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전중인 정규 중국군

교전중인 베트남 후방 민병대들 한국으로 말하면 예비군들 
베트남에 투입전 사열중인 중국군

취사중인 중국군
중월전쟁은 1979년 2월 17일 국경분쟁을 시작으로 일어난 중화인민공화국과 베트남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의 승리로 남북 베트남은 공산화통일되었고, 그 여파로 인접국인 캄보디아와 라오스마저 공산화되었다. 베트남 공산당은 전쟁중에 중국의 물적, 인적 지원을 전폭적으로 받았으나, 역사적으로 월남인들의 대중국감정이 좋지 않은데다가, 공산정권이 남베트남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화교를 탄압하여 양국관계는 험악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베트남 공산당은 공산권 국가들을을 양분한 중소분쟁에서 소련측을 지지하여 중국의 분노를 샀다. 이에 동시에 친중국적인 캄보디아와 베트남의 관계도 악화되었으며, 급기야 베트남-캄보디아 전쟁이 발발하여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를 점령하고, 친베트남 괴뢰정권을 세우자, 중국은 캄보디아 전선에 머무르던 베트남군의 주력을 철수시키기 위해서 베트남의 북부를 침공하였다.
전쟁 과정
국경인 윈난성에 집결했던 중국군은 1979년 2월 17일 국경을 넘어 공세를 시작하였다. 베트남 북부는 열대 산악지형이었기 때문에 대규모 병력의 이동에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당시 베트남군은 주력이 캄보디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침공군에 맞선 병력은 민병대와 국경수비대뿐이었다. 그러나 베트남군은 수십년간의 실전경험이 있고 현지 지형에 익숙했지만, 중국군은 60-70년대를 흔들었던 문화대혁명의 와중에서 통신이나 장비면에서 근대화가 지체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리하여 중국군은 커다란 희생을 내면서 계속 전진하여 국경에서 40km떨어진 교통의 요지인 란손 을 3월 6일 점령하였다. 이후 중국은 일방적으로 "징벌적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철군한다"고 발표하여 란손을 철저히 파괴하고 국경 밖으로 철수하였다.
결과
중국군은 "목표를 달성했다"고 주장하며 철군했으나, 실제로는 처음에 의도했던 캄보디아 주둔 베트남군의 철군을 이뤄내지 못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목표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 내내 국경선의 확정을 둘러싸고 중국군과 베트남군의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다가 1989년에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로부터 철군하자, 평화협상이 시작되어 1999년 협정이 체절되었고, 중월간의 국경이 확정되었다. 이 와중에서 1980년대 내내 베트남에서는 해상루트를 통한 화교들의 탈출이 계속되어 보트피플이 동남아를 해상을 떠돌기도 했다.

베트남 포로들을 치료중인 중국군

중국군 포로를 감시하는 베트남 민병대 여군 (이 당시 세계를놀라게한 사진 입니다)
중국군을 포로에게 총을 겨누는 베트남군

중국군 전차 이동장면

그때까지 자국 국민의 3분의 1을 학살한 중국군에 지원을 받은 킬리필드 캄보디아 정권을 물리치고
캄보디아를 접수하고 있는 베트남에 주력군 후방에서 도와주러 온 중국 정규군을 물리친 민병대(향토 예비군)에 역할에 힘입어 그들은 학살로 고통받은 캄보디아 인민들을 구출 하고 중공군 꼭두각시 크메르루즈를 물리치고 친베트남 정권을 캄보디아에 세웠다. 마지막 사진은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을 접수하러 들어가는
베트남에 주력군 이들은 프랑스와 미국과 전쟁에서 용맹을 떨친 용사들이였다.