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을 피해 어른은‘자유를 달라’고 썼다… 그 말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황씨 망명이 결행된 뒤 난 북경대 기숙사로 숨어, 새벽 3시까지 서로 통화
북한 종교인은 노동당원들, 국정원이 김덕홍과 결별시켜, 금강산개발 첫제안은 김철호
"내가 어른에게 말했다. '만약에 자리를 뜨면 남한으로 오셔야지요.' 그 뒤에 이 말로 인해 얼마나 자책했는지 모른다. 그분이 남한에 내려와 고통받는 것을 볼 때마다 나 자신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내가 저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검은 옷을 입은 김숙향(68)씨가 울먹거렸다. 그녀는 '황장엽의 수양딸'로만 알려져있고, 그밖에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게 없다. 그녀가 어떤 일로 먹고사는지조차 모른다. 대북 공작원이란 소문, 황장엽 망명 때 깊숙이 개입됐다는 풍설도 돌았다. 그런 그녀가 입을 열고 있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 국정원 안에서 어른을 만날 때 직원을 입회시켰다. 내가 '부녀간에 만나는데 이럴 수 있느냐'며 거세게 항의했다. 그 뒤로 둘만이 이야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청 때문에 필담(筆談)으로 대화했다. 한번은 어른이 '자유를 달라'고 썼다. 그 말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얼마나 슬펐는지 모른다."
―당신의 정체는 무언가? 대북사업가란 말도 있고 공작원이라는 말도 있다.
"나는 장사하는 사람이 아니고, 정보기관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난 기독교인이다. 북한 선교의 사명을 갖고 활동했다. 당초 기독교방송국을 평양에 세우려는 게 우리 목표였다."
―김철호 전 명성그룹 회장의 여동생이고 대북 비즈니스를 했다는 것은 낭설인가?
"여동생은 아니고, 김 전 회장과 교분이 있었던 것은 맞다. 감옥에서 나온 뒤 기독교인이 된 김 전 회장과 북한 얘기를 나누게 됐다. 그가 '금강산을 개발하면 북한은 먹고살 것'이라고 했다. 선교 목적으로 북한에 도움을 주려고 한 것이다. 김 전 회장이 영국의 설계회사를 통해 '금강산 개발 도면'을 만들었다. 내가 이를 전했다. 어른이 김정일에게 보고했다. 1995년 때였으니 현대아산이 금강산 사업에 뛰어들었던 것보다 훨씬 전이었다. 북에서 우리 둘을 초청했다. 하지만 김 전 회장이 집행유예 기간이라 방북할 수 없었다."
―당시 대북 접촉 창구는 황장엽과 함께 망명한 김덕홍씨였던 것으로 안다. 조선노동당에서 운영하는 여광무역 사장이었던 김씨를 어떻게 해서 만나게 됐나?
"김덕홍은 외화벌이를 위해 북경에 나와 있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목사님이 그를 소개해줬다. 나는 북한 선교 목적으로, 그는 외화벌이 목적으로 만났다. 처음 만났을 때 그 행색이 초라했다. 식사 대접 후 마음이 짠해 500달러를 몰래 건네줬다. 한 달 뒤쯤 '중국에 올 일 없겠는가. 내가 모셨던 어른이 오셨다'며 전화를 걸어왔다. 북한 선교를 도와주려느니 여겼다. 심양에 가서 처음 어른을 만나게 된 것이다."
김덕홍은 북한의 사회안전부(경찰) 출신으로, 황장엽이 김일성대학 총장 때 그 대학 교무지도원이었다. 또 황씨가 조선중앙노동당 사회교육담당 비서, 국제담당 비서가 됐을 때 그는 당 자료실에서 근무했다.
―처음 황장엽을 어디서 만나 어떤 얘기가 오갔나?
"심양의 북한대사관 옆 호텔에서 만났다. 어른은 남한 여성의 활동영역, 경제수준, 민주주의 체제 등에 관해 많은 질문을 했다. 나는 점퍼·양복천·초콜릿·치즈 등을 선물했다. 이런 것들에서 남북 격차를 많이 느꼈던 것 같다. 내가 북의 경제형편을 묻자, '임산부와 어린애들이 어렵다'고 답했다. 북한 인민들을 기아 상태에서 구하기 위해 애쓰는 인상을 그에게서 받았다."
―황장엽은 그때 남한 사람을 처음으로 만난 것인가?
"공적인 자리에서는 이홍구 전 총리와 강원룡 목사를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사적으로는 내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다음날 또 연락이 왔다. 그 자리에서 이런 대화가 오갔다. '북한에 종교의 자유가 있나?' '공식적으로는 없다.' '그러면 서방인들이 북에 들어가 만났던 종교인들은 뭔가?' '전부 당원인데 탈바꿈시켜 만나게 했다.' 나중에 어른은 나에 대해 '남한에도 이렇게 정직한 여성동무가 있군'이라고 했다."
―그런 대화만으로 '망명'의 속마음까지 털어놓을 관계로 발전되기는 어렵다. 서로 간에 감추어진 무엇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이런 얘기까지 해야 하나…. 김덕홍은 '외화벌이'를 하는 사람이었다. 남한의 모기업 회장과 북에 있는 전처 소생의 딸이 만날 수 있게 해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북경까지 딸을 데리고 나와 만나게 해주면 대가로 30만달러를 받는 조건이었다. 어른이 김정일에게 보고한 뒤 그 여자를 데리고 나왔다. 그런데 우리 정보기관에서 거액의 외화를 못 들고 가게 막았다.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어른이 어렵게 됐다. 그러자 나를 불렀다. 결국 내가 중국의 지인들에게 부탁해 그 돈을 마련해줬다. 이 일이 있고서 신뢰가 깊어졌다."
―황장엽과의 접촉은 얼마나 빈번했나?
"그 뒤로 망명할 때까지 한 달에 두세 번 만났다. 어른이 바깥으로 나올 수 있는 명분을 계속 만들어 주었다. 외화벌이와 인도적 지원이 그것이다. 나와 계속 접촉하기 위해 어른은 종교총책임자 자리까지 맡았다."
- ▲ 김숙향씨는 "어른은 '심리적 안정이 안 되니 부녀의 연을 맺자'고 편지를 보내왔다"고 했다.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어른은 '나는 밥을 먹고 국제적으로 돌아다닌다. 하지만 인민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다. 내 주체사상이 수령독재에 이용되고 있다'며 학자적 양심으로서 괴로워했다.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북한 안에서 개혁할 수는 없나?' '안에서의 개혁은 어렵다.' '왜 그런가?' '함께 개혁을 모의할 당 간부들을 만날 수 없다. 서로 한자리에서 대면할 수 없게끔 되어 있는 체제다. 김정일은 각자에게 팩스로 지시하고 보고받는다.' 이대로 안에서 죽을 수 없다는 강박감이 어른에게 있었다. 그즈음 북한을 방문한 미국 카터재단의 한 관계자가 '미국에 와서 연구를 하면 어떨까'라며 그에게 제의했다고 한다. 미국으로의 망명을 유도한 것으로 나는 해석했다. 그래서 '자리를 뜨면 남한으로 오셔야지요'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황장엽 망명과 관련해 먼저 우리측의 공작으로 이뤄졌다는 설도 떠돌았다.
"나는 당시 안기부에 김덕홍만 보고했지, 어른에 대해서는 일절 보고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모든 행적이 정보기관에 의해 도청 감시되고 있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망명을 앞두고 정보기관이 움직였던 것은 맞다."
―망명 당일 당신은 어디에 있었나?
"당초 김덕홍과는 '움직이게 되면 4월쯤 생각하자'고 얘기했다. 그는 북에 있는 자기 가족을 데리고 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2월 어느 날 일본서 김덕홍이 '들어오라'고 연락했다. 나는 직감으로 느꼈다. 그런데 어른이 묵던 호텔에 일본 경찰들이 몇겹 에워싸는 등 정보가 샌 것 같았다. 두세 시간 뒤 김덕홍이 다시 전화를 걸어 '변경됐다. 중국 북경의 모 호텔로 오라'고 했다."
―황장엽은 왜 당신을 북경까지 부른 것인가?
"자신을 따라다니는 보위부 직원을 내가 빼돌려주길 원했다. 그 직원을 내가 오래 접촉해왔기 때문이다. 밀가루를 옮기는 데로 가서 도와주라며 그를 떼냈다. 망명이 결행된 뒤 그에게 '지금 사정이 이렇고 당신이 처벌받을 테니 함께 망명해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그는 가족을 버려두고 갈 수 없다고 했다."
―망명 순간 황장엽과 같이 움직이지 않았나?
"망명은 1997년 2월 28일 오전 10시쯤 이뤄졌다. 김덕홍으로부터 '한국 영사관으로 들어왔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 순간 나는 호텔에서 빠져나와 북경대 기숙사로 숨었다. 그런데 '어른이 안정이 안 되니 당신이 영사관으로 와달라'는 김덕홍의 전화가 왔다. 망명 후 4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택시를 타고 가니까 이미 중국 공안이 외곽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기숙사로 되돌아와 새벽 3시까지 통화한 뒤 귀국비행기를 탔다."
―당시 언론에는 황장엽과 동행한 '수양딸' 박명애씨가 등장했는데, 그 뒤 종적이 사라졌다. '망명공작의 미끼', '황장엽의 여인' 등의 추측까지 나왔다.
"박명애씨는 조선족으로 어른이 중국에 나오면 통역을 맡았다. 어른을 쭉 모시면서 '아버지'로 불렀다. 어른이 망명한 뒤 한국에서 두 번 만났다고 들었다. 이번 장례식 때 엽서를 보내왔다."
황장엽은 두 달간 필리핀에 체류하다가 1997년 4월 한국으로 들어왔다. 김영삼 정부 말기였다. 곧 정권교체된 김대중 정부하에서 '햇볕정책'이 추진되고 남북정상회담까지 성사됐다. 우리 사회에서는 '김정일 신드롬'이 일었고, 대신 황장엽은 '불편한' 존재가 됐다.
"어른의 외부 활동은 차단됐다. '이렇게 통제받을 줄 알았으면 올 필요가 없었다'고 후회하고 있었다. 나는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와 박근혜 의원 등을 찾아가 '어른을 보호해달라'고 사정했다. 어른이 북한 실상에 대해 써놓은 편지를 내가 전해주곤 했다."
- ▲ 서울에서 망명한 황장엽과 함께
"어른은 학자였고 김덕홍은 행동파였다. 김덕홍은 '여기서는 자유가 없다. 미국으로 망명가자'고 했을 정도다. 당시 국정원에서는 둘이 붙어 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어른에게 '당신이 원하는 철학연구소를 내줄 테니 김덕홍과 떨어져라'고 했다. 그 배경을 알고서 김덕홍이 원망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어떠했나?
"어른의 존재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2003년 처음으로 미국 워싱턴을 방문했다. 하지만 숱한 제약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당시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이 사전 약속을 하고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못 만나게 했다. 뉴욕에 들르고 싶어하는 것도 대사관측에서 막았다."
―당신은 1998년 말 황장엽의 수양딸로 입적됐는데.
"어른이 '내가 심리적 안정이 안 되니 부녀의 연을 맺자'고 편지로 제의했다. 처음에는 망설였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잘하겠다'고 했지만, '묶어주는 것이 내게 안정을 준다'고 다시 편지를 보내왔다."
김숙향씨의 남편은 올 초에 사망했고, 장성한 2남 1녀가 있다.
―당신은 얼마 전 '황장엽에게는 사실혼 관계의 여인과 그 사이에 아들이 있다는 소문에 대해 사실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확신하는 근거는?
"이 소문은 원래 김대중 정권 때 한 타블로이드 신문에서 썼다. 국정원 내 안가에서는 모든 게 통제가 된다. 24시간 관리를 받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출처는 국정원 내부 같았다. 국정원 담당자에게 '이게 무슨 짓인가. 이렇게 나오면 참지 않겠다'고 난리쳤다. 어른의 명예를 실추시키려고 악의적으로 유포한 것이다. 만약 아들이 정말 있다면 우리에게는 돌볼 책임이 있다. 어른을 부검할 때 구강 내 점막을 떼어놓았다. 언제라도 유전자 감식을 할 수 있다."
지난 주말 그녀는 국정원으로부터 황장엽의 유품(遺品)을 인계받았다. 유품 속에는 늘 '정신'까지 들어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