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刀와 티뷰론이 코리안 드림?
경기경찰청 외사범죄수사대는 경기 남부 일대에서 폭력 조직을 만들어 마약을 투약하고 자국민에게 집단 폭행한 태국인 K씨(34) 등 21명을 검거했다고 밝혔다. 뉴시스 5월 26일작년 11월 22일 새벽 2시 충남 천안시 성환읍 국도변. 질주하던 티뷰론 스포츠카 10대가 건물 앞에 끼이익 소리를 내며 멈췄다. 차문이 열리면서 까무잡잡한 태국인 40여명이 일제히 튀어나왔다.
이들은 길이 1m가 넘는 정글도와 야구방망이, 각목, 당구큐대 같은 '연장'을 들고 있었다. 태국말로 자기들끼리 뭐라고 떠들던 이들은 곧장 건물 2층에 있는 가라오케로 몰려갔다.
주말 밤 태국 근로자들이 주로 찾는 이 가라오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정글도로 테이블을 내려찍었고 반항하는 손님에겐 각목을 휘둘렀다. 일부는 가라오케 입구에서 정글도를 휘두르며 손님 출입을 막았다.
일당들은 같은 태국인으로 '게이'였던 가라오케 사장을 협박했다. 일당 중 1명이 최근 이 업소 DJ로 일하다 해고되자 앙심을 품었다고 한다. 2시간 동안 지속된 행패는 새벽 4시가 넘어서야 그쳤다.
위력을 과시한 일당들은 소음기를 개조한 티뷰론이 내는 '우웅~' 굉음을 남기고 국도 멀리 사라졌다. 폭력배에게 찍힌 술집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손님이 뚝 끊긴 이 가라오케는 곧 문을 닫아야 했다.
외국영화에나 나올 법한 이 장면은 '깽야이'파 조직원들이 국내에서 실제 벌인 사건이다. 태국어로 '큰 폭력'을 의미하는 깽야이는 대체 어떤 조직일까.
2007년 4월 13일 밤 경기 화성시 양감면 송산리의 유흥주점에 태국인 20명이 모였다. 태국 최대 명절 '쏭끄란'을 자축하는 자리였다. 태국에서 농사짓다가 취업 비자를 받아 한국에 온 이들은 "우리도 뭉치자"고 결의했다.
즉석에서 조직이 만들어졌다. 건장한 체격과 카리스마가 남다른 카셈(34)이 두목이 됐고 말보다 주먹부터 날린다는 사난코식(27)이 행동대장으로 추대됐다. 이날 이들은 "회원이 당하면 끝까지 보복한다"고 다짐했다.
국내 외국인 조폭 세계의 '넘버원'인 중국계 연변흑사파의 상징이 '손도끼'라면 깽야이에겐 정글도가 있었다. 철강공장에서 일하는 조직원들이 직접 만들었다. 행동대장 집이 '무기고'였다.
압수수색 당시 정글도 5점과 야구방망이, 쇠파이프, 각목 등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깽야이의 힘은 정글도와 함께 '야바(Yaba)'에서 나왔다. 야바는 태국·미얀마·라오스, 이른바 '골든 트라이앵글'에서 생산되는 마약이다.
코데인·카페인·메스암페타민 등을 합성해 만드는 야바는 약효가 36시간 이상 지속된다. 깽야이 조직원들은 토요일 야바를 흡입하고 일요일까지 환각 상태에서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깽야이의 자존심은 '티뷰론'이었다. 외국인 근로자 대부분이 차 굴릴 형편이 되지 않지만 깽야이는 10여대의 티뷰론을 보유했다. 대당 200만~300만원을 주고 구입한 대포차였다. 물론 무보험에 무면허였다.
주말 밤마다 화성과 광주 등 일대를 굉음과 함께 폭주하던 티뷰론의 주인공이 바로 깽야이였다. 경기경찰청 이복규 팀장은 "외국인 근로자 사이에선 티뷰론을 모는 게 곧 '코리안 드림'을 이룬 상징이 됐다"고 했다.
수사에서 드러난 깽야이의 집단폭력은 최소 5건이었다. 경찰은 "큰 칼 들고 환각 상태에서 티뷰론 몰고 다니는 수십명의 폭력배를 누가 신고하겠냐"고 했다. 깽야이 피해자들의 공통점은 모두 머리만 집중 가격당했다는 점이다.
작년 3월 카드 도박장에선 두목에게 반말을 한 태국 근로자가 행동대장 등에게 각목으로 맞아 40바늘을 꿰매야 했다. 작년 12월 31일 새벽엔 조직원의 여자 친구와 동침하던 태국인이 정글도와 쇠파이프로 얻어맞았다.
깽야이는 일부 외국인 근로자 사이에선 '선망'의 대상이었다. 20명으로 출발한 깽야이 조직원은 최근 40여명으로 급속히 불어났다. 깽야이 외에 국내엔 이미 활동 중인 태국계 폭력조직 두 개가 있다.
위장결혼 수법으로 국내 업소에 태국 여성을 공급하는 '싸만코차호타이파'와 태국인 업소에서 금품을 빼앗는 '딸라타이파'가 그들이다. 신생조직 깽야이를 방치했다면 국내를 무대로 태국판 '삼국전쟁'이 벌어졌을지 모를 일이다.
경찰은 깽야이 두목 카셈과 행동대장 사난코식 등 조직원 4명을 폭력·마약·도검·도로교통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하고 17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달아난 9명을 지명 수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