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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진단 6개월이면 중산층이 기초수급자로… "간병만이라도 국가가…"김경

화이트보스 2010. 10. 29. 11:42

암 진단 6개월이면 중산층이 기초수급자로… "간병만이라도 국가가…"

입력 : 2010.10.29 03:00

[8] 암 환자와 가족들이 나락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가장이 쓰러지는 순간 아내는 병실에 묶이고
아이들은 소외돼… 치료비·생활비는 모두 고스란히 빚으로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C빌라 201호(79㎡·24평). 쌍둥이 여중생 예지·예슬이(가명·13)네 집은 방 배치가 동네 다른 집과 사뭇 달랐다.

아빠 이준석(가명·41)씨는 독방을 쓴다. 거실을 지나 맨 안쪽 작은방(10㎡·3평)이 아빠 혼자 숙식(宿食)하는 아빠 방이다. 엄마 강진희(가명·39)씨와 예지·예슬이 자매는 밤마다 거실 책장 밑에 요를 깔고 '내 천(川)'자로 나란히 잔다. 안방은 살림살이 창고로 쓴다.

엄마 강씨는 끼니때마다 새로 지은 밥으로 독상을 차려 작은방에 가져간다. 아빠가 상을 물리면 엄마와 두 딸이 아빠가 남긴 찬으로 밥을 먹는다.

아내가 직접 꾸민 ‘가정식 무균실’에 이준석씨가 누워 있다. 이씨가 지난 4년간 백혈병과 싸우는 동안 쌍둥이 딸들은 우울증을 앓았고, 가정 경제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가부장적인 아빠라서 독상을 받는 게 아니다. 2006년 8월 아빠가 백혈병 진단을 받은 뒤 이렇게 바뀌었다. 아빠방은 강씨가 손수 꾸민 '가정식 무균실'이다. 강씨는 "남편에겐 감기 바이러스도 치명적일 수 있다"고 했다.

남편을 지키기 위해 강씨가 직접 공기청정기를 놓고 먼지가 붙지 않는 특수벽지를 발랐다. 끼니마다 한 움큼씩 먹는 약을 보관하려고 소형 냉장고도 들여놨다. 연말이면 이렇게 산 지 3년이 된다. 예지네 가족에게 아빠의 돌연한 암 선고는 빈곤층으로 떨어지는 '3단 미끄럼틀'이었다.

1단계: 치료비 60%가 건보 적용 안 돼

병들기 전까지 이씨는 대기업 임원 승용차를 모는 운전기사였다. 강씨는 남편 월급 180만원을 아끼고 야무지게 살림해서 지금 사는 집을 마련했다. 부지런히 일해 주택 융자 7000만원을 갚고, 똘똘한 쌍둥이를 미국에 유학 보내는 게 부부의 목표였다.

거실에 걸린 가족사진이 이 가족의 행복한 시절을 보여준다. 쌍둥이가 아빠에게 찰싹 달라붙어 생글거리는 사진이다. 이 사진을 찍고 한 달 만에 재앙이 왔다. 이씨가 회사 주차장에서 넘어져 발등이 살짝 까졌는데 이튿날 발이 식빵만 하게 부어오른 것이다. 종합병원 의사가 "혈액암의 일종인 '림프구성 백혈병'인데, 치료하지 않으면 6개월 내에 사망할 수 있다"고 했다.

그날로 입원해 7개월간 5000만원을 썼다. 입원이 길어질수록 건강보험 혜택이 적용되지 않는 '비(非)급여항목'이 눈덩이 굴러가듯 불어났다. 백혈구 수혈비용(회당 50만원), 간병인 일당(1일 6만원), 골수이식 공여자를 찾고 검사하는 비용(총 1000만원)….

강씨는 "정부도 암 환자 부담을 줄여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데 좀처럼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고 했다. 병원비는 급여항목(건강보험과 개인이 공동 부담)과 비급여항목(개인이 전적으로 부담)으로 구성된다. 정부는 2005년 암 환자의 급여항목 개인 부담 상한선을 10%로 정하고, 작년 12월 5%로 다시 낮췄다. 그러나 비급여항목은 여전히 전적으로 개인 호주머니에서 나간다.

암시민연대 최성철 사무국장은 "암 치료비는 급여항목과 비급여항목 비율이 4대 6 정도 되는데 고치기 어려울수록, 치료기간이 길어질수록 비급여 비중이 커진다"고 했다. 암 환자 가족들의 '체감(體感) 고통'이 좀처럼 줄지 않는 이유다.

2단계: 간병 때문에 일 못해

암 환자 10명 중 8명(83.5%)이 암 진단 후 실직한다(2010년 보건복지부 조사). 이씨도 암 판정을 받은 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퇴직했다. 그 결과 지난 4년간 이 집 통장에는 '출금'만 있고 '입금'은 없었다.

강씨는 "남편이 완치되는 데 걸리는 기간은 7년이지만 남편이 다 나아도 예전처럼 돈 벌어오라고 할 수는 없다"고 했다. 강씨가 병수발과 생계 해결을 동시에 책임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강씨는 궁리 끝에 동네 시장에 좌판을 펼 요량으로 도매시장에서 어린이옷을 한 보따리 떼어왔다. 그러나 몇달째 안방에 쌓아둔 채 손을 못 댔다. 간병비 부담에 이식수술 무렵 한 달만 빼고 병수발과 살림을 도맡았기 때문에 장사할 짬이 나지 않았다. 장신구 조립 아르바이트도 같은 이유로 포기했다. 결국 중산층이던 예지네 가족은 2007년 1월 기초생활수급자로 내려앉았다.

수급자가 된 뒤에도 빚이 계속 불어 1억5000만원이 됐다. 견디다 못한 강씨는 작년 이맘때 집(시가 1억8000만원)을 팔아서 빚을 가리고 경기도에 월세 방을 얻을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년째 집 보러 오는 사람이 없다. 강씨는 "간병 서비스만 해결됐어도 이 지경까지 오진 않았을 것 같다"고 했다.

3단계: 자녀의 우울증과 성적하락

민간 연구기관인 시민건강증진연구소가 최근 5년간 백혈병으로 남편을 잃은 여성 5명을 심층면접한 결과, ① 남편 치료비로 재산 대부분(6000만~1억원)을 쓰고 ② 간병하느라 취업 준비를 못하다 ③ 남편이 별세한 뒤 이렇다 할 기술이 없어 월 100만원 이하 저임금 노동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나이에 맞지 않게 철이 들거나 침울해졌고, 엄마들은 지출을 줄이기 위해 교육비를 줄였다.

강씨는 수시로 락스 묻힌 걸레를 들고 작은방을 구석구석 닦았다. 양손이 허옇게 까져 있었다. 강씨는 "내 몸이 고단한 것보다 딸들이 우울해하는 게 더 고통스럽다"고 했다. 아빠 목에 매달려 깔깔대던 말괄량이들이 지금은 집에 와도 우두커니 앉아 있다. 최근 예지는 엄마에게 편지를 썼다. "나 죽고 싶어. 엄마 눈 속엔 내가 없어."

초등학교 때 전교 1등을 다투던 예지 자매는 현재(중2) 둘 다 중위권으로 내려앉았다. 작은방에 누운 아빠 이씨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는 부인에게 "몸이 조금만 더 좋아지면 운동 삼아 전단이라도 돌리고 싶다"고 했다. 강씨가 펄쩍 뛰었다. "몸이 힘들면 100% 재발한대요. 당장 힘들어도, 살아 있어야 또 다른 희망을 찾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