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경기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 대성동마을은 남방한계선 북쪽에 위치한 국내 유일의 비무장지대(DMZ) 내 마을이다. 대성동 마을은 정전협정에 따라 1953년 8월 북한의 선전마을 기정동마을과 함께 조성됐다. 마을 저편 너머에 기정동 마을이 펼쳐져 있다.
국내 유일의 비무장지대(DMZ) 내 마을인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 대성동 마을. 군사분계선(MDL)에서 남쪽으로 500여m, 남방한계선 위쪽에 조성된 단 하나의 마을이다.
비가 내리던 13일 오전 대성동 마을은 농사 준비에 바쁜 여느 농촌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마을에서 지척에 있는 도라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DMZ도 모처럼 비다운 비가 내린 터라 자연생태의 보고(寶庫)다운 신록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발길이 끊긴 한가로움이 더했다.
’천안함 사건’ 이후 극도의 긴장이 이어지는, 바로 그 현장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이렇듯 아름다운 DMZ에 사는 주민 50가구 200여명은 누구보다 평화와 통일에 대한 소망이 간절하다.
분단 이후 반세기 넘게 남북관계 변화의 미묘한 파장을 몸으로 직접 느끼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늘 긴장 속에 살다 보니 이곳 주민들에게는 긴장도 반복되는 하나의 일상사가 돼 버렸다.
주민 김동구(42)씨는 “남북관계가 미묘해질 때마다 밖에서 걱정을 많이 하지만 마을 주민들은 큰 동요 없이 잘 지낸다.”라며 “큰 사건을 많이 겪은 터라 웬만해선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라고 전했다.
이 마을은 DMZ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한국군이 아닌 유엔군사령부로부터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다.
그래서 민간인출입통제선(민통선)인 통일대교에서 군(軍)으로부터 신분 확인 절차를 받고서야 남방한계선 철책을 거쳐서 들어갈 수 있다.
남방한계선 철책을 통과해 좁은 도로를 따라 500여m를 더 가면 마을 어귀가 나타난다. 눈에 들어오는, 우뚝 솟은 국기게양대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옥들이 이곳에도 주민들이 살고 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2층짜리 마을회관 옥상에 올라가면 북쪽 저편 2.4㎞ 떨어진 곳에 북한의 선전마을 기정동 마을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펼쳐져 있다. 기정동 마을에도 대형 인공기가 나부꼈다.
- ▲ 경기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 대성동마을은 남방한계선 북쪽에 위치한 국내 유일의 비무장지대(DMZ) 내 마을이다. 대성동 마을은 정전협정에 따라 1953년 8월 북한의 선전마을 기정동마을과 함께 조성됐다. 마을 한 가운데 우뚝 솟은 국기게양대에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하지만, 기정동 마을의 인공기 게양대는 이것보다 훨씬 높은 158m다. 인공기도 대성동 마을의 태극기보다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더 크다.
반세기 이상 대결 구도를 이어온 남북 분단의 상징인 이들 두 마을을 번갈아 보면서, 어느덧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의 현장’에 서 있음을 깨닫게 했다.
대성동 마을과 기정동 마을 사이의 남북 대치 현장은 그야말로 거리가 얼마 안 된다. 대성동 마을에서 가장 근거리에 있는 북한 초소는 불과 200여m. 육성으로 대화도 가능하다고 주민들은 전했다.
대성동 마을에는 유엔군사령부 내 공동경비구역(JSA) 경비대대 1개 중대가 주둔해 있다. 요즘처럼 남북관계가 극도로 긴장돼 있을 때 벌어질지도 모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즉각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대성동 마을은 ’남북 비무장지대에 각각 1곳씩 마을을 둔다’는 정전협정 규정에 따라 1953년 8월3일 북한의 기정동 마을과 함께 조성됐다.
처음엔 주변에서 농사를 짓던 30가구 주민이 모여 살며 마을을 형성했지만 6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50가구, 212명으로 인구가 늘었다.
주민 대부분이 벼농사를 짓는다. 경작 규모가 큰 부농들이다.
경작면적은 전체 2.44㎢, 농가당 9.29㏊에 달한다. 가구당 평균소득도 6천700만원으로 다른 농촌지역보다 배 이상 높다. 인근 통일촌이나 해마루촌 등 민통선 북쪽에 위치한 다른 민북마을과 비교해도 농가소득이 1.5배나 된다.
마을의 유일한 문화공간인 대성동 초등학교도 분단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한때 학생 수가 적어 폐교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최근 원어민 교사 등 정부의 각종 지원 덕에 ’명품학교’로 탈바꿈했다.
10명 안팎에 머물던 학생 수는 25명으로 늘어났고 다른 학교에서 전학을 원하는 학생이 줄을 설 정도가 됐다. 교사는 모두 17명으로 교사 1인당 학생 수도 1.47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주민들은 이런저런 제약 속에 살아야 한다.
매일 저녁 7시30분만 되면 군인들이 집집이 돌며 인원을 점검하고 자정부터 다음날 오전 5시까지 아예 통행이 금지된다.
외부인이 마을을 방문하려면 1주일 전에 신청해야 출입이 가능하다. 언론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대성동 초등학교 졸업식 날을 포함해 1년에 3∼4차례만 방문이 허용된다.
특히 북한과 가까운 일부 지역은 마을 주민이라도 군인이 동행해야 영농활동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주민들은 남북관계가 나빠질 때마다 군인들의 움직임에 잔뜩 촉각을 곤두세운다.
천안함 사건 이후 남북이 극도로 예민해진 요즘에는 군부대 작전 사정에 따라 영농활동에 지장을 받아 불편하다.
북한이 1994년에 이어 16년 만에 ’서울 불바다’ 발언까지 하고 난 직후여서 긴장도가 훨씬 높아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심금식(55.여) 부녀회장은 “남북관계가 나쁠 때는 주민들이 알아서 조심한다.”라며 “군인들이 잔뜩 긴장하고 있어 불필요한 행동은 피하고 최대한 협조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지금은 아침, 저녁으로 버스가 다니고 대부분 승용차를 가지고 있어 낮에 통행하는 데 문제가 없지만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교통편이 없어 군부대 차량을 이용해 1주일에 한 번 정도 마을을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대성동 마을 주민에게는 법적 권리와 의무도 우리나라 국민과 달리 적용된다.
4대 의무 가운데 병역과 납세의 의무가 면제된다.
농사를 지을 수 있지만, 경작권만 가질 뿐 미수복지역이어서 땅을 소유할 수는 없다.
김동찬(48) 이장은 “대성동 마을은 등기를 낼 수 없는 미수복지역으로 터전을 잃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솔직히 통일을 원하지 않는 주민도 있다.”라며 “수십년 농사를 지은 땅인데 권리조차 행사할 수 없는 게 대성동 마을의 현실이다.”라고 아픈 속내를 드러냈다.
또 1년에 6개월 이상 거주하지 않거나 결혼을 해 다른 곳으로 분가하면 거주권을 잃는다.
북한과 인접해 있다 보니 그동안 마을에 여러 차례 위기도 있었다.
1976년 8월18일 마을에서 500여m 떨어진 판문점에서 북한군이 미군을 상대로 ’도끼만행사건’을 저질렀을 때는 통행이 전면 금지되면서 극도의 긴장감이 흘렀다고 한다.
김 이장은 “전쟁이 나는 줄만 알았다.”라며 “당시 중학교 2학년으로 문산에서 운동부 합숙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이틀 동안 집에도 못 가고 부모님 걱정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라고 마음 졸였던 당시를 회고했다.
1997년에는 마을 주민 2명이 도토리를 줍다가 북한군에 끌려가 닷새 만에 송환되는 일도 있었다.
당시 북한군에 억류됐던 송승순(78) 할머니는 “마을 앞쪽에만 철책이 있지 다른 곳은 철조망이 다 녹슬어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겠더라.”라며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몸이 오싹하다.”라고 말했다.
1970년대 초반에는 농사일을 돕던 일꾼 1명이 북한군에 납치되기도 했고 2002년에는 마을에서 훈련 중이던 JSA대대 소속 미군 병사가 오발 사고를 내 주민들이 잔뜩 긴장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을 겪다 보니 마을 주민들은 평화와 통일에 대해 남다른 소망을 갖게 됐다고 한다. 남북관계가 악화되는 것보다는 좋아지기를 원하고, 자기 땅에서 농사를 짓고 싶은 간절함도 묻어났다.
김 이장은 “주민 모두의 소망이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통일이 돼 다른 농촌 마을처럼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내 땅에서 자유롭게 농사를 짓는 것이다.”라며 “배운 게 농사라 정든 고향을 버리고 떠날 수도 없고 좋은 시절이 오기를 바라고 있다.”라고 말했다.
대성동 마을 주민들은 김 이장처럼 지금의 남북 긴장 상태가 하루빨리 해소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북한 붕괴 대비해 한국은 경제 체질 강화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