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도 불바다 된 게 불과 반년 전인데 여당 의원부터 나서서 5·24 대북조치 흔드나… 이러다 대선때 여당후보가 김정일 향해 반성문 쓸지도
동독이 서독에 흡수된 지 21년이 지났다. 그동안 우리는 통일독일을 부러워하면서도 독일방식을 따라해선 안 되는 줄 알았다. 서독처럼 견실했던 나라가 동독을 떠안고 나서 경제가 휘청거리는 판에 우리에게 그런 일이 닥치는 건 재앙이라고 말하는 통일전문가들을 많이 봤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을 거치면서 '흡수통일'은 입에 올리는 것조차 불경스러운 단어가 돼 버렸다.하지만 요즘 우리는 한스-울리히 자이트 주한독일대사로부터 전혀 다른 말을 듣고 있다. 그는 이달 초 한 출판기념회에서 "독일은 적지 않은 통일비용을 지불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 이후 유럽연합 내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력을 가진 국가로 부상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통일을 통해 수많은 동독인들이 누리게 된 자유처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도 크다"고 덧붙였다.
자이트 대사는 통독(統獨) 직전 3년 동안 모스크바 주재 대사관에서 일했다. 몇 달 전 북한에도 다녀온 그를 얼마 전 야당의원들이 국회로 초청했다. 물론 이 자리에서 흡수통일의 부작용을 걱정하는 질문이 빠질 리 없었다. 대사의 대답은 이랬다. "흡수통일 과정에서 많은 비용이 들었고 경제력도 상실했다는 주장은 5~6년 전까지는 타당성을 갖고 있었을지 몰라도 현재는 그렇지 않다. (통일 후) 경제적 쇼크를 벗어나는 데 15년이 걸렸지만 20년이란 시간을 놓고 보았을 때 통일은 독일 경제에 엄청난 득이 되었다. 독일에서 통일비용 문제를 거론하는 사람은 더이상 없다."
통일독일이 워낙 잘 나가서인지 우리 사회에서 통일비용 타령은 많이 줄었다. 대신 요사이 자주 듣게 되는 건 중국 타령이다. 정부는 작년 북한의 천안함 폭침에 대응해 북한에 대한 교류 협력을 끊는 5·24 조치를 취했다. 그 조치가 시행된 지 1년밖에 안 된 지금 여당 사람들조차 '회군(回軍)'을 입에 올리기 시작하면서 그 이유가 중국 때문이라고 말한다. 중국이 뒤에서 버티는 한 북한을 압박해 봐야 소용없으니 이제 방향을 틀자는 말이다.
중국의 벽이 거대해 보이는 건 사실이다. 북핵 폐기보다 김정일 정권의 안정을 더 중시하는 듯한 중국을 미국도 어쩌지 못하고 있다. 자이트 대사를 만난 한 야당의원은 이런 걱정도 털어놓았다. "염려되는 건 우리 정부의 대북(對北) 대화 단절과 억제 강화가 북한의 몰락을 촉진하거나 방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북한이 붕괴한 후 남한에 도움을 청할지 중국에 요청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북한의 몰락을 재촉해선 안 된다." 지금 상태에서 북한이 망하면 중국 품으로 달려갈 수 있으니 우선은 북한을 지원해 북한 경제를 키우는 일부터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엔 중국이 눈짓만 해도 미리 기어드는 경향이 생겨났다. 하지만 동구(東歐) 공산체제는 소련의 지원이 없어서 망한 게 아니다. 안에서 스스로 무너졌다. 김정일 정권 역시 중국이 곁에서 아무리 부축해줘도 수령독재 체제를 개혁하지 않는 한 언젠가 뒤집히게 돼 있다. 우리는 북한의 수령독재 체제를 개혁하지 않고 부축하려는 중국의 시도에는 언제나 제동을 걸어야 한다. 북한이 개방체제로 나아갈 때 우리와 손잡도록 하기 위해서도 중국이 하자는 대로 따라만 다녀선 안 된다.
5·24 조치로부터의 회군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우리가 대북지원을 끊은 탓에 북한 경제가 금방 중국에 먹히기라도 하는 양 호들갑을 떤다. 이들은 대개 미국과 일본을 향해 북한을 바꾸려면 돈맛을 알게 해야 하니 투자하라고 채근하던 사람들이다. 그런 논리라면 미국돈이든 중국돈이든 북한에 들어가 북한을 변화시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돈의 국적을 따질 이유가 없다. 솔직히 김정일의 문제는 말로는 천지개벽이라면서도 실제로는 시간을 질질 끌며 상하이식 개방을 피해온 데 있다. 따라서 중국의 투자가 늘어나 북한 경제가 조금이라도 개방 체제로 나아간다면 우리가 환영까지는 몰라도 요란 떨며 걱정할 일은 아니다.
이명박 정부가 그동안 북한을 제대로 요리하지 못해온 건 사실이다. 김정일은 5·24 조치에 겁먹긴커녕 작년 11월 연평도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렸다. 그로부터 채 반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여당 4선의원이자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장을 맡고 있는 사람이 앞장서서 대북정책을 바꾸자고 회군의 나팔을 불어대고 나섰다. 그게 여당을 '쇄신'하는 길이란다.
좌파들은 지금껏 김정일 편들기에서 물러선 일이 없다. 북한이 우리 땅에 포탄을 퍼붓는 와중에도 김정일 정권을 붕괴로 이끄는 정책만큼은 안 된다고 버텨왔다. 그런데 우파들은 정권 교체 3년 만에 벌써 인내심의 바닥을 내보이고 있다. 내년의 양대 선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단다. 이렇게 가다 보면 내년 대선 때 여당후보가 김정일을 향해 대북정책 반성문을 써보내는 광경을 지켜보게 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