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겨례의 지도자

경부고속道 40년] 불가능을 가능으로

화이트보스 2010. 6. 27. 17:34

경부고속道 40년] 불가능을 가능으로 [연합]

2010.06.27 16:34 입력

아우토반에 충격받은 박 前대통령 저돌적 추진
험준한 지형의 난공사..77명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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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해 그를 빼놓고는 논할 수 없다.

험난한 공사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피해도 발생했지만, 그의 추진력과 리더십이 당시 국내 자본과 기술로는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을 이끌었다. .

◇추진에서 준공까지 =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을 추진하게 된 것은 1964년 당시 박 대통령의 독일 방문이 계기가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면서 분단국이기도 했던 독일이 '아우토반'라는 고속도로를 기반으로 경제 부흥을 이뤘다는 점에 높은 관심을 표명했고, 시속 160km의 속력으로 아우토반을 질주하며 큰 '충격'을 받았다.

아우토반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손수 메모하기도 했다.

1967년 4월 제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선거공약을 통해서 고속도로 건설 계획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발표 직후 국가재정 등을 이유로 반대 여론이 비등했지만, 제출된 경부고속도로 설계안들을 비교ㆍ검토하는 임시작업반이 편성되는 등 발빠르게 추진됐다.

'청와대 파견단'으로 불린 이 작업반은 이후 국가기간고속도로 건설계획조사단 업무의 기초가 되며, 고속도로 건설 역사의 시발기구로 여겨지고 있다.

1967년 11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가기간고속도로 추진위원회가 구성됐고, 그 산하에 편제된 건설계획조사단이 경부고속도로의 밑그림을 그렸다.

조사단은 1968년 1월 서울~대전, 4월 대구~부산, 10월 대전~대구의 428Km 구간에 이르는 노선을 확정했다. 사업비는 최종 300억 원으로 책정됐다.

정부는 이어 경부고속도로에 편입되는 용지매입에 착수, 일부 용지는 40년 전이라고 해도 매우 저렴한 3.3㎡당 평균 322원에 사들이기도 했다.

1968년 2월 경부고속도로 첫 구간인 서울~수원간 고속도로 건설 기공식이 열린 이후 경부고속도로는 전 노선이 서울~수원(오산), 오산~대전, 대전~대구, 대구~부산 간의 4개 구간으로 크게 나누어 공사가 진행됐다.

1968년 10월 공사 시작 10개월 만에 서울~수원(오산)이 개통됐고, 오산~대전과 대구~부산은 이듬해 12월 완전 문을 열었다. 그리고 1970년 7월 대전~대구 구간의 개통을 끝으로 2년 5개월에 걸친 경부고속도로는 완전 개통됐다.

1970년 7월7일 대구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준공식은 그 험난했던 과정 만큼이나 감동의 도가니였다. 박 대통령도 감동에 겨운 눈물을 쏟아냈다.

◇연인원 892만명 투입 = 경부고속도로는 19개 국내 민간용역업체가 조사ㆍ측량과 실시설계를 담당했고, 시공에는 16개 건설업체와 3개 군 공병단이 투입됐다.

4개 구간으로 나눠 각 업체별로 할당이 됐고, 각 구간별로 공정계획을 세운 후 다시 7개 공구로 나누어 공사가 진행됐다. 현대건설이 시공의 40%를 맡았다.

터널 12곳이 시공됐고, 연인원 892만 8천명과 165만 대의 장비가 투입됐다.

추진 당시 가장 문제가 된 것 중 하나가 재원의 규모였다. 당시 박 대통령은 유관기관과 건설업체 등 6개 기관에 최저 건설비를 계산해 내도록 했다.

건설부 650억원, 재무부 330억원, 서울시 180억원, 육군공병감 490억원, 현대건설 280억원으로 제출했고, 경제기획원은 산출금액을 내지 않았다.

국가의 대동맥을 뚫는 엄청난 공사에 맞춰 견적을 뽑을 만한 비교기준이 없었고, 설계나 노선에 따라 공사비 차가 컸다.

결국 현대건설이 제안한 280억원 등을 감안해 최종 300억원으로 확정됐고, 건설재원은 휘발유 세율을 100% 인상하고 도로공채를 발행해 충당하기로 했다.

건설 과정에서 비용이 증가하면서 당초보다 40%가 늘어난 419억원이 소요됐다.

건설장비와 함께 전문 기술자, 특히 도로 관련 기술자도 없었다.

당시 우리나라가 보유하고 있던 중장비(1천647대)는 한국전쟁 전후에 도입된 노후장비였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스웨덴 등의 중장비업체에 사정에 사정을 거듭하며 1969년 2월 외상으로나마 필요한 장비를 겨우 갖출 수 있었다.

기술자로는 육사출신 위관급 장교가 교육을 거쳐 투입됐다. 장교의 지원 자격도 독신자로 제한됐다. 시도 때도 없이 전투와도 같은 교육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육사 출신 장교와 ROTC 출신 장교가 투입됐고, 공과대학이나 공업고등학교 토목과 출신 50명도 선발돼 짧은 교육이수 후 곧바로 현장에 배치됐다.

당시 경부고속도로 노선은 기존 국도가 지나던 길이 아닌 온통 논과 밭 밖에 없는 완전히 새로운 노선이었다.

조사단원들은 길이 없어서 헬기를 타고 하늘에서 확인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보다 상세한 조사를 위해 직접 걸어 다니면서 확인을 하며 직접 그려야만 했다.

◇77명 목숨 앗아간 공사 =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모든 구간이 어려웠지만, 특히 대전공구 약 70km구간이 최대 험준한 구간으로 기록되고 있다.

7개 공구 중에서 시공구간이 가장 길었고, 공사비도 가장 많이 들어갔다.

준공 후 경부고속도로는 1km에 평균 공사비 1억 원 정도가 소요됐지만, 대전공구는 평균 공사비 1억2천만원이 소요됐다.

대전공구 시공 중 건설인력 모두가 두 달 동안 단 하루의 휴일도 없이 일을 하는가 하면, 인명피해도 잦았다.

최악의 사고로 기록되는 대전육교 붕괴사고가 발생해 중경상자 30여 명을 비롯해 3명이 숨졌다. 직원이 임시가설물에서 추락해 숨졌고, 현장소장이 과로사했다.

특히, 충북 옥천군 금강휴게소 인근에 위치한 당재터널은 지층이 경석이 아닌 절암토사로 된 퇴적층으로 돼 있어 가장 어려웠던 공사로 기록된다.

터널을 뚫기 위해 발파작업을 하면 토사가 쏟아져 내리는 낙반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해 많은 인력과 장비를 투입하고도 공사 진척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잦은 낙반사고로 인명 피해가 속출했고, 솟구치는 용수 때문에 바위를 들어내던 인부들이 십여 미터씩 나가떨어지기도 했다. 공사 진도는 하루에 많아야 2m 정도에 불과했다.

현대건설은 600여대의 중기와 헤아릴 수 없는 트럭을 동원했지만, 공사 진척이 없자, 흑자를 포기하고 작업인원을 크게 늘리기도 했다.

이렇듯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자본과 기술 인력이 없던 당시 우리나라의 건국 이래 최대 공사였던 만큼 숱한 기록을 남겼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