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세력이 處斷(처단)될 때까지 살아 있어야 할 사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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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정책의 핵심 집행자 중 한 사람이고 對北불법송금 사건에도 책임이 있는 林東源(임동원) 전 국정원장이 2008년에 '피스메이커'라는 회고록을 썼다. 중앙books에서 나온 이 책의 474 페이지엔 이런 대목이 있다. <(2000년) 8.15 이산가족 교환방문 후 9월 초 우리 정부는 화해의 상징으로, 북한에 돌아가기를 원하는 비전향장기수 63명 전원을 판문점을 통해 무조건 송환했다. 분단피해자들의 인권을 존중하겠다는 우리 정부의 성숙한 자세를 과시한 것이다. 당연히 냉전수구세력의 송환반대와 방해가 극심했는데, 이들은 '가치관의 혼란 우려' '북측의 체제선전에 이용당할 우려' 등을 들먹이며 '탈북자 및 국군포로 문제와 연계시켜야 한다'는 논리로 송환 반대 여론을 조성했다. 7년 전 이인모 노인을 비롯한 비전향장기수 송환을 반대할 때 들고나온 논리를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林씨의 용어선택에 문제가 있다. 63명은 비전향 장기수이기도 했지만 북한정권을 위해 복무한 간첩과 빨치산 등이었다. 양심수가 아니었다. '화해의 상징'이란 말도 맞지 않다. 간첩과 빨치산으로부터 피해를 당한 쪽은 한국과 국민이다. 가해자는 이들과 북한정권이다. 그런데 그는 간첩, 빨치산을 '分斷의 피해자'라고 했다. 화해는 可害者가 사과함으로써 시작된다. 피해자가 가해자한테 서비스하는 것은 화해가 아니라 굴종이다. '화해의 상징'이 아니라 '굴종의 상징'이란 말이 정확할 것이다. 김대중 정부가 分斷(분단)피해자들의 인권을 존중하겠다면 분단 피해자들이 누구인지 定義(정의)할 필요가 있다. 임씨는 간첩질과 빨치산 행위를 하여 조국을 뒤엎고 赤化혁명을 하려 했던 반역자들을 '분단 피해자'로 보고 있다. 이는 북한정권이나 남한 좌익들의 시각과 비슷하다. 정상적인 국민들중 간첩과 빨치산들을 '분단의 피해자'로 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건전한 국민들은 6.25 때 학살된 사람들과 납북자들, 휴전 이후의 납북어부들,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들을 북한정권의 피해자로 본다. 林씨는 이 피해자들의 인권을 생각하는 이들을 '냉전수구세력'이라고 호칭했다. 그는, 간첩 빨치산을 북송하려면 국군포로를 먼저 송환받아야 한다는 당연한 주장을 한 국민을 '냉전수구세력'이라고 불렀다. 이런 용어 사용법은 북한정권이나 남한좌익과 일치한다. 한편, 납북자와 국군포로 등 自國民(자국민)의 인권을 외면하고 主敵의 부하들 인권만 챙겨주는 행위를 임씨는 '인권을 존중하는 정부의 성숙한 자세'라고 정의했다. 김정일 편에 선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임동원씨가 '냉전수구세력'이라고 표현한 국민들은 자유와 헌법을 소중하게 여기는 애국자들이다. 임씨는 이 애국자들에 대하여 냉소적인, 아주 감정적 표현을 했다. '들먹이며' '방해가 극심' '고스란히 반복'이라는 말이다. 특히 '들먹이며'라는 단어는 비아냥거릴 때 쓰는 말이다. 북한이 不法으로 억류하고 있는 국군포로들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애국자들을 비아냥거리고 있는 사람이 체제수호 기관의 책임자였다! 좌익들이 쓰는 용어로써 애국자를 비난하는 사람이 對共정보수사기관인 국정원의 원장이었다. 상식적으로 판단하면 이런 국정원장이 이끄는 조직은 북한의 對南공작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 林씨가 국군포로 송환을 요구한 애국자를 비아냥거리려면 최소한 북한으로부터 국군포로를 한 사람이라도 데리고 나왔어야 했다. 김대중 정부와 임동원씨는 김정일한테 국군포로를 돌려달라는 말 자체를 꺼내지 못했다. 김대중 정부가 북송한 63명 중엔 일본인을 납치해갔던 辛光洙(신광수)라는 거물 공작원도 있었다. 일본 정부는 2002년에 그 2년 전에 북송된 辛光洙를 인터폴을 통하여 국제수배했다. 신광수는 일본인을 납치한 범인으로 밝혀진 유일한 경우이다. 신광수는 안기부 조사에서 김정일로부터 직접 납치 지령을 받았다고 자백했었다. 따라서 김대중 정부가 신광수를 일본으로 넘기지 않고 김정일 품안으로 보내준 것은 결과적으로 김정일의 범행 物證(물증)을 인멸한 셈이다. 김대중, 임동원씨가 양심이 있다면 납치범 신광수를 보내주면서 납치된 일본인을 돌려달라고 하든지 生死라도 확인해달라고 요구했어야 했다. 이는 인간의 기본적 윤리가 아닌가? 임동원씨의 論法에 따르면 납치된 사람은 외면하고 그 납치범을 돌려보낸 행위가 '인권을 존중하는 성숙한 자세의 과시'가 된다. 그는 김정일을 기쁘게 하고 애국자의 가슴에 피 눈물이 흐르게 한 행위를 '人權 존중' '성숙한 자세'라고 美化하는 사람이다. 임동원씨가 국정원장 시절이던 2000년 6월 모 국정원 직원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 김정일의 해외비자금 계좌로 거액의 不法자금을 보냈다. 간첩 잡는 기관을 간첩을 위한 봉사기관으로 전락시킨 임동원씨는 이명박 정부 출범 후에도 세종연구소를 운영하는 세종재단 이사장으로 있었다. 임동원씨는 국정원 불법도청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기소되었고,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던 사람이다. 그는 2007년 말, 대법원에 상고했다가 갑자기 상고를 취하한 지 나흘 만에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 의하여 사면복권되었다. 反헌법적 對北정책의 과거 책임자들에 대하여 국가적 차원의 조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확신을 준 것이 林씨의 회고록이다. 이 회고록은 촛불난동이 기승을 부리던 2008년 6월에 출판되었다. 자숙해야 할 林씨가 李明博 정권이 들어선 뒤에 낸 책에서 대한민국 헌법 수호세력을 '냉전수구세력'이라고 지칭할 정도이면 임씨는 믿는 구석이 있든지, 한국정부를 참으로 우습게 보는 모양이다. 임씨는 김정일 세력이 북한동포의 손으로 처단될 때까지 살아 있어야 한다. ///////////////////////////////////////////////////////////////////////////// 임동원이 김정일과 함께 한 美食 '그런데 가장 맛있다는 '머리 부분'이 정작 자신과 나에게만 나온 것을 확인한 그는, 자신의 접시를 우리측 김보현 차장에게 넘겨주는 배려를 보여주기도 했다.' 趙甲濟 <생선요리가 나오자 김정일 위원장은 "이것은 '소미어'라는 희귀한 생선인데, 특히 머리 부분이 가장 맛있고 입술 부분부터 먹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가장 맛있다는 '머리 부분'이 정작 자신과 나에게만 나온 것을 확인한 그는, 자신의 접시를 우리측 김보현 차장에게 넘겨주는 배려를 보여주기도 했다.> 林東源 전 국정원장이 쓴 회고록 '피스메이커'의 한 대목이다. 인민을 굶겨죽이면서 세계에서 가장 호화판 食單(식단)을 즐기는 김정일의 '자상한 배려'에 감동하는 투이다. 지옥 속의 천국 이야기이다. 김정일과 함께 美食(미식)을 즐겼다고 자랑하는 이들은 그 순간 굶어죽어가던 북한인민들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일까. '잔인한 자를 동정하다가 동정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잔인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인가? 林씨의 '배려'라는 표현에 많은 정보가 들어 있다. 惡魔(악마)의 사치를 극한 食事 대접에 '배려'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무슨 짓을 하지 못하겠는가? 당시 그의 신분은 김정일을 민족의 敵, 국가의 敵, 인류의 敵으로 여기고 대응해야 하는 의무를 진 국정원장이었다. 김정일에 대한 분노의 正義感이 없는 사람이 소위 햇볕정책을 추진하였다. 어둠의 편이 된 햇볕은 어둠을 밝힐 수 없었다. 이런 햇볕정책은 국가의 正體性, 국민의 자존심, 그리고 國益을 파괴하였다. 2000년 6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을 따라 평양에 가서 김정일을 만나고 온 일부 남측 인사들도 북한측이 내어놓은 음식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나는 그 證言(증언)들을 모아 이 사이트에 이런 글을 올렸었다. <지난 6월13-15일 평양회담 때 북한측이 한국측에 제공한 진수성찬 가운데서 특기할 만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상어지느러미: 중국 음식점에 가서 상어지느러미 찜이나 수프를 식히면 최저 1인당 30000원 이상이 나갑니다. 그래서 상어지느러미 요리는 중국 음식 중 高級(고급)이냐의 여부를 가리는 한 잣대가 되고 있습니다. 이번에 북한측이 내어놓은 상어지느러미는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야자수 열매(코코넛)를 자르고 속을 파낸 다음 그 속에다가 상어지느러미 수프를 담았다는 것입니다. 곰발바닥 요리: 김정일이 이 요리를 좋아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인데 과연 이 요리가 나오니까 한 訪北者(방북자)는 김정일에 대한 남한측 정보가 정확했구나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고 합니다. 물김치: 배를 잘라내고 속을 파낸 다음 그 속에다가 김치를 담았다고 합니다. 돌불고기: 불에 달군 돌 위에 고기점을 올려 놓으면 자동적으로 굽히게 한 것입니다. 이상의 요리는 북한 고위층의 것이 아니고 김정일의 전용 메뉴 같았다고 합니다. 배고픈 북한에 가서 남한보다 더 좋은 음식을 먹고 온 訪北者들 중에는 "굶주리는 동포들을 생각하니 죄책감이 생기더라"라고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손님대접은 융숭할수록 좋다고 말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손님들에게도 국수를 내놓곤 하여 청와대에 들어갈 때는 미리 밥을 먹고 가야 한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런 대통령과 김정일을 비교하면 왜 한국이 잘 살고 북한이 못먹게 되었는지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북한은 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萬人이 불행해야 하는 곳이고 한국은 萬人의 행복을 위해 대통령 한 사람도 最善을 다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청와대의 국수와 김정일의 곰발바닥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김정일은 同席(동석)한 이들에게 곰발바닥 요리가 정력에 좋다면서 농담을 늘어놓았고, 남측 인사들은 유쾌하게 웃었다고 한다. 인민들을 飽食(포식)한 악마 김정일을 斷罪(단죄)할 때 첫 문장은 <인민들을 굶겨죽이면서 곰발바닥 요리를 즐긴 人民의 敵 김정일은…> 로 시작될 것이다. 굶주림에 눈이 뒤집힌 人民들이 사람고기를 먹을 때, 곰발바닥을 김정일과 같이 먹었다고 자랑하고 돌아다닌 남측 인사들은, 김정일 세력이 북한사람들 손으로 斷罪될 때 각오해야 할 것이다. ///////////////////////////////////////////////////////////////////// 北의 우라늄농축을 미국의 조작이라고 선동하였던 임동원의 책임! 그 북한이 우라늄 농축 사실을 자백하였다. 그렇다면 林씨는 북한정권의 사기행각에서 바람잡이였던가? 趙甲濟 북한당국이 어제 핵폭탄 제조를 위한 우라늄 농축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고 플루토늄을 무기용으로 재처리중이라고 유엔 안보리 의장에게 통고하였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시절의 對北정책 책임자였던 임동원(통일부장관, 국정원장 역임)씨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부시 대통령은 북을 '악의 축'이요 '선제핵공격'의 대상이라며 위협하고, 핵의혹을 조작해 제네바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미국은 국제기구까지 동원해 북측을 압박하고, 쌍무회담을 기피하며 북한이 핵문제의 국제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런 워싱턴의 네오콘들의 방해책동에 맞서 우리 민족은 힘을 합쳐 지뢰를 제거하고 '평화회랑' 건설을 위해 매진했던 일을 이제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북한은 흡수통일과 북침의 공포증에 시달리며 생존전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쓴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십중팔구 북한정권의 선전물이든지 조총련이나 親北좌익 인사일 것이라 대답할 것이다. 우선 용어가 북한식이다. '네오콘들의 방해책동' '북침의 공포증' '핵의혹 조작' 등등의 용어는 대한민국의 건전한 국민이면 절대로 쓰지 않는 낱말이다. 이 글의 필자는 국정원장, 통일부 장관을 지내고 작년까지 세종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했던 林東源씨이다. 이 글은 '피스메이커'라는 그의 회고록에 실려 있다. 북한정권의 위협으로부터 조국의 안전을 지켜내는 일의 사령탑격인 국정원장 자리에 북한식 용어를 구사하는 인물을 앉힌 것은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었다. 세종재단은 日海재단의 후신이다. 日海재단은 김정일이 지령한 아웅산 테러로 죽은 17명의 엘리트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성금을 모아 만든 재단이다. 그 재단 이사회가, 사사건건 김정일을 칭찬하고 그의 정책을 옹호하며 미국을 공격하는 林씨를 이사장으로 뽑은 것은 노무현 정권 시절이었다. 부시가 북한정권을 '악의 축'으로 부른 것은 사실이지만 '선제핵공격'의 대상으로 삼아 위협했다는 주장은 왜곡이다. 미국의 전략개념속에는 먼저 공격하지 않은 집단을 향해서 핵무기로 선제공격한다는 개념이 없다. 부시 대통령이 그런 엄청난 발언을 했더라면 김대중, 노무현, 김정일 세력이 지금까지 입을 닫고 가만히 있었을 것인가? "김정일이 핵실험을 한 것은 미국이 못 살게 굴었기 때문이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 김대중씨가 '핵선제공격 위협'을 그냥 지나쳤을 리가 없다. 林씨는 이 엄청난 주장의 근거를 대야 할 것이다. 미국이 핵무기로 선제공격할 수 있는 상황은 특별한 경우이다. 敵이 핵, 화생방 무기로 미국이나 동맹국을 공격한다는 것이 확실해진 순간 자위적 차원에서 핵무기를 사용한 선제공격을 할 수 있을 뿐이다. 林씨는 핵무장도 하지 않은 무고한 북한을 미국 대통령이 선제공격하겠다고 단언한 것처럼 왜곡했다. 미국이 핵의혹을 조작했다는 주장은 동맹국에 대한 모함이다. 파키스탄 무샤라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파키스탄의 핵기술자 칸 박사가 북한에 우라늄 농축기술과 장비를 넘겨주었다고 시인했다. 우라늄농축에 의한 핵무기 개발 계획이 발각됨으로써 제네바 협정이 파기된 것이지 미국이 核의혹을 조작하여 일방적으로 폐기했다는 주장은 엄청난 거짓 선동이다. 더구나 임동원씨가 그렇게 비호하여준 그 북한당국이 어제 "우리는 우라늄 농축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다"고 자백하였다. 임동원씨가 인간으로서, 公職者로서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오늘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회고록을 회수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임씨의 그런 주장은 본인의 뜻이 아니라 누군가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는 의심을 살 것이다. 임동원씨는 아래 조선일보 기사를 읽고 자신의 입장을 밝혀야 한다. <북한은 4일 "우라늄 농축실험이 성공적으로 진행돼 결속단계에 들어섰다"고 발표, 지난 7년간 "우라늄 농축은 없다"며 국제사회를 상대로 '사기행각'을 벌여왔음을 스스로 재확인했다. 지난 6월 13일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안 1874호 채택 직후 "우라늄 농축이 시험단계에 들었다"며 처음 '자백'한 데 이어, 이번에 다시 "진행상황을 친절하게 업데이트"(정부 당국자)한 것이다. 이는 또한 최근 잇단 대남·대미 유화책으로 대화 메시지를 보내면서도 뒤편에서는 계속 핵 능력을 진전시켜 온 북한의 이중성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林씨는 이 북한의 사기행각에서 바람잡이였던가? 그의 회고록중 <이런 워싱턴의 네오콘들의 방해책동에 맞서 우리 민족은 힘을 합쳐 지뢰를 제거하고 '평화회랑' 건설을 위해 매진했던...>이란 대목의 의미는 김대중과 김정일 정권이 反美공조했다는 뜻이다. 林씨는 이를 '우리 민족은 힘을 합쳐'라고 표현했다. 700만 同族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김정일 정권이 민족반역자인가, '우리 민족'인가? 민족반역자와 손을 잡는 것은 민족공조인가 민족반역공조인가? 북한이 북침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도 사실과 다르다. 한국과 미국이 북침할 전략과 국가의지가 있는가? 그런 전략과 의지도 없는데 누가 북침하겠다는 것인가? 군인 출신인 林씨가 잘 알 것이다. 황장엽 선생은 "김정일은 북침 걱정을 조금도 하지 않는다. 김정일이 북침을 걱정한다는 말은 남한에서 만든 말이다"고 했다. 국군이 단독으로 북침하는 것을 미국이 좌시할 리도 없다. 韓美동맹은 한국이 공격을 당할 때만 작동한다. 한국인들에게 北侵이란 말은 '6.25 북침설'을 연상시키는 禁忌語(금기어)이다. <북한은 흡수통일과 북침의 공포증에 시달리며 생존전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란 말은, 김정일의 처지를 변호하여 핵개발까지도 자위적 생존전략임을 강변하기 위하여 친북세력들이 많이 써 먹는 억지이다. 그런 이야기를 국정원장을 지낸 사람이 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런 사람이 국정원장, 이런 사람을 그 자리에 임명한 이가 대통령으로 있었는데도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은 것은 이승만, 박정희가 만든 反共자유민주주의의 기초가 워낙 튼튼하고 그래도 나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들이 더 많이 살고 있는 덕분일 것이다. 이런 임동원이 원장일 때 국정원은 간첩 두목 김정일의 해외 비자금 계좌로 수억 달러를 보내주는 송금책 역할을 하였다. 그래 놓고 국민들에겐 간첩 신고하라고 하였던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사회적으로 매장되지 않고 활동하는 국가는 彼我식별 기능과 응징력이 마비된 나라일 것이다. ,,,,,,,,,,,,,,,,,,,,,,,,,,,,,,,,,,,,,,,,,,,,,,,,,,,,,,,,,,,,,,,,, 우리 가족 멸망사 (월간조선 1999년7월호에 실렸던 북한주민의 手記에서 발췌) 이밥에 고깃국을 먹어보았던 자기의 짧은 일생들을 끝없이 끝없이 되풀이하며 아버지가 장거리에서 사주었던 송편에 대하여 金日成의 생일날에 맛보았던 「선물」 사탕과자에 대하여…. 언젠가 어머니가 끓여주었던 두부장과 콩나물에 대하여…. 굶주리고 헐벗었던 모든 것은 다 버리고 잘 먹고 행복했던 짧은 인생을 간추려 맥이 빠져 잠드는 순간까지 재잘거리는 것이었다. 이런 숨막히는 생활의 세파 속에서 누이 동생이 굶어죽었고 영양실조로 허덕이던 어머니마저 나의 곁을 떠나갔다. 福(복)은 쌍으로 안오고 禍(화)는 홀로 오지 않는다고 하더니만 누이동생의 죽음이 어머니를 거쳐 우리 집안으로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오랜 기간을 대용식품으로 이어온 이 나라의 사정은 우리 집에서 애지중지하던 나의 아들을 걷어갔다. 초인간적 힘으로 버텨오던 아내가 아들을 붙들고 통곡하다 그 자리서 숨져버렸다. 아내와 아이를 붙들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으나 굶기는 피차일반이던 마을에서 어느 누구 하나 선뜻 묻어주려고 나서지 않았다. 묻어주는 일도 먹을 것을 주겠다고 해야 나서는 세월이 그때였다. 나는 어머니와 작별할 때도 마음고생을 많이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머리를 고여 드릴 베개 하나도 없었다. 어머니는 베갯속을 꺼내 절구질을 힘겹게 하여 도토리가루 2백g, 옥수수가루 한 줌을 넣어 죽을 쑤어 잡숫다 보니 베개 하나도 남기질 못했었다. 정말 우리 집안에 지옥문이 열려도 단단히 열렸던 1994년이었다. 형님네 집에서는 군대에 갔던 조카가 영양실조에 걸려 집으로 돌아와 죽는다 산다 야단이었고, 「이 세상은 개 같은 세상」이라고 했다는 형은 군 보위부에서 덮쳐간 후 소식이 없었다. 기울어져 가는 저녁해처럼 이제 이 家門(가문)에 살아남은 자가 누구냐? 아니-이번에는 지옥에서 누굴 데려갈 거냐? 정말 시간문제였다. 영양실조로 뼈만 남은 두 딸애와 내가 우리 가문의 유일한 재산이었으니 그때 나의 심정은 무엇으로 표현한단 말인가? 나는 찬장 서랍에 있는 쥐약봉지를 생각했다. 평양시 용성구역에서 쥐약을 풀어 집안 식구를 먹이고 자기는 목을 매 죽은 ○○이가 떠올랐다. 그럼 나도?? 아이들과 함께 먹어버리고 다 함께 죽는 것이 편하지 않을까? 파리한 얼굴에 눈확이 꺼져 들어간 흐릿한 눈길로 행여나 희망을 품고 바라보는 딸들을 보니 차마 내 손으로 죽이자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범도 제 새끼는 안잡아 먹는다는 말이 그날처럼 나에게 공감을 주어보기는 일생 처음이다. 우리 셋 중에서 죽으려면 내가 죽게 하고 저애들은 살아남게 해 주십사 하고 생각하였다. 그후 우리의 목숨은 끈질기게도 붙어 있었다. 죽을 날을 기다려도 그날까지 살아 있었으니 그날이 바로 잊혀지지 않는 1995년 11월15일이었다. 막내딸 ○○이가 비칠거리며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나는 변소에 가겠지 하고 혼미상태에 빠져 있었다. 얼마 후 어디선가 나를 찾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막내딸이 방긋이 웃는다. 『아버지, 아- 하세요』 하길래 멋도 모르고 입을 벌리는데 딸애의 고사리같은 작은 손이 펴지는 순간 쌀알 20 여알이 손 안에 있었다. 나는 그 쌀알을 보고 어디서 났느냐고 물으니 저 건너집 돼지우리 옆에 볏짚이 있는 것을 본 기억이 나서 펼쳐보니 벼알이 몇 알 있더라는 것이었다. 딸애는 그 벼알 한 알 한 알을 손톱으로 까서 모아 가지고 나를 깨운 것이었다. 아버지가 이걸 잡숫고 일어나야 우리가 산단다. 나는 딸애의 그 말에 심한 가책을 느끼며 그 귀여운 딸애를 붙들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린 나이의 딸애가 정말 이 미련한 아버지보다 나았다. 나는 그 쌀알을 막내가 큰딸과 함께 나누어 먹게 하였다. 그러나 아이들은 죽기살기로 거부하고 나섰다. 내가 먹는 척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 쌀알을 아이들에게 먹일 수가 없었으니…. 그날 이 지구촌 위에서 돈을 주고도 볼 수 없는 쌀알 나누어 먹는 신기한 장면이 우리 집에서 연출되었다. 딸애의 屍身에서 나온 비닐봉지 그날 밤. 나는 아이들을 살려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이 생겼다. 종전에 죽기만을 기다리던 방식에서 죽는 날까지 아이들을 위하여 무슨 짓인들 다 해보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곰곰 누워서 생각하니 아파트 어느 1층집에 쥐이빨 강냉이종자를 매달아 놓은 것을 보았던 기억이 났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아파트 골목을 누비다가 끝내 그 집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창문을 만져보니 다행히도 유리가 아닌 비닐방막이였다. 허기에 지쳤던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지만 먹이를 구했다는 안도감으로 마음은 설다. 나는 준비해 가지고 갔던 칼로 비닐을 째고 옥수수종자를 움켜 쥐었다. 먹이를 눈앞에 둔 야수의 흥분으로 내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때의 그 쾌감을 나는 적절히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 유감이다. 艱難辛苦(간난신고) 끝에 옥수수종자를 떼내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발걸음은 비칠거리기는 했어도 가벼웠다. 이것이 내 일생에 처음으로 내짚은 도적생활이었다. 성공하고보니 나도 꽤 노력하면 훔쳐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그때부터 나는 어디에? 무엇을? 하며 손에 닿는 대로 가능성이 있는 대로 훔쳐내어 자식들을 먹여살리는 도적무리의 한 일원이 되어 버렸다. 이날 밤 우리 집에서는 근간에 보기 드문 성대한 연회가 벌어졌다. 「눈물은 내려오고 밥술은 올라간다」는 격언이 틀리지 않았다. 연달은 초상으로 푹 꺼져 들어갔던 생기가 옥수수종자 다섯 이삭이 생기면서 집안에 和氣(화기)가 돌았다. 죽은 건 죽은 것이고 산 놈은 살아야 한다는 삶의 요구가 우리들을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게 만들었다. 나는 옥수수종자 한 이삭을 아이들에게 날 것으로 먹도록 배려해 주었다. 음식이 익는 동안 아이들의 고통을 생각해서 그렇게 하였는데 두 딸애는 그 돌덩이 같은 옥수수알을 맛있게 씹어먹었다. 아이들은 아버지와 함께 살아남은 긍지로 오랜만에 웃고 떠들었다. 이때부터 우리 세 식구는 빌어도 먹어 보고 훔쳐도 먹어보고 땅에서 주워도 먹어보면서 신성천~고원, 원산~단천 등지로 방랑하면서 인간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며 인민이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가를 직접 목격하면서 파리 목숨 같은 인생을 유지하였다. 이 길 위에 고원에서 맏딸이 숨을 거두었고 그후 순천역의 쓰레기장에서 막내딸애의 시체가 발견되어 나를 질식케 하였다. 막내딸은 마지막까지 나의 곁에 남아 아버지께 충직했던 나의 혁명동지였으며 이 세상에서 나를 고아로 만들어 버린 유일한 마지막 혈육이었다. 그의 屍身(시신)을 집에 가져다 헤쳐보니 그의 가슴속에는 깨끗한 비닐봉지에 정성 들여 골라놓은 배 껍질과 배 송치(편집자 注:씨가 들은 속), 명태껍질, 돼지뼈 한 개가 들어 있었다. 아마도 나를 만나면 함께 먹으려고 그렇게 먹고 싶은 것도 참고 건사했을 딸애를 생각하여 나는 울고 또 울었다. 나는 양지바른 산기슭에 딸애를 안장하고 그 비닐봉지를 입가에 얹어 주었다. 그때 나의 막내딸의 나이가 1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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