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산행 정보 모음

지리산 하늘아래] 반달의 그리움, 온달이 되기 위한

화이트보스 2011. 2. 17. 10:08

지리산 하늘아래] 반달의 그리움, 온달이 되기 위한

지난해 가을부터 남원 땅에 대한 그림으로 해를 넘겨왔다. 길손에게 묵은해와 새해의 경계 나눔과 만남이 남원에서 이루어졌고, 이 남원 땅에서 보낸 시간이 삶의 테이프 속에 촘촘히 무늬져 있다.

그중 광한루원(廣寒樓園)은 수차에 걸쳐 밤낮으로 들락거렸다. 마치 자신이 이도령이 되어 성춘향을 찾아 헤매듯 사랑에 빠졌으니. 지난 연말 닥종이 전시를 연 영담스님 말씀이 “그림이란 내게 그리워하는 님을 마음에 기리는 작업이다”에 동감하듯 화첩순례는 시간을 잊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세월은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다’는 생각에 스스로 만끽하고 전율했다. 즉 어떤 사물과 현상을 다시 본다는 것은 새롭게 보는 시간 속에서만 존재하거늘, 자아(自我)의 인식과 변화, 일탈에 의해 새로 보이는 것, 이 안목이 창신의 동력임을 믿는다. 따라서 광한루가 다시 보였다. 아니 새롭게 보였다. 과거의 유산이 아닌 현실에, 삶에, 역사의 강물 속에 드러났다.

광한루(보물281호)는 조선 세종 때 황희 정승이 처음 세워 인조 4년(1626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누각으로는 경복궁의 경회루가 대표적인데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 평양 부벽루가 떠오른다. 새로 보는 광한루엔 쌍쌍이 짝을 이룬 남녀들이 한겨울에도 모여들어 사진을 찍고 누각에 오른다.

지리산에서 불어드는 바람 속에 온돌 시설이 딸린 누각은 석재기둥과 목재의 조화로 빛난다. 특히 화강암 돌기둥은 장인의 손끝이 빚어낸 영혼의 숨결이다. 그 위에 목재 기둥과의 행복한 만남을 발견한다.

이 장중하고 튼실한 스케일에 버금가는 밀도는 마루를 밟았을 때 드러난다. 목리(木理)의 오랜 때깔과 짜임, 즉 나무를 짜 맞춘 그랭이기법(오목한 공간과 볼록한 공간이 맞물리는 기법)이 누각의 기운을 받쳐 주고 있다.

이곳이 어찌 이도령과 성춘향의 러브스토리로만 회자될까. 극중에서는 도리어 만찬을 연 변사또의 행태를 꾸짖는 이도령의 어사시(御史詩)에서 현실감이 살아난다. 부정부패의 풍자를 넘어선 오늘의 교훈이다.


▲ 남원시 전도(202×102cm), 한지에 수묵채색 / 광한루원 (259×165cm), 한지에 수묵채색

金樽美酒千人血(금동이의 좋은 술은 천 사람의 피요)
玉盤佳肴萬姓高(옥쟁반의 맛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다)
燭淚落時民淚落(촛불 눈물이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歌聲高處怨聲高(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소리 높도다)


그래도 역시 광한루는 사랑이다. 오작교에서 사랑을 맹서하고 춘향 어멈 월매집에 들어 청혼의 과정을 거친다. 이도령, 춘향상이 앉은 연못에 동전을 던지며 행운과 행복을 꿈꾸는 연인들이여.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어허-둥 -둥 니가 내 사랑이-지야 이리 보아도 내 사랑 저리 보아도 내 사랑 우리 둘이 사랑타가 생사가 한이 되어 한번 아차 죽어지면 너의 혼은 꽃이 되고 나의 넋은 나비 되어 이삼월 춘풍시절 니 꽃송이를 내가 안어 두 날개 쩍 벌리고 너울너울 춤추거든 니-가 나인 줄을 알려무나                                 
 (‘춘향가’ - 사랑가 중에서)


▲ 남원 광한루 완월정에서 (58.5x91.5cm), 한지에 수묵채색
한겨울에도 사랑의 기운은 얼지 않아

서문 쪽의 춘향관(春香館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 글씨)에는 전북 순창 출신 박남재(朴南在) 화백의 유화로 춘향 일대기가 그려져 있다. 한편 북문 쪽의 춘향사(春香木司)에는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화백이 그린 춘향영정이 걸려 있다. 사정은 이당이 친일화가라고 해서 문제가 크다. 세월은 잊히지 않고 역시 오는가보다.

사실 실버들과 왕버들이 늘어진 봄날의 서정이 그리운 광한루원이지만 누원의 형태와 전각을 살펴 전경을 그리기엔 겨울 풍광이 더 좋다. 조경 속의 수종과 길목, 그리고 건물배치가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이른바 광한루 앞의 은하수(요천수)에 떠 있는 삼신섬은 영주섬(한라산), 봉래섬(금강산), 방장섬(지리산)으로 드러난다. 이처럼 대숲에 둘린 인공섬의 운치란 별도의 상찬이 필요하다. 싸락눈이 날리는 누원을 거닐며 만나는 500년 수령의 두 왕버들과 팽나무. 그것은 세월의 무게와 뼈를 온전히 보여주며 누원의 역사를 기리고 있다.

그렇게 진종일 곱은 손을 불며 화첩을 품고 떠돌자니 어느새 노을이 저물고 지리산에서 달님이 오른다. 오늘은 반달. 해서 기왕이면 ‘달구경 하는 곳’ 이라는 완월정(玩月亭)에 머무른다. 사연인즉, 선인들이 천상의 세계를 꿈꾸며 달나라를 즐기려고 지은 수중누각이다. 그 물 속에 뜨는 반달이라니! 어느 님을 그려 반쪽 달이 더해져 온달이길 바라는 기다림이 새록하고 또 그윽해 오는 밤이다.

이튿날 아침, 숙소에서 채 녹지 않은 눈길을 걸어 다시 와 보는 광한루원. 정문인 청허부(淸虛府: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글씨) 현판을 올려다보며 새날을 연다. 눈길이 가는 곳은 자료전시관인 선취각(璇聚閣) 주변의 민속마당 놀이터다. 씨름판과 널판, 고리걸기, 투호놀이, 팽이치기 터다. 그리고 옥중 춘향 체험 형틀이 장승 앞에 놓였다. 그런데 한 쌍의 장승에 새겨진 글씨가 길손을 위무하는 듯 반갑다.

‘불원천리 찾아 오신님 아메도 내 사랑이로다’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어화둥둥 내 낭군’

이처럼 한겨울에도 사랑의 기운은 얼지 않는다. 젊은 쌍들이 하늘 높이 그네를 굴리며 창공의 낮달까지 차오른다. 저들이 오늘의 춘향, 이도령이며 사랑의 무지개인 것이다.
이제는 광한루원을 나와 요천(蓼川)을 넘는다. 남원 시내를 가로 지르는 요천은 여뀌꽃이 많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바로 남원의 축제와 행사장인 대단위의 춘향테마파크는 만남의 장, 맹약의 장, 시련의 장, 이별의 장과 축제 마당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곳을 에돌아 전망대에 오르자 남원 시내가 한눈에 드러난다. 요천을 가로지르는 승사교, 승월교, 춘향교, 동림교, 남원대교와 하늘 아래 교룡산이 남원시를 품고 있다. 춘향교 너머의 광한루원도 가물거린다. 텅빈 전망대 2층 찻집 베란다에서 화첩을 펼치는데 매서운 칼바람이 귓불을 얼게 하나 이 장관을 놓칠세라 수없이 화첩을 열고 닫았다.
노적봉, 혼불 마을의 산

잠시 몸을 녹인 후 어느덧 흩날리던 진눈깨비가 겨울비로 변한 시간, 다시 요천을 넘어와 만복사지(萬福寺址: 사적 제1349호)로 향했다. 고려 문종(1046~1083) 때 세워졌던 기록으로 폐사가 된 사찰이나 유물은 모두 특별하다. 장대한 위용과 질박함을 보여주는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132호), 상승감의 비례가 아름다운 4층석탑(보물 제40호), 누각 속의 석불입상(石佛立像; 보물 제42호)은 고려 석조조각의 진수를 보여준다. 또 거대한 불상이 연상되는 연꽃문양이 새겨진 석좌(石座;보물 제31호)와 마치 가방을 둘러멘 자세로 고개를 돌린 석인상(石人像)이 이채롭다. 겨울비 속에 그려진 화첩 속 문화유산이 새롭게 복원될 그날은 언제일까.

날이 저물기 전의 여정은 남원향교(南原鄕校)다. 홍살문을 지나 하마비(下馬碑)를 친견하고 향교 사무국장(김양현)을 통해 남원향교의 기원과 변천사를 듣는다. 지난해(2010) 향교 600주년 행사를 치렀으니 기원은 14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왕봉산 아래 둥지를 튼 향교는 대성전, 명륜당, 진강루를 축으로 전각들이 들어서 있다. 의외로 다른 지역에 비해 큰 나무가 없음을 묻자, 건물구조가 조밀해 식재의 어려움이 크단다. 우측담장에 있던 거송도 벼락을 염려해 몇 해 전에 베어버렸다는 향교. 대문 옆의 누각인 진강루와 명륜당을 잇는 교각이 특별한 인상이다. 어떤 문화유산도 역사의 자랑도 현실의 활용이 중요하다. 살아 숨 쉬는 공간이어야지, 박제된 공간이어서는 곤란하다. 이 문제 해결 여부에 따라 향교의 미래를 가늠할 수 있으리.

다음날은 선비교육의 산실이었던 창주서원(滄州書院)과 삶터인 몽심재(夢心齋)를 찾아 분향과 사생을 마치고, 일찍이 가슴에 품었던 혼불문학관을 향해 길을 떠났다. 가는 길목에 잠시 머문 곳은 오리정(五里亭). 성춘향과 이도령이 백년가약 후 이별한 곳이라 하여 눈물방죽이 형성되었다. 그곳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산 능선이 노적봉이다. 혼불마을의 산이다. 이내 마음이 혼불처럼 설레니 최명희 선생(1947-1998)의 영혼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노을이 물드는 시간, 서도역에 이르니 <혼불>의 무대가 된 곳으로 옛 모습을 복원해 놓았다. 마침내 산길과 논길을 가로질러 혼불문학관에 닿아  고방석 관장의 안내를 받았다.

전시장에는 ‘언어는 정신의 지문이고 모국어는 모국어의 혼’이라고 갈파한 최명희 선생의 고백이 절절하다.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고도 간절한 일이랴. 날렵한 끌이나 기능 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손끝에 모으고 생애를 기울여 한마디 한마디 파가는 것이다.’

 


▲ 남원 혼불마을 (138.5×70cm), 한지에 수묵채색 / 오리정과 창주서원의 노상봉 선생 ,(49.5x24.5cm), 화첩
‘꽃심을 지닌  땅’, 혼불마을을 그리는 것이 나의 본분임을

소설 <혼불>의 배경이 이곳 마을로, 1930년대 말 유서 깊은 문중에서 무너지는 종가(宗家)를 지키며 치열하게 사는 종부(宗婦) 3대와, 천하고 남루한 상민들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애환의 이야기다.

국권을 잃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선비문화를 지향하는 이중적 시대상황 속에서 상처받고 한이 서린 사람들의 사연으로 원고지 1만2,000장에 이른 대하소설이다. 그녀의 생애를 바친 <혼불>의 집필은 17년(1980-1996)이나 걸렸다. 그리고 암치료를 거부한 채 완간 후 세상을 떴다. 작가 스스로 밝혔듯이 ‘나 자신에 대한 그리움’을 ‘근원에 대한 그리움’으로 승화하여 생명을 바친 여정이었으니.

‘나는 마치 한 사람의 하수인처럼, 밤마다 밤을 새우면서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의 넋이 들려 그들이 시키는 대로 말하고 가라는 대로 내달렸다. 그것은 휘몰이 같았다…. 지금 이토록, 한 시대와 한 가문과 거기 거멍굴(현  혼불마을) 사람들의 쓰라린 혼불들은 저희끼리 스스로 간절하게 타오르고 있으니, 나는 아마도 그 불길이 소진하여 사윌 때까지, 충실하게 쓰는 심부름을 해야만 할 것 같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다 못한 이야기를 뒤쫓느라고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한다.’

내가 작가의 말에 가위 눌린 건 독신과 고독 속에 지새웠던 슬픔에 대한 동정 때문이 아니었다. 모두를 위한 위로와 해원의 꽃빛이 불꽃으로 타오른 그녀의 생애에 무한 빚을 진 듯, 알 수 없는 자괴감에 진저리쳐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꽃심을 지닌 땅’, 혼불마을을 그리는 것이 나의 본분임을 자각해야 했다.

고관장의 배려로 둘러보는 소설 속의 마을 풍광. 노적봉 아래 호성암마애불과 새암바위, 혼불문학관, 천호저수지가 드러난다. 그리고  솔동산 너머 옛 종가와 마을 아래로 풍요로운 논이 펼쳐진 장면을 화폭에 담았다. 소설 속의 배경을 나는 그림으로 형상화하면 될 것이다. 아니, 차마 무딘 붓끝이나마 님의 영혼에 위로와 벗이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어느새 노을은 혼불이 되어 장엄하게 산마을을 물들인다. 그 혼불의 해원과 소망을 품고 차에 오르니 어둠 속에서 반달이 따라온다. 반달의 그리움, 온달이 되기 위한 새날의 기원! 세월은 이렇듯 새롭게 오는 것이리.


▲ 1 남원향교 (95.5×58cm), 한지에 수묵채색 2 창주서원 (58×95cm), 한지에 수묵채색 3 몽심재 (58×95cm), 한지에 수묵채색 4 만복사지 유물, (82.5x24.5cm), 화첩

 


/ 그림·글 이호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