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군 3만명 수장 파로호...현대판 살수대첩`
'물 반 고기 반'이던 호수가 '물 반 시체 반'으로"저 푸른 파로호가 붉게 물들어 시체가 둥둥 떠다녔지. 여길 떠나지 않으니까 전쟁의 참상을 떨쳐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어."
6.25전쟁 당시 6사단 7연대 2대대 6중대장으로 참전한 김달육(82.화천읍)씨는 적군 3만명을 수장시킨 파로호 전투의 산 증인이다.
강원 화천군 파로호 전망대를 찾은 김씨는 춘천대첩부터 파로호 전투까지 자신이 참전한 60년 전 기억을 생생하게 되짚었다.
◇ 한국전쟁의 흐름을 바꾼 '파로호 전투' = 충북 영동이 고향인 김씨는 1946년 초 입대한 뒤 전쟁중인 1950년 9월 소위 계급장을 달았다.
김씨는 "1947년 청주에 있었는데 국군 2개 대대가 월북한 사건이 발생하는 바람에 38선이 있던 춘천으로 올라가 전방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6.25가 터졌어."라고 말문을 열었다.
김씨가 최초로 참가한 전투는 전사에 '춘천대첩'으로 기록된 소양강 저지작전.
당시 북한군은 춘천과 수원을 거쳐 서울을 포위할 계획으로 소양강 도하를 시도했지만 육탄전투로 3일을 버티며 적의 남진을 저지, 국군의 퇴로를 확보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후 국군의 첫 승리로 기록된 음성지구 전투의 기쁨도 잠시, 김씨가 소속된 6사단은 대구 팔공산 인근 신령산까지 후퇴했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 압록강 초산지역까지 북진한다.
그러나 1951년 봄 중공군은 겨울이면 소강상태에 들어갔다가 봄이 되면 다시 공세를 펼치는 이른바 '춘계공세'를 펼쳤다.
또다시 후퇴한 김씨의 6사단은 양평 용문산 지구에서 전사에 길이 남을 대승을 거두고 북한강을 따라 북쪽으로 후퇴하는 적을 쫓아간다.
◇ 특명 '화천댐을 확보하라' = 38선을 재돌파한 김씨의 부대는 적의 심장부에 일격을 가하는데, 그것이 바로 '현대판 살수대첩'으로 불리는 파로호 전투다.
국군 6사단, 해병 제1연대, 학도병이 중공군 3개 사단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3만여명을 파로호에 수장시키는 대승을 거둬 북진의 교두보를 확보한 것이다.
이는 당시 북진하는 국군에게 내려진 '화천댐을 확보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에 따라 이뤄졌다.
변변한 전력시설이 없던 당시 북한군의 수중에 있던 화천댐은 반드시 탈환해야 할 지상 목표였으며 북한군으로서는 절대 빼앗길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김씨의 부대는 용문산전투 승리 여세를 몰아 1951년 5월 '화천발전소 탈환전'이라 이름붙여진 파로호 전투를 3일간 밤낮없이 치렀다.
계속된 전투로 지칠대로 지친 상황이었지만 중대장이던 김씨는 죽어가는 전우를 보면서 악으로 전투를 치렀다고 증언했다.
그는 "파로호에서 북쪽 화천댐 방향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비처럼 쏟아지는 총알과 포탄을 피해 진격하는데 한 번 공격 때마다 중대원 절반 이상이 부상으로 후송되거나 쓰러졌어. 부대원을 잃은 아픔은 지금도 마음의 응어리로 굳어져 있다."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파로호 진격 당시 인근 구만리의 작은 동굴에서 부상당한 인민군이 모여 있었는데, 치료를 못해 상처에 구더기가 끼어 있는 모습을 보고 적군이지만 마을에서 간장을 구해와 소독해주며 간병을 해주었다."라고 회상했다.
◇ '물 반 고기 반'이던 파로호가 '물 반 시체 반' = 김씨는 "처음 파로호를 찾았을 때 호수는 물반 고기반이었어. 물은 또 어찌나 맑던지.."라며 눈을 감았다.
현재 화천군과 양구군에 걸쳐 있는 파로호(波虜湖)의 원래 이름은 대붕호다.
'파로호'라는 명칭은 '오랑캐를 격파한 호수’라는 뜻. 이승만 대통령이 파로호 전투 승전보를 듣고 직접 이곳을 방문해 붙여준 이름이다.
당시 작전지도에는 화천저수지로 기록돼 있다. 지난 1944년 일제가 대륙침략의 발판을 위해 북한강 협곡에 구만리 발전소(현재 화천댐)를 세우면서 생긴 인공호수다.
지금의 화천댐이 들어선 구만리는 댐이 생기기 전에는 간동면사무소의 소재지로 번성했으나 인공호수가 생기면서 수몰돼 이제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김씨는 전투 상황을 회고하는 대목에 이르자 전율을 느끼는 듯했다.
그는 "시체가 파로호에 둥둥 떠 있었고 도로에도 쌓여 있어 썩어가는 냄새를 막고자 마늘을 콧구멍에 넣고 다녀야 했다."며 참담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 포탄에 금새 민둥산이 되어버렸어. 중공군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 정말 개미떼처럼 보였어."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파죽지세로 몰아붙인 국군의 위용과 항공기 등으로 지원사격에 나선 유엔군은 파로호 주변 골짜기에 중공군을 몰아붙여 5월28일 하루에만 3만8천여명의 포로를 붙잡는 대승을 거뒀다.
하지만 그 맑던 파로호는 고기 대신 시체가 떠다니는 핏빛 호수가 됐다.
김씨는 "여기서 죽어간 영혼들이 아직도 저 푸른 파로호에 떠다니는 것 같다."며 "당시의 기억 때문에 단 한 번도 파로호에서 잡힌 물고기를 먹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 죽어가는 전우 "꼭 통일만은.." = 중공군 3만명을 수장시킨 대승이었지만 아군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김씨는 "중대원들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통일을 시켜달라'고 말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전우들의 한마디가 승리를 위한 굳은 신념이 되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1952년 6월 15일 낮 쏟아지는 총탄에 허벅지 관통상을 당해 후송 당했다.
이후 1960년 12월 23일 소령으로 대전 육군병원에서 퇴역하고서도 전우들의 영혼이 떠도는 파로호를 떠나지 못하고 화천에 정착, 지역에서 무공수훈자회 화천지회장을 맡고 있다.
무공훈장과 화랑훈장 5개를 받은 그는 "당시 북한땅이던 화천은 교통이 불편, 종군기자 접근이 안 돼 증언자료가 부족한 것이 항상 마음에 걸린다."며 "이루 말할 수 없는 전쟁의 상처를 후세가 제대로 기억해 줄 수 있을지 아쉬움이 크다."라고 말했다.
특히 김씨는 최근 북한의 천안함 공격에 대해 노병의 신념을 강하게 전했다.
"정말 비열한 행동"이라며 목소리를 높인 김씨는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려면 무조건 강해지는 길밖에 없어."라고 말을 맺었다.
파로호는 5월의 신록을 담고 있었지만, 노병에게는 여전히 '핏빛'이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