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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초‘의 고향 - 사천성 성도 : 장강삼협 여행기 (2)

화이트보스 2011. 3. 21. 17:57

‘동심초‘의 고향 - 사천성 성도 : 장강삼협 여행기 (2)
김정연  스키피 님의 블로그 더보기
입력 : 2011.03.21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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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15 화

 

오늘은 성도시내에 있는 망강루(望江樓), 무후사(武侯祀), 그리고 두보초당박물관을 다녀 보았다.


여류시인 설도와 망강루


성도의 동남쪽 장강의 지류인 금강변 대나무들이 무성한 곳에 당나라 시대 여류시인 설도(薛濤·768~832)를 기리는 망강루가 자리 잡고 있다. 우리에게 낯설은 시인이지만 김성태가 작곡하고 권혜경이 노래한 ‘동심초((同心草)’는 여류시인 설도의 시 “춘망사(春望詞)‘ 중 일부(其三)를 김소월의 스승인 김억이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니 우리와 전혀 인연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설도(薛濤)의 춘망사와 동심초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춘망사(春望詞 其三)>


風花日將老(풍화일장로) 꽃잎은 바람에 시들어가고

佳期猶渺渺(가기유묘묘) 만날 날은 아득히 멀어져 가네.

不結同心人(불결동심인) 마음과 마음은 맺지 못하고

空結同心草(공결동심초) 헛되이 풀잎만 맺었는고.  



<동심초>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감은 맺지 못하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바람에 꽃이 지니 세월덧없어

만날길은 뜬 구름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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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강루 정문을 들어서면 대밭이 울창하게 펼쳐있었다. 설도는 일생동안 대나무를 자신의 지조에 견주어 사랑하며 시를 통하여 대나무의 미덕을 찬미하였다. 대밭을 지나 좀 더 들어가면 설도의 기념관이 나타난다. 기념관 주변에는 설도의 상이 세워져 있어서 마치 그녀가 대밭 주변을 산책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하였다.


기념관을 들어서면 그곳에는 설도(薛濤)가 남긴 시와 그림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설도는 768년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관리였던 아버지를 따라 사천성 성도로 이사왔으나, 관재 낭비로 아버지가 벼슬에서 쫓겨 나고 남편 또한 전쟁에서 죽자 20세 전후하여 기생이 되었다. 당시 절도사 위후는 그녀의 재능을 총애하여 교서에 임명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절도사의 후원으로 당시 백거이, 유우석, 왕건 등 문인과 고숭문, 단문창 등 여러 관료 장수들과도 교우하였다 한다. 설도는 평생 500여 시를 썼으나 지금까지 전해 오는 것은 100여수에 못미친다. 절도사 위후가 죽은 뒤 한 때 11세 연하의 감찰어사 원진과 의기투합하기도 하였으나 사랑을 완성하지는 못하였다. 원진을 흠모하며 지은 시가 바로 ‘춘망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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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도(薛濤)의 기념관을 나서면 완천정을 볼 수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꽃무늬 그림이 박힌 고운 편지지를 만들어 내었다. 이 편지지에 그녀는 시를 적었다고 한다. 그 주변에는 편지지를 만들기 위해 닥지에 사용했던 우물인 설도정(薛濤井)이 자리잡고 있었다.

   

망강루는 설도를 추모하기 위해서 청나라 시절 세워진 누각이다. 망각루에 올라서면 금강이 훤하게 펼쳐져 보인다. 망각루 층층마다 설도(薛濤)의 명시가 걸려 있었다. 4층 누각에 걸려 있는 망각루의 현판은 중국 공산당 지도자였던 팽진(彭眞·1902~1997)의 휘호이다.  공원 한편에는 설도의 묘가 있었다. 이 묘는 문화혁명 당시 진부한 문화라는 이유로 파헤쳐졌다가 훗날 다시 만들어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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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후사 (武候祀)


망강루를 나와 무후사로 갔다. 중국에서 택시를 탈 때 겁이 나는 것은 외국인이라고 엉뚱한 곳으로 끌고 가서 해코지라도 할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이폰의 GPS를 사용하여 택시가 가는 방향을 보면 엉뚱한 곳으로 가는지 안가는지를 미리 알 수 있어서 안심이 되었다. 게다가 돌아 가는지, 정직하게 가는지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택시운전도 첨단기술의 발달로 투명하게 해야만 하는 세상이 되었나 보다.


무후사 앞에는 오래된 나무 옆에 커다란 바위를 세워 놓고 삼국성지(三國聖地)란 글을 새겨 놓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제갈”이 적혀 있는 깃발을 하나 세워 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삼국지를 읽어서 삼국지의 등장인물과 익숙하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고 무후사를 알리려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제갈”이라는 깃발이 알려 주듯, 무후사의 무후란 충무후(忠武侯)라고 시호가 내려진 제갈량을 말하고, 그를 모시는 사당이 바로 무후사이다. 특히 성도에 있는 이 무후사는 중국 최대의 삼국 유적 박물관이며 이미 178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내부에는 혜릉, 한소열묘, 무후사, 삼의묘, 결의루 등의 고건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현존하는 건물들은 청나라 강희제 11년(1672)에 중건, 확장되었다. 또한 촉나라의 승상 제갈량 뿐 아니라 유비, 관우, 장비 등 촉한의 영웅상 50구를 공봉하고 있다.  1961년에 성도 무후사 박물관으로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사내를 들어 서니 많은 홍등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고, 꽃들로 오가는 길을 장식해 놓았다. 2월인데도 많은 중국인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제갈량의 소상뿐 아니라 제갈량의 손자인 제갈상의 소상도 만나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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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성 성도의 민속거리 - 금리(錦里)


무후사 동쪽에는 삼국민속문화를 재현해 놓은 금리(錦里)거리가 있어 성도의 특색음식, 특산물 및 민풍민속을 찾아 볼 수 있었다. 두 개의 커다란 붉은 초롱이 걸린 거리 입구에 들어서면 고색창연한 거리가 한눈에 들어 온다. 거리 양쪽에는 고대의 건축양식을 모방한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다. 상가나 찻집은 모두 2-3층 건물들이었고 갖가지 수예공품이나 골동품들을 팔고 있었다. 군데 군데 많은 노점상들도 줄지어 있었다.


사천성의 미식들도 이곳 금리에서 맛볼 수 있었다. 이곳의 역사인물인 장비의 이름을 딴 장비소고기가 있는가 하면,  동그랗고 눈처럼 흰 탕원, 작고 예쁜 물만두, 구슬처럼 투명한 충차오서우(龍抄手) 등이 있었다. 노점상에서 설탕을 녹인 것으로 동물형상을 만들어 파는 상인은 고객이 없어 꾸벅 꾸벅 졸고 있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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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 초당 박물관


이곳을 벗어나 두보초당박물관으로 가 보았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중국의 시성(詩聖)인 두보는 안사난 이후 759년에 감숙성에서 이곳 성도로 왔다. 이곳의 완화계 기슭에 초당을 지어 4년간 기거하면서 240여수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 이 위대한 시인을 기념하기 위하여 20만 제곱m의 부지에 두보초당박물관이 지어졌다.


두보는 중국에서 시선(詩仙)이라고 불리우는 이백과 동시대를 살아 간 사람이었다. 그들은 744년 초여름 만나서 함께 여행하며 술도 마시고 시를 토론하였다고 한다. 이 위대한 두 시인의 만남과 우정은 중국 문학사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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