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전령병 붙잡아 이동첩보 빼낸 후 매복… 1시간 격전 '대승'
기관총반장으로 참전한 윤창열씨
파죽지세 북한군에 밀려 남쪽으로…
열흘간 훈련받은 청년들로 병력 보충
상주 화령장 계곡서 목숨 건 기습공격
김광수기자 rolling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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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열(80)씨는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기운이 용솟음친다. 6ㆍ25전쟁 발발 후 최전방에서부터 연전연패. 하지만 밀리고 밀려서 내려간 경북 상주시에서 믿기지 않은 대승을 거두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전투를 벌이는 족족 북한군에게 깨지고 퇴각하다 보니 뒤통수가 뜨거울 정도였어요. 남겨진 주민들은 또 우리를 어떻게 생각했을지. 우리도 군복을 입은 군인인데 너무 참담하고 미안했거든요."
윤씨는 당시 일등중사(현재의 하사)로 국군 17연대 2대대 기관총반장을 맡고 있었다. 부대는 1949년 11월 38선 부근인 황해 옹진반도로 투입됐다. 철책선은 없었지만 해방 후 혼란기에 북한과 바로 맞닿은 바닷가 최전방 지역이었다.
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부대원들은 당장 퇴로를 찾았다. 하지만 오직 바다뿐. 게다가 배는 해군의 상륙함(LSD) 단 한 척에 불과했다. "우리만 살겠다고 먼저 배를 타고 떠났어요. 옹진군 주민들은 그저 바다를 바라보며 울부짖었죠. 부둣가에 늘어선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지 끝이 보이지 않더라고요. 중학교 1, 2학년쯤으로 보이는 애들이 살겠다면서 군복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는데 떼놓으면서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죠."
청주시를 벗어났을 때 연대 규모는 3,500명에서 2,600명으로 줄었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옮기다 머문 곳이 상주시 화서면 동관리에 있는 화령장이라는 계곡이었다. 충북 보은군에서 상주군으로 넘어가는 길목으로 산세가 험하고 길이 좁아 탱크가 들어올 수 없고 적의 움직임이 한눈에 보여 방어에 유리한 천혜의 지역이었다.
하지만 군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옹진군 주민들에게 곧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런데 현실은 달랐죠. 부대원들은 연이은 패배에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어요. 이렇게 밀리기만 하다가 부산 앞바다에 빠져 죽는 것 아니냐는 넋두리가 터져 나왔죠.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라고 다독였지만 사실 암담했어요."
절망 끝에 낭보가 날아들었다. 계곡 반대편에 진을 치고 있던 1대대 수색대원들이 17일 오전 인민군 15사단 소속 전령을 붙잡았다. 전령은 북한군 주력인 48연대가 이곳을 거쳐 남쪽으로 진격하면서 중간에 휴식할 것이라는 상부의 밀서를 갖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저녁 북한군 부대가 하송리 화령초등학교 송계분교와 인근 상곡리 일대에 집결했다. 운동장에 무장을 풀더니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밥을 지어먹으며 경계가 영 허술했다. 기회를 엿보던 1대대원 400여명의 총구에서 일제히 불을 뿜었고, 적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 채 전멸했다.
기회는 한 번 더 찾아왔다. 윤씨가 속한 2대대가 상곡리 전투 다음 날인 18일 인민군 전령을 또다시 붙잡아 북한 15사단장 박성철의 메모를 빼앗았다. 앞서 진격한 48연대에서 왜 보고가 없느냐고 독촉하면서 남은 45연대도 21일 새벽 진격할 테니 경북 김천시 방향으로 공격할 채비를 갖추라는 내용이었다. "D데이는 사흘 뒤였어요. 적군이 지나갈 협소한 계곡 자락에 대대원 전원이 진지를 파서 숨을 죽이고 매복했죠. 봉황산 자락 4부 능선쯤 됐나 봐요. 한여름이라 모기가 온몸을 물어뜯고 행여 적에게 들킬새라 밥도 제대로 해 먹지 못했지만 전혀 힘들지 않았어요. 드디어 우리에게도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니 온몸이 근질거리고 머리칼이 쭈뼛 서는 게 마치 먹잇감을 눈앞에 둔 맹수의 심정과 같았다고나 할까요."
21일 오전 4시30분 저만치에서 고개를 넘는 인민군의 모습이 보였다. 2열 종대로 유유히 걸어오며 온갖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 38선을 넘어 파죽지세로 거칠 게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당장 포탄을 퍼붓고 싶었지만 대대장은 좀더 놔두라고 수신호로 지시했다. 저벅 저벅 저벅. 적과의 거리는 500m, 300m, 100m, 70m. 선두 행렬이 또렷하게 보였다. 이어 인민군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사격 개시. 하늘로 쏘아 올린 신호탄이 5줄의 파란색 불꽃을 그리자 아군은 소총 기관총 박격포를 비 오듯 쏟아부었다. 불의의 일격에 놀란 인민군의 대열은 삽시간에 무너졌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하나 둘 쓰러져 갔다. "매에게 쫓기는 꿩은 머리만 처박고 숨다가 잡아 먹히잖아요. 얼마나 다급했던지 바윗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려다 죽은 인민군도 부지기수였어요. 얼마나 통쾌했던지 사수가 쏘던 기관총을 빼앗아 손바닥에 불이 날 정도로 적을 향해 쏘고 또 쏘았죠. 그간 계속된 패배로 처참했던 심정이 말끔히 가시더라고요."
전투를 오래 끌 것도 없었다. 한 시간여 만에 총소리가 멎었다. 전멸이었다. 적은 사살 356명, 포로 26명. 반면 아군은 전사 4명, 부상 30명에 불과했다. "일부 부대원들은 훈련 기간이 짧다 보니 격발 후 노리쇠가 후퇴한 것을 보고 총이 고장났다며 헤매기도 했어요.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완전히 주도했던 전투였죠. 적의 의도를 간파하고 미리 준비했으니 이기는 게 당연했어요."
승리의 기쁨은 컸지만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두 차례 참패에 잔뜩 독이 오른 적의 후속 부대가 대규모로 밀고 들어왔던 탓이다. 그래도 1주일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 이후 17연대는 본부의 지시에 따라 경북 칠곡군 왜관읍과 다부동, 영천시, 경주시로 이동하며 부산으로 향하는 적의 진입로를 교란했다.
윤씨는 6ㆍ25전쟁이 끝날 때까지 꼬박 전쟁터를 누볐다. 중공군의 방망이 수류탄 파편에 맞아 무릎이 다쳤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다. 수많은 전사자들을 생각하면 감사할 법도 하건만 그는 조국의 분단된 현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민다고 했다. "휴전선에 2,000문의 포가 남쪽을 겨냥하고 있어요. 기습적인 선제 공격이 얼마나 무서운지 60년 전에 톡톡히 겪었잖아요. 그런데도 철없는 젊은이들은 피 흘려 싸운 참전 노병들을 비웃더라고요. 또다시 당하지 않으려면 우리 모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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