 말갈군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을 적극 지원했다.
이 해 5월, 唐(당)은 좌감문위대장군 高侃(고간)을 東州道行軍摠管(동주도행군총관)으로 임명하여 한반도 전선에 투입했다. 고간과 이근행은 평양성을 점거하고 있던 고구려 부흥군을 남쪽으로 내몰았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을 金馬渚(금마저: 전북 익산)로 집단 이주시키고, 보장왕의 서자 高安勝(고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여 웅진도독부를 견제했다.
唐은 백제 유민을 조종하여 신라의 對唐(대당) 적대행위를 분쇄하려 했다. 이에 신라는 대아찬 金儒敦(김유돈)을 웅진도독부에 급파하여 휴전을 요청했다. 이렇게 和戰 양면책에 능숙했다.
이 해 7월, 설인귀가 이끈 당군은 靑海의 大非川(대비천) 전투(7월)에서 토번군에게 참패했음은 앞에서 살폈다. 이로써 630년 東돌궐의 頡利可汗(힐리가한) 생포로 성립된 唐의 覇權(패권)시대는 40년 만에 종말을 고했다.
671년 1월, 신라군은 熊津都督府(웅진도독부)의 소재지인 公州 남쪽 근교에서 당군과 접전을 벌였다. 6월, 金竹旨(김죽지)가 지휘하는 신라군이 사비성 근교의 加林城(가림성) 일대 들판의 농작물을 짓밟아 당군에 대한 兵糧(병량) 공격을 감행했다. 이때 출동한 당군과 石城(석성:논산 서부) 일대에서 접전, 5300여 명을 살상하고, 백제 장수 2명과 당군의 고급장교 6명을 생포했다.
671년 7월, 신라의 文武王(문무왕)은 唐의 행군총관 薛仁貴가 보낸 항의 서신을 접수했다. 설인귀는 大非川 전투의 패전 책임을 지고 象州(상주)로 유배를 갔으나 측천무후로부터 사면을 받고 한반도에 再투입되었다. 文武王은 이에 答薛仁貴書(답설인귀서)를 보내 대동강 以南의 토지에 대한 신라의 영토권을 당당하게 천명했다. 이때, 신라는 부여에 所夫里州(소부리주)를 설치하여 백제 故土(고토)에 대한 점령지역을 확대했다. 그 해 겨울에는 신라 해군이 예성강 하구에서 唐의 수송선 70여 척을 공격하여 당군 100여 명을 포획했는데, 익사한 적군은 매우 많았다. 兵站線(병참선)에 타격을 가함으로써 唐 육군의 지속적인 南下를 저지했다. 신라군은 백제 고토에 대한 공세를 강화, 672년 웅진도독부를 완전히 축출했다.
672년 4월, 토번의 사절이 長安에 도착하여 당과 평화협상을 진행했다. 이렇게 토번도 신라처럼 唐과 和戰 양면책을 구사했다. 8월, 高侃(고간)과 이근행이 이끄는 당군 4만이 고구려 부흥군에 대한 공세를 걸어 평양 근교 韓始城(한시성)과 馬邑城(마읍성)을 함락시키고 남하하여 白水城(황해도 재령)을 포위했다. 이에 신라는 백수성에 구원군을 급파했다. 신라-고구려 연합군은 백수성 들판에서 唐軍을 협격했다. 이때 신라의 長槍幢(장창당:긴 창을 쓰는 부대)은 唐의 騎兵(기병) 수천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일러스트-唐代의 기병(左)과 보병(右)>>
石門전투의 패배로 최대 위기 맞아
고간의 唐軍은 후퇴하여 石門(황해도 서흥)의 요충지에다 굳센 진을 치고, 추격해 오는 신라군과 맞서 싸웠다. 백수성 전투 때 장창당의 전과에 자극을 받은 신라군의 각 부대는 서로 戰功(전공)을 다투어 협조체제를 이루지 못했다. 석문전투에서 신라군은 대아찬 金曉川(김효천), 아찬 金能申(김능신)․ 金豆善(김두선), 사찬 金義文(김의문)․ 金山世(김산세), 일길찬 金良臣(김양신) 등이 한꺼번에 전사하는 대타격을 입었다. 나당전쟁 개전 이래 최대의 위기였다.
이 같은 패전을 보고받은 문무왕은 즉시 重臣(중신)회의를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했다. 이때 金庾信(김유신)은 당군의 전략을 알기 어려우므로 장병을 총동원하여 요충지의 방어를 강화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신라는 당군의 남하에 대비하여 漢山州(한산주:경기도 廣州)에 晝長城(주장성:남한산성) 등을 축조했다. 주장성은 北漢山城(북한산성)과 함께 한강 유역을 방어하는 강력한 요새가 되었다. 문무왕은 能小能大(능소능대)했다. 그 해 9월에 金原川(김원천) 등을 당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그는 문무왕의 사죄 表文(표문:임금에게 바치는 글)을 보내고, 그동안 포로로 잡혀 있던 萊州(내주) 자사 王藝本(왕예본)과 烈州長史(열주장사) 王益을 비롯한 唐兵(당병) 170여 명을 인도했다. 뿐만 아니라 신라에 대한 적대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금 120分(푼), 은 3만3500푼, 동 3만3000푼, 바늘 40승포, 牛黃(우황) 30승포 등을 唐 조정의 요인들에게 예물로 증정했다.
이런 노력으로 신라에 대한 唐의 태도는 일단 누그러졌지만, 신라군의 지원을 받는 고구려 부흥군에 대한 당군의 공세는 가열되었다. 673년 5월, 燕山道摠管(연산도총관) 이근행 휘하의 당군은 임진강 전선에서 대공세를 벌였다. 임진강 중류를 장악하고 있던 고구려 부흥군은 임진강의 요새에서 唐의 대군에 포위되어 수천 명이 포로가 되는 큰 타격을 입고 와해되었다. 이후 부흥군 세력은 대부분 신라 내륙으로 이동하여 신라군에 편입되었다.
673년 7월, 신라의 태대각간 金庾信(김유신)이 79세를 一期(일기)로 병사했다. 신라는 당군이 고구려 부흥군과 전투를 벌이는 기간에 방어력을 대폭 증강시켰다. 673년 9월에 이르기까지 내륙 및 변방의 요충지에 많은 성곽을 증축하거나 새로 축조했다. 대아찬 金徹川(김철천) 등은 함선 100척을 거느리고, 당군의 해상보급로에 대한 초계활동을 강화시켰다.
최후의 육상 決戰— 買肖城(매소성) 전투
그해 가을 9월, 당군은 임진강을 도하하여 한강 북안 王逢河(왕봉하:경기도 고양)까지 남하했다. 그해 겨울, 당군은 예성강 중류에 위치한 牛岑城(우잠성:황해도 금천)을 공격했다. 이어 童子城(경기도 김포시 통진) 등도 거란․말갈군의 공격을 받고 함락되었다. 신라는 9軍을 투입해 당군의 공세를 막았다.
674년 1월, 唐은 문무왕에게 주었던 관작을 취소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그리고 신라의 내부분열을 유도하기 위해 長安에 머물고 있던 金仁問(문무왕의 동생)을 새로운 신라 국왕으로 임명하고 그를 호위하고 갈 원정부대를 편성했다. 총사령관은 鷄林道(계림도)대총관 劉仁軌(유인궤), 부사령관은 衛尉卿 李弼(위위경 이필)과 右領軍대장군 이근행이었다.
그러나 唐은 신라에 원정군을 파견할 형편이 아니었다. 673년 12월, 天山산맥 일대 西돌궐의 여러 부족이 토번의 선동을 받아 對唐 공세를 벌이기 시작했다. 唐은 소정방을 파견하여 급한 불을 꺼야 했다. 신라와 당은 674년 1월부터 675년 2월까지 14개월간 휴전상태에 들어갔다. 문무왕은 674년 8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서라벌에서 대대적인 열병식을 거행하여 항전 의지를 과시했다.
그러나 675년 1월 토번의 사절이 長安에 도착하여 당측과 모종의 협상을 벌였다. 이같은 정세 속에서 당의 한반도 작전이 재개되었다. 金仁問을 호위하여 서라벌에 입성하라는 측천무후의 명령을 받은 劉仁軌(유인궤)는 675년 2월에 임진강을 도하하여 七重城(칠중성:경기도 파주군 적성면)을 대파했다. 이에 문무왕은 사죄 사신을 長安에 파견하여 평화공세를 벌였다. 唐은 문무왕의 사죄를 받아들이고 총사령관 유인궤를 귀국시켰다. 김인문도 신라로 오던 도중에 長安으로 되돌아가 臨海郡公(임해군공)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왜 그랬을까?
이때 유인궤의 귀국 후, 임진강 전선의 총사령관은 이근행이 맡았다. 문무왕이 사죄했다고 측천무후가 유인궤를 불러들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귀국 후 유인궤는 곧장 靑海(청해) 전선에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675년 10월, 임진강 하구에 접근하던 唐의 보급 함대가 신라 해군에 의해 交河(교하:경기도 파주)에서 저지당했다. 신라 장군 김문훈은 당군 1400명을 전사시키고, 병선 40척을 포획했다. 이달 29일, 신라군은 이근행이 점거하고 있던 임진강 支流 한탄강 남안의 買肖城(매소성:경기도 연천군 全谷)을 공격하여 패퇴시켰다.
<三國史記>에 따르면 말갈병 20만 명을 거느린 이근행은 매소성 전투에서 패배, 戰馬(전마) 3만여 필과 다수의 무기를 버리고 도주했다. 이는 임진강을 통한 당군의 병참선이 봉쇄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戰馬는 병사의 12배의 식량을 먹기 때문에 군량이 떨어진 이근행 軍으로서는 끌고 다니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약탈을 하며 북상한 이근행은 귀국 후 바로 청해 전선에 투입되었다.
기벌포 海戰 대승 후에도 放心하지 않았던 신라의 지도층
675년, 唐은 서역의 安西4鎭(현재의 신강위구르自治區 남부지역)을 탈환했지만, 토번은 西돌궐과 연합하여 이 4鎭을 다시 攻取(공취)했다. 676년 토번의 만손 칸포가 병사했다. 만손 칸포의 왕비는 친정 오빠이며 國相(국상:정승)인 麴薩若(국살약)과 짜고 그녀의 소생인 치토슨을 후계 칸포로 세웠다. 반면, 청해 전선에서 당군과 대치 중이던 論欽陵(논흠릉)은 자기 陣中(진중)에 머물고 있던 치토슨의 異腹(이복)동생을 칸포로 옹립하려고 했다.
토번은 敵前分裂(적전분열)의 위기에 빠질 뻔했지만, 論欽陵은 현명했다. 그는 치토슨을 칸포로 인정해 주는 대신에 兵權(병권)을 계속 장악하는 선에서 국살약 측과 대타협을 했던 것이다. 내부 안정을 이룬 논흠릉은 676년부터 唐에 대공세를 재개했다.
676년 11월, 사찬 金施得(김시득)이 거느린 신라의 함대는 伎伐浦(기벌포) 전투에서 薛仁貴가 지휘한 唐의 함대를 대파했다. 唐의 함대는 금강 하류로 진입하려다 신라 함대에 포착되어 싸움이 벌어졌다. 신라 함대는 첫 전투에서 불리했으나 이어 전개된 大小(대소) 22회의 전투에서 모두 이겨 당군 4000여 명을 살상했다.
기벌포 해전이 나당전쟁의 마지막 결전이 되었다. 이후 당군은 토번군에 고전, 신라를 침략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후 역사 전개가 그렇다는 것이지, 羅唐 간에 평화가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唐은 신라 조정에 대해 계속 압박을 가했고, 신라는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당군에 대비해 계속 국방력을 증강시켜야 했다.
양국의 국교가 완전 회복된 것은 그로부터 56년 후인 渤海(발해)가 山東반도를 기습했던 732년 이후의 일이었다. 훗날의 일이지만, 唐은 渤海(발해)에 보복하기 위해 신라에 대해 연합작전을 요청했다. 신라는 원정군을 일으켜 발해의 남쪽 국경을 공략했으나 때마침 몰아친 한파로 다수의 병력을 잃고 戰果(전과)도 없이 회군했다. 그러나 唐은 신라의 군사지원에 대한 보답으로 신라가 지배하고 있던 대동강 이남의 땅을 734년 신라 영토로 승인했다.
기벌포 전투 패전 후 唐은 요동성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新城(신성:요녕성 撫順)으로 더 후퇴시켰다. 677년에는 옛 고구려의 보장왕 高藏(고장)을 요동도독으로 임명한 데 이어 朝鮮(조선) 국왕으로 책봉했다. 또한 중국의 변경으로 끌고 갔던 고구려 유민 2만8000여 호를 요동에 再이주시켰다. 그러나 보장왕은 反唐(반당) 활동을 기도하다가 오지인 邛州(공주:사천성)로 귀양하고, 고구려 유민들은 지금의 甘肅省(감숙성) 등 변경으로 분산 이주시켰다. 백제 義慈王(의자왕)의 왕자 扶餘隆(부여융)은 熊津都督(웅진도독)에 임명된 데 이어 帶方王(대방왕)에 책봉되었으나 이곳은 이미 신라가 지배하고 있었던 만큼 부임할 수 없었다.
677년 5월, 토번은 扶州의 臨河鎭(임하진:지금의 사천성 西部)을 공격했다. 이어 9월에 청해 지역을 대대적으로 공략한 토번군은 河源道행군총관 李敬玄(이경현) 휘하의 左衛대장군 劉審禮(유심례)를 사로잡고, 당군 18만 명을 전사시켰다. 토번의 대공세였다.
그러나 677년 후반에서 678년으로 넘어가는 시점에 티베트 고원에서 羊同(양동)의 부흥세력과 토번의 병권을 잡은 論欽陵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唐으로서는 토번에 복수할 절호의 기회였다. 그럼에도 唐 고종은 신라 공격에 집착했다. 다음은 <資治通鑑(자치통감)>儀鳳 3년(678) 9월 조의 기사이다.
<高宗이 장차 發兵(발병)하여 新羅를 토벌하려 했다. 병으로 집에 있던 侍中 張文瓘(장문관)이 입궐하여 고종에게 간했다. “지금은 토번이 侵寇(침구:침입하여 노략질함)하니 바야흐로 發兵하여 西討(서토)를 해야 합니다. 신라는 비록 자주 불순하지만, 일찍이 변방을 침범하지는 않았습니다. 만일 다시 東征(동정)을 한다면, 臣(신)은 그 弊害(폐해)가 公私(공사)간에 심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에 고종은 東征을 중지했다. 丙寅에 이경현의 장병 18만이 靑海에서 토번군의 論欽陵 軍과 싸우다 패했다….>
681년 7월, 문무왕이 죽고, 그의 아들 神文王(신문왕)이 즉위했다. 신문왕의 즉위 직후 신문왕의 장인인 소판 金欽突(김흠돌), 파진찬 金興元(김흥원), 대아찬 金眞功(진공) 등이 역모를 도모하다가 처형되었다. 병부령 金軍官(김군관)은 김흠돌이 반역할 것을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았다고 목을 벴다. 신라는 언제 재개될지 모른 상황에서 불평분자 및 親唐분자 등을 숙청하여 擧國(거국) 일치체제를 굳혔다.
<<사진-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에 있는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
그 무렵, 唐은 東돌궐의 반란을 진압하여, 신라에 외교적 압력을 가할 여유가 생겼다. 신문왕 원년(681)에 唐 고종은 신라 太宗武烈王의 시호가 외람되게 唐 太宗의 시호와 겹친다면서 이의 개정을 요구했다. 이것은 삼국통일을 추동한 武烈王-文武王 系의 立地(입지)를 흔들려는 의도였다. 신문왕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신라는 국방력 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신문왕 재위 12년간에 신라는 군단 조직인 九誓幢(9서당:9개 군단)을 완성했다.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