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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者의 세 가지 터부(taboo

화이트보스 2011. 3. 8. 09:02

記者의 세 가지 터부(taboo)

  • 김대중 고문

입력 : 2011.03.07 22:31

김대중 고문

종교, 지역, 여성문제 잘못 건드리면 '불매운동' 위협
기자들도 가능하면 비판하지 않는 '쉬운 길'로…
異見 조정하는 리더십 없으니 터부는 갈수록 늘어날 뿐

신문기자로 일하면서 기자(記者)의 터부(taboo)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종교'가 첫 번째요, '지역'이 두 번째며, '여성'(집합체로서의), 특히 중년여성이 세 번째다. 이것은 단순히 관념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신문사와 기자들이 오랫동안 겪은 경험에서 얻어진 것들이었다. 종교, 지역, 여성의 문제를 잘못 건드려서 돌아온 것은 신문의 불매운동이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기자의 목이었다.

시대적 상황에 따른 것이지만 이들 세 가지 이외에도 기사의 성역(聖域)이랄까, 터부는 여럿 있었다. 권위주의 시대에 대통령을 비판하면 해당 기자는 물론 자칫 신문사까지 호되게 당했다. 군(軍)을 건드리면 여지없이 보안사에 불려갔다. 결국 "북괴를 이롭게 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주변을 넘나들어야 했다. 정치권력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조선일보는 평민당 의원들의 로마교황 알현 때 있었던 일을 보도했다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끄는 평민당의 불매운동을 당했다. 이른바 '조·평사태'였다. 재벌의 대통령 출마를 비판했다 해서 정주영씨의 국민당과 현대그룹의 전사적인 '반(反)조선 운동'과 싸워야 했다.

그래도 정치권력 집단과 언론의 관계는 시대가 달라지고 우리 사회의 정치문화가 성숙해지면서 많이 달라졌다. 이제 이들에 대한 신문의 비판은 크게 제약받지 않는 상황이 됐다. 그러나 종교, 지역, 여성(이제는 성차별)의 문제는 여전히 기자들에게 되도록 다루지 않는 것이 신상(身上)에 이로운 영역으로 남아 있다. 가톨릭 주교회의가 4대강 문제를 언급했을 때, 천성산 도롱뇽 사건에서 승려가 단식했을 때, 개신교가 이슬람채권법에 반대했을 때, 또는 종교단체 내의 갈등과 반목이 불거졌을 때, 많은 기자들은 되도록 비판적인 기사를 쓰지 않는 '쉬운 길'을 택했다.

이제 '종교'와 '지역'은 막강한 세(勢)와 집단의식을 앞세운 새로운 '권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지난 주말 조선일보는 노사갈등과 폭력시위 등이 줄어든 반면, 지역 이기(利己)와 정교(政敎) 갈등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천주교는 4대강, 개신교는 이슬람채권법, 불교는 템플스테이 예산과 불교차별 문제로 정부와 맞서 있고, 영·호남, 충청권 등 각 지역은 동남권 신공항, 과학비즈니스 벨트, LH본사 이전을 둘러싸고 날선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언론으로서는 포교나 교회 내부의 일도 아닌, 종교와 정부의 갈등 문제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큰 봉변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싸여 있다. 한 언론인은 "현직 대통령에게 '하야(下野)' 운운하며 집권당에게는 낙선운동을 공언하는 막강한 교회가 언론사 한둘쯤 상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일 것"이라고 했다. 동남권 신공항이나 과학비즈니스벨트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언급했다가는 해당지역에서 살아남을 기자나 언론사가 없을 것이라는 것도 기자들의 두려움거리다.

특히 이들 문제가 옳고 그름의 차원이 아니라 선택의 영역에 속하는 것인 이상, 타당성과 합리성의 차원에서 기사를 쓴다는 것이 그렇게 절박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더 나아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사안들은 상당 부분 이명박 정부가 만들었거나 촉발한 것인 만큼 우리가 굳이 어느 한쪽 손을 들어주는 것이 과연 '신(新)권력'의 심경을 건드려 미움을 사는 것을 무릅쓸 만큼 가치 있는 일인가도 기자들이 망설이는 이유가 될 것이다.

기자의 입장에서 새로운 터부도 생겨나고 있다. 차기 대통령이 되겠다는 정치인들의 행보에 관한 보도다. 특정 후보에 대한 비판적 보도는 너무나 신경쓰인다. 맹목적으로 칭찬하는 기사가 아닌 경우, 이른바 친(親) 아무개 쪽 '네티즌'들의 반발 내지 항의는 때로 인격말살이거나 폭력적이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올수록 기자들은 '칼날 위에서 춤추는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이처럼 사회적 대립과 갈등을 증폭시키는 이기적 집단문화는 갈등요소가 세분화하면서 힘을 얻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합하는 중심축의 기능이 없는 데서 더욱 기승하고 있다. 다시 말해 종교나 지역이나 기타 집단문화의 중심에 '어른'의 기능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정치를 비롯, 사회 각 분야에 이견(異見)을 조정하고 통합하는 리더십이 없다. 종교도, 지역도, 다른 집단도 마찬가지다. '어른'이 있고, 나와 다른 견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이 있으면 무리하고 과격한 주장이 판을 칠 여지가 없다. 상대방에 양보하면 무기력으로 매도당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면 자기비하로 낙인찍힌다. 이래저래 "우리를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집단적 풍토가 세(勢)를 이룬다. 그래서 기자들의 터부도 점점 늘어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